第二章연화검회(蓮花劍會)
주서천, 십사(十四) 세.
장홍과 장서은이 열다섯 살이 되면서 예정대로 출각했다.
두 사람은 아쉬워하면서 내년을 기약했다.
‘사형과 사저는 원래의 역사에서 어떻게 됐을까?’
친해진 사람이 생기니 자연스레 걱정도 따랐다.
장홍과 장서온의 미래는 주서천도 잘 모른다.
기억을 몇 번이나 더듬어 봤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럴 경우 미래는 크게 둘로 나뉜다.
어릴 적에는 영재였으나, 깨달음의 벽에 막혀 절망하고 그저 그런 무인이 될 경우가 일(一)이다.
이(二)는 별 활약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경우다.
후자일 경우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됐다.
오늘까지의 일로 미래가 상당 부분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장홍과 장서은의 죽음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경우도 존재한다.
그래서 요 일 넌 동안 귀찮긴 하지만, 비무를 하면서 무공에 도움이 되도록 몰래 도와주곤 했다.
지닌 힘이 강해진다면 불확실한 미래도 대비할 수 있다.
“사형과 사저도 당분간 볼 일이 없을테니, 일 년 동안은 죽은 듯이 수련만 하고 지낼 수 있겠네.”
주서천은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슥 훑었다.
몇 년 전, 스승과 함께했던 수련장소.
절벽 등반을 하면서 생사의 경계를 넘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다 끼쳤다.
인제 와서는 추억, 이라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국 다시온 건 사람이 드문 곳이라 그렇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내공심법을 운용했다.
하단전에서부터 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 갑자하고도 칠 년의 양이었다.
내공은 이제 더이상 기하급수적으로 쌓이지 않았다.
그래도 남들보다 두 배는 많이 쌓이긴 했다.
열세 살 때 일 갑자 오 년이었으니, 일 년 만에 딱 이 년 늘었다.
‘자하신공, 육성.’
자하신공은 오성에서 육성에 올랐다.
여전히 거북이처럼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색으로 빛나지는 않으나, 그래도 화산의 일대신공으로 운영되는 내기가 신체를 돌며 힘을 선사했다.
손에 쥔 검을 세워 자세를 잡고, 내력이 공력으로 전환된다.
농도 짙은 기에 대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제이식, 화우선형(花雨扇形)!’
쐐액!
검을 정면을 향해 쭉 뻗었다.
그 움직임이 번개와 같았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검을 내지른 순간,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수십여 개로 나뉘어져 쏘아졌다.
두 자릿수로 분산된 검들은 유성처럼 긴 궤적을 남기곤 수십 그루의 나무에 꽂혔다.
콰지직!
나무의 정중앙에 구멍이 났다.
또 다른 나무는 옆구리가 터진 것처럼 측면에 반월이 생겼다.
그 외에도 나뭇가지만 툭 떨어지거나, 혹은 자갈이 튀면서 지면에 기다란 검상이 생기기도 했다.
“하아, 하악!”
주서천이 지친 듯이 거칠게 심호흡했다.
그 얼굴은 짜증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끄응!”
내공의 소모가 극심해서 불만인 게 아니었다.
제이식은 소모되는 내공만큼 큰 파괴력을 지녔다.
짜증이 나는 건 무공 자체의 어려움이었다.
제이식을 수련한 지 제법됐지만, 제대로 펼친 적이 없었다.
원래라면 자하진기(紫霞眞氣)로 된 꽃잎이 떨어져야 했고, 검로(劍路)도 일정해야 했다.
방금 노린 방향은 정면이었다.
바닥에 검상이 남으면 안 됐다.
방향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증거다.
“괜히 화산 제일의 천재에게만 허락된 무공이 이라는 건가. 하마터면 개파조사님을 욕할 뻔했어!”
정파의 기둥, 구파일방을 이끄는 수장(首長)이 되려면 여러가지가 요구된다.
무공은 그중 기본이지만 무공만으로 문파를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문인이나 방장이 꼭 문파 제일의 고수가 아니다.
실제로 현 소림사 방장은 소림의 최고수는커녕, 고수의 반열에 들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는 소림사가 무학보다는 불학(佛學)을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불학이나 법력이 첫째이고 무공은 둘째,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에 한한다.
도가 무학의 대표인 무당파 역시 비슷했다.
그들이 우선하는 건 어디까지나 도(道) 그 자체이지, 무(武)는 아니었다.
그 외의 구파일방도 비슷했다.
정파의 구파들은 대부분이 도가나 불가가 원류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 중에서도 예외가 있었다.
바로 개방과 화산파였다.
개방은 그렇다쳐도, 화산파는 정말 예외적이었다.
화산파도 여타 도가 문파처럼 도가 사상을 중시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세속적인 성향이 있긴 해도, 그건 정말 약간의 수준이었다.
구파에서보면 딱 중간에서 그 위였다.
화산파의 최정예인 매화검수가 무공만 강해선 될 수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나 그럼에도 불과하고 화산의 장문인은 전쟁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항상 최고수가 맡았다.
‘자하신공이나 자하검결이 어중간한 재능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지! 이러다 토 나오겠다!’
자하신공을 습득하려면 일단 천재여야 한다.
그것도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단 재능만 발견되면, 장문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전대 천재의 가르침, 영약까지 따르니 화산 제일의 고수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암천회주는 얼마나 괴물인거지?”
그리고 화산 제일의 고수도 암천회주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암천회주에 대한 공포심이 치솟았다.
주서천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불안을 떨쳐 냈다.
“하여간 천재란 것들은!”
그 대신 괜한 사람들을 싸잡아서 욕했다.
“누구는 칠십칠 년을 살아 화경에 겨우 올랐는데도 이렇게 고생하는데, 걔들은 재미까지 느끼면서 무공을 배우잖아? 세상은 정말로 불공평해!”
그래도 욕하니 불안이 좀 가셨다.
답답했던 마음도 뻥 뚫린 듯했다.
“나 같은 범재는 걱정할 시간에 무공 수련이라도 더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가망이 없어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소모된 내공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음, 다음은 일월신궁인가.”
운기조식이 끝나고 항상 숨겨 둔 자리에서 활과 화살을 꺼내곤, 하늘을 살펴 날씨를 확인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날씨다.
해가 중천에 떠 따스한 빛을 내뿜어 대지를 뜨겁게 달궜다.
일월신궁은 수련 환경이 특이했다.
일단 낮과 밤이여야 하고, 해와 달이 잘 보여야 했다.
구름이 해와 달을 가려도 수련이 가능했지만, 이상하게도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했다.
일월신궁을 알았을 때, 해와 달을 쏘아 떨어뜨릴 만큼 뛰어난 궁술이라 붙여진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해와 달에서 나오는 자연지기를 이용한 무공이었다.
일월신궁의 일성은 기본적인 궁술이었고, 이성은 화살에 기를 담아 파괴력과 속력을 높일 수 있었다.
삼성은 태양의 양기(陽氣)를 담을 수 있고, 사성에는 달의 음기(陰氣)를 담을 수 있었다.
음양이기(陰陽二氣)를 쏠 수 있는 화살이라니, 과연 신궁(神弓)이라 불릴 만했다.
“흐응.”
화살을 건 시위를 뒤로 쭉 잡아당겼다.
호흡에 따라 화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주서천은 ‘후우’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멈췄다.
손에 쥐고 있던 화살도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멈춘다.
그 상태로 왼쪽 눈을 감아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내기를 끌어올려 화살에 실었다.
내공으로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 게 아니다. 화살에 기를 실었다.
궁공(弓功)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재주였다.
‘일 리(里 : 1 리 = 500 미터).’
활시위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파앙!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서 공기가 터졌다.
‘쇄애액’ 하고 파공성을 내면서 유성이 됐다.
미세한 흔들림 하나 없이, 소름 끼칠 정도로 깨끗한 일직선을 그려 낸 화살은 정확히 표적에 맞았다.
일 차 표적은 손가락 마디만 한 두께의 나뭇가지였고, 이 차 표적은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이었다.
그리고 최후 표적은 그 너머에 있는 아름드리나무였다.
“오! 나뭇잎까지 맞췄어!”
궁술이 은근 어렵다.
특히 화살에 기를 실을 때, 미세한 조절이 요구됐다.
과하면 화살이 터져 버리고, 부족하거나 어중간하면 방향이 꺾이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
그래도 성공만 하면 그 효능은 상당했다.
일단, 바람의 영향을 일절 받지 않았다.
일월신궁의 특성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명중률이 상당히 오른다.
그 외에는 전에도 설명했듯이 파괴력과 속력이 상승한다.
“이대로만 하자.”
수련의 나날은 계속됐다.
* * *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나는 날씨다.
자주 물을 찾게 되는 더위였다.
유독 기온이 높았다.
“사형, 사형.”
낙소월이 주서천을 불렀다.
“응?”
“뭐해요?”
“숨 쉬어.”
“……”
낙소월이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표정조차 예쁘고 귀여워서,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열세 살이 된 낙소월은 한층 더 예뻐졌다.
날이 갈수록 미색이 빛을 발했다.
‘ 하아.’
속으로 침음이 절로 나왔다.
낙소월을 곁에 두고 보게 되면 가끔 정신을 못 차릴 때가 있다.
“참 나, 그걸 지금 재담(才談)이라고 ……”
낙소월이 이마를 찡그렸다.
찌푸린 것도 귀여웠다.
“사형,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시선을 느낀 낙소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서천이 아차, 하고 눈을 돌려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 심장에 좋지 않은 네 귀여움을 머릿속으로 영구 보존하고 있었어. 관심 없는 척하면서 계속 보려고.”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아차!’
아뿔사, 하고 낙소월을 확인했다.
허억!
주서천이 제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은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눈앞에 선녀(仙女)가 있었다.
낙소월은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숙인 채로 가녀린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순간 화가 난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낙소월은 얼굴을 붉힌 채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소맷자락을 쥐락펴락하면서 가만히 있는 게 정말로 귀여웠다.
“어흠!”
어색한 분위기를 떨쳐 내려고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난 왜 찾았어?”
주서천의 배려에 낙소월도 평정을 찾으며 답했다.
“연화검회(蓮花劍會)의 소식을 전달하려고 왔어요.”
“연화검회?”
주서천이 대놓고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올해야?
낙소월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왜? 그동안 없었잖아.”
연화검회는 일종의 비무 대회다.
다만 이름에도 알 수 있다시피 참가자는 단연 연화각원에 한해서다.
“사형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낙소월이 쓰게 웃었다.
“끙.”
안 했던 게 아니라, 못 했다.
그간 무림에 여러 일이 있어서 화산파도 바빴다.
수림구채와 삼안신투의 비고.
오늘에 와서야 정리가 끝나고, 화산파도 제자리를 찾으면서 원래 있던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나도 내년이면 출각하잖아. 그 전까진 마음 편히 지내고 싶어서 그랬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연화각원이 워낙 소수다 보니 거부권이 없어 정말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참가해야 했다.
그리고 출전하게 되면 자연히 여기저기서 주목을 받는다.
그 시선들이 싫었다.
보는 눈이 많아질 터이니 , 당분간 몰래 빠져나와 수련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불만이었다.
‘적당히 하다가 퇴장하자.’
연화검회는 연례행사지만, 그렇다고 무림인들에게 화제가 될 정도의 축제는 아니다.
관계자들을 제외하곤 구경꾼 없이 진행되며, 연화검회 자체도 이틀이면 끝나고 길어봐야 나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출전자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다신 오지 않는 기회야.”
애초에 연화검회는 비무 대회라기보다는 일종의 심사에 가깝다.
연화검회에 출전해 우수하거나, 혹은 눈에 띄는 성적을 보이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따른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정의 영약, 명검이나 보검 등이 상으로 내려졌다.
물론 이건 일부에 불과하다.
출전자들이 그렇게나 목말라하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우승은 물론이고, 눈에 띄지 말자. 괜히 이목을 끌었다가 매화검수로 추천이라도 받으면 큰일이니까.”
연화검회의 감독관은 대대로 화산오장로, 매화검장이 맡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차기 매화검수가 될 만한 인재를 이 대회를 통해 차출하기 때문이었다.
주서천 입장에선 이 연화겸회가 매우 성가셨다.
우승자를 차기 매화검수로 점찍는 것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만족스러운 자질이 보이면 차출해 갔다.
자신도 한때 화산의 최정예이자 우상인 매화검수를 꿈꾼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매화검수가 되면 자유가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최정예인 만큼, 일반제자들이 수행하지 못하는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곳에 투입된다.
이렇다 보니 화산에서 대기하면서 임무를 기다리거나, 또는 항상 임무수행으로 나가 있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막고, 또 바꾸기 위해 무림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주서천 입장에선 부적합했다.
“적당히만 하자, 적당히.”
연화검회가 시작됐다.
중앙에 연무장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출전자인 연화각원들이 적당한 곳에 앉거나 서 있었다.
연무장 근처 담장 위에는 아래가 훤히 보이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앉은 사람들 탓에 그곳은 자연히 상석(上席)이 됐다.
“삼 년 만인가……”
화산파의 장문인, 검선 우일문이 중얼거렸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떠오른 건 반가움이었다.
“호오, 이번에는 꽤나 쟁쟁할 것 같구려.”
화산오장로, 지검옹 학송이 출전자들을 슥 훑어보곤 말했다.
“누가 우승할지는 정해져 있지만요.”
철혈매검, 심옥련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얼굴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눈은 연무장 근처, 사손인 낙소월에게 향해 있었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오?”
단약사, 영진이 ‘호호’ 하고 웃으면서 심옥련의 심기를 건드렸다.
“예.”
심옥련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즉답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영진이 의미 모를 웃음을 보이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따라가니 낯익은 소년이 있었다.
‘주서천……’
심옥련이 눈썹을 슬쩍 구부렸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속으로 삼켰다.
한때, 운이 좋게 영약을 취하면서 내공만 많아져 내화외빈이라며 조롱받던 소년이었다.
심옥련은 그가 재능이나 노력 없이 운과 요행으로 연화각에 들어간 걸 몹시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 인식은 노수창병과 수림구채의 일을 계기로 바꾸게 됐다.
그 때의 활약상을 듣고 그녀도 놀랐다.
다만 그 전부터 주서천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워낙 강했던지, 인식이 바뀌었어도 그 응어리가 어중간하게 남아 있었다.
“영 장로님 말씀대로요.”
장로들 중에서도 유난히 건장한 중년인이 영진의 발언에 동의하면서 나섰다.
명수악 조무양이었다.
조무양은 기대되는 눈으로 연무장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꽂히는 곳에도 한 소년이 있었다.
“매화검수가 될 생각도 없는 내 사손이 그 기회를 빼앗을지도 모르니, 미리 사과하겠소.”
연화각원 중에서 매화검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주서천과 조무양의 사손이었다.
명수악의 사손, 방철삼이 매화검수에 관심이 없는 건 간단했다.
애초에 검을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화산파가 무당파와 나란히 검파로 유명하나, 그렇다고 제자들이 모두 검수인 건 아니다.
검법 외에는 잘 쓰이진 않지만 엄연히 장법(掌法)이나 조법(瓜法), 수공(手功) 등의 무공도 존재한다.
조무양은 그중 수공을 택하고 인정받아 화산오장로까지 올랐다.
무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공의 고수다.
방철삼 역시 조무양의 사손답게 검공 대신 수공을 택했다.
매화검수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답니다. 결국 누가 이길지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심옥련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누가 할 소리.”
조무양도 여유만만한 태도로 답했다.
“허허허, 열의가 여기까지 느껴지는군.”
우일문이 두 장로의 신경전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선의의 경쟁이기에 굳이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우일문이 웃음을 멈추고 주서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선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의문과 호기심이었다.
‘이 친근함은 무엇인고?’
화산의 장문인이란 게 그렇게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주서천을 본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수림구채와의 싸움에 휘말려 행방불명됐다가 생환했을 때도 보고만 들었을 뿐, 직접 반겨 주진 못했다.
삼안신투의 비고로 워낙 정신없이 보내서 그랬다.
마지막으로 봤던 건 사 년 전, 상궁회의 때 주서천의 연화각 입각 논의로 잠깐이었다.
확실히 그때도 내공이 범상치 않아 신기해하긴 했지만, 그뿐이다.
그 외엔 별 대단할 것이 없었다.
정보에 의하면 재능도 재능이고 검법도 형편없다고 해서 그냥 정말로 운이 좋은 거라고 넘겼다.
그러나 사 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봤을 때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우일문은 이 친근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시선을 받고 있는 장본인, 주서천이 예상했듯이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낙소월이 무슨 말이나는 듯 눈짓을 보내오자 손을 흔들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표현했다.
주서천은 상석을 힐끗 쳐다보곤 시선의 주인을 확인한 다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진과 우일문이었다.
영진의 시선이야 전부터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것일 테지만, 우일문의 시선의 이유가 꽤나 성가셨다.
‘본능적으로 자하신공에 이끌리셨군.’
요 이 년 동안 자하신공을 수련하면서 알게 된 기능이 있었다.
바로 경지의 은폐 능력이다.
자하신공은 원래 특색이 강하다.
자색으로 된 기가 형상화되어 일렁이기에,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하나 반대로 이 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설사 고수라 할지라도 자하신공을 수련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정목이나 영진이 진맥을 짚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주서천이 자하신공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최근 알아낸 건 이 특징의 연장선이었다.
숨길 수 있는 건 자하신공뿐만 아니라, 경지도 통용됐다.
덕분에 절정의 경지인 걸 숨길 수 있었다.
다만 수림구채 때 보여 준 것이 있어 이류에서 일류 정도로 조절해뒀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쓸데없지만……’
이 은폐 능력이 영구적인 것도 아니었다.
자색의 특징이 나올 때 쯤이면 자연스레 사라진다.
문제는 경지에 올라 스승에게 인정받기 전까지 화산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힘을 숨기고 상대를 방심시켜 뒤통수를 친다, 라는 전법은 괜찮지만 나가지 못하면 그럴 일이 없었다.
역대 장문인이나 수련자를 찾아봐도 이런 전법으로 이득을 본 자는 전무할 것이다.
그래도 천하의 상천십좌의 눈조차 속일 수 있으니, 대단하긴 대단했다.
괜히 화산의 신공이 아니다.
우일문조차도 무의식적으로 주서천의 신체 내부에 잠들어 있는 자하진기가 신경 쓰이는 정도로 끝났다.
‘피역(避役 :카멜레온) 같군.’
피역은 주로 남만처럼 열대 지방에만 서식하는 생물인데, 기온이나 기분에 따라 몸의 색깔이 변한다.
이러한 변색(變色) 능력은 천적이나 포식자들과 만났을 때 특히나 유용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나무 근처에 있다면 나무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색깔이 변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자하신공도 마찬가지였다.
진정한 힘을 이끌어 내기 전까진 약하니 정체를 숨기는 것 같이 보였다.
피역과 다른 게 있다면 자하신공의 수련자 근처에는 먹이 계층의 최고포식자들이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 * *
연화각원은 열 명 밖에 되지 않는다.
연화검회의 출전자도 열 명이라는 의미였다.
일일(一 日) 째는 오(五)회전이다.
이일(二日)에는 수가 맞지 않으니 제비뽑기로 부전승을 정하기로 했다.
와아아!
몇 없는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출전자의 스승이나 사형제들 등의 관계자들이었다.
일회전의 출전자는 자신과 나이가 같지만, 일 년 늦게 들어온 소년이었다.
그의 스승이 매화검수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이름을 날린 삼대제자였다.
하지만 상대 쪽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더 대단했다.
“낙소월!”
철혈매검의 사손, 낙소월이었다.
미모면 미모, 무공이면 무공, 재능이면 재능!
거기에 화산오장로가 사조다.
뭐 하나 빼놓은 것 없다.
동갑인 소년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주서천이 혀를 차면서 그를 동정했다.
‘하필이면 처음부터 낙 사매냐.’
연화검회는 패배해도 실력만 잘 보이면 된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하다면 그것도 힘들다.
“잘 부탁드릴게요.”
낙소월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양 출전자, 준비!”
감독관, 매화검장 위지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작!
주의사항은 없었다.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욕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자는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판단력은 각자의 기량에 맡겼다.
타앗!
먼저 몸을 날린 건 소년이었다.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소년의 손에서 화산의 검이 펼쳐졌다.
“호.”
완전하지는 않지만 십사수매화검법이었다.
공격은 훌륭했다.
초조한 나머지 섣불리 날린 것도 아니었다.
박수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소년의 대전운이 나빴다.
낙소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아오는 검에 응수했다.
그 움직임은 번개와도 같았으며, 또 괴력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검이 부딪히자 소년이 깜짝 놀랐다.
전력을 다한 검이 허무할 정도로 밀리면서 위로 튕겨졌다.
회수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낙소월의 검이 뛰쳐나가 바람을 가른다.
그 검 끝은 소년의 가날픈 목 앞에서 멈춰 섰다.
“허어!”
“대단하군!”
승부가 났다.
당연히 낙소월의 완승이었다.
일합(一合)만으로 끝나다니, 대단하긴 대단했다.
무엇보다 상대는 그래도 연화각원, 사대제자 중 기재에 속하는 이가 아닌가.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깔끔할 정도로 정확하고, 또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검. 철혈매검 그대를 참 닮았구려.”
학송이 턱을 벅벅 긁으면서 놀라워 했다.
“고맙습니다.”
심옥련이 당연하다는 어조로 답했다.
사손의 칭찬을 받았으나 무덤덤했다.
“다음!”
일회전이 허무하게 끝났다.
전 출전자들이 서로 인사하곤 퇴장했다.
곧 이회전이 시작됐다.
“오, 이거 주 사형이 아니신가?”
방철삼이 비무대에 올라오면서 진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