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무사귀환(無事歸還)
길다고 말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강호행이 끝났다.
끊임없이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곳에 참전했다.
이후 적에게 포위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다시 화산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수림구채와 천하백대고수에게 습격을 받고 행방불명됐다.
어찌어찌 구사일생해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천하백대고수 정도는 아니지만 사도천의 고수에게 습격을 당했다.
연화각의 강호 출도는 연례행사였지만 역대 강호행 중에서도 이 정도로 파란만장한 적은 없었다.
그 외에도 남들에게 밝힐 수는 없는 일도 있었다.
훗날 미래의 역사에 중요 인물이 될 만각이천과 상왕.
이 둘과의 만남 덕에 삼안신투의 비고도 털었다.
“음, 그다지 주목받지 않아서 좋군. 예상대로야.”
평소였다면 자신의 행보가 꽤나 주목받고도 남았겠지만, 지금 무림은 비고로 이목이 쏠려 있었다.
화산파도 마찬가지다.
유정목 다음으로 주서천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었던 구풍 또한 어쩔 수 없이 중경으로 갔을 정도였다.
화산파의 자존심인 연화각원을 데려오는 건 확실히 중요한 일이었지만 비고와 비교될 건 아니었다.
주인 없는 삼안신투의 비고는 주요 전력을 전부 투입해서 탐색해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주서천의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덕분에 괜한 주목이나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비고의 재물은 어차피 사정상 전부 손에 넣을 수 없으니, 그 존재를 철저하게 이용해서 득을 봤다.
“사제!”
누군가를 반기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눈물을 글썽이는 사형제가 있었다.
“사형, 사저.”
장홍과 장서은이었다.
“이 녀석!”
장홍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주서천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곤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헝클어지면서 새집처럼 변했다.
장서은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표정을 보니 그동안 자신 탓에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우리가 너를 끝까지 신경 썼어야했는데……!”
장홍도 훌쩍이곤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게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듯 했다.
비록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주서천에게 정이 쌓여 있었다.
또한 장홍은 어리나, 사형으로서의 책임감에 죄책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사제가 돌아왔다.
그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기뺐다.
“괜찮습니다, 사형과 사저 탓이 아니니까요.”
주서천은 어린 둘을 안아 주면서 등을 토닥여 줬다.
어째 장홍과 장서은이 더 사제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니?”
“자세한 걸 듣고 싶어.”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게……”
“사형!”
말이 도중에 끊겼다.
장홍에게 안긴 채로 고개만 돌렸다.
목소리의 근원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굴썽이는 눈망울, 일 년 사이에 한층 더 빛을 발하게 된 미모, 급히 달려온 듯 숨을 헐떡인다.
“사매.”
낙소월이었다.
“…… !”
낙소월이 몸을 번개같이 날렸다.
장홍이 그 기세에 놀라 옆구리에 낀 주서천을 놓아주었다.
“사형!”
낙소월이 주서천에게 안겼다.
“그래.”
주서천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살아, 있어서…… 정말, 로…… 다행 끅……”
낙소월이 도중에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이에 비해 성숙해도 아이는 아이다.
정과 친분을 쌓았던 사람의 죽음은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소녀에겐 너무나도 무거웠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
품 안에서 우는 낙소월을 열심히 토닥여줬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전생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군이 대패했던 격전지에 참전했다가, 운이 좋아 생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가 반겨 준 적은 없었다.
그때는 침상에 누워 의원에게 치료만 받고 끝났다.
몇몇 면식만 있는 사형제가 와서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 스승을 잃은
이후 자신은 쭉 혼자였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있었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이 날, 사형제의 연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 * *
중경, 삼안신투의 비고.
“아아악!”
탐사는 순탄치 않았다.
기관 지식이 전무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툭하면 함정에 걸려 사망자나 부상자가 대거 발생했다.
무림맹이나 사도련이나 마찬가지였다.
비고가 공개된 지 어언 석 달.
아직 중간도 채 가지 못했다.
그러나 간간이 발견되는 보물 덕에 도전자는 끊이지 않았다.
정파, 사파 외에 낭인들도 몰렸다.
가끔씩 전대 고수의 명맥을 잇는 자들도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시끌벅적해졌다.
탐사가 장기화되면서 암장(巖場)도 모습을 조금이나마 바꿨다.
적어도 사람들이 지나는 길과, 막사가 들어올 공간 정도는 생겼다.
사람이 많다 보니 상인들도 제법 몰렸다.
그들은 비고 인근에 세워진 임시 진지에 여러 가지를 팔았다.
평소에 보지 못하는 고수들이 모이자, 그에 따른 구경꾼들도 몰렸다.
사람은 물론이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던 암장은 어느덧 사람들도 북적였다.
다만 마을을 형성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비고 외엔 아무것도 없으니 탐사가 끝나면 모두 굶어 죽는다.
“이 개만도 못한 놈!”
“비고 안에서 보자!”
정사가 한자리에 모이면 싸움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림맹과 사도천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게 비고협정(秘庫協定)이었다.
그 탓에 탐사 기간은 물론이고 각자 세력권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싸움은 강제적으로 금지됐다.
확실히 비고협정이 있어 탐사 기간 중 다들 조심하여 시비가 붙어 싸우는 일은 크게 억제됐다.
단, 어디까지나 비고 바깥에서 일어나는 경우였다.
삼안신투의 비고의 경우는 달랐다.
그 안은 지옥이었다.
비고에선 길을 잃어 실종되거나 함정에 걸려 시체도 건질 수 없는 경우가 빈번히 벌어졌다.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비고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살해해도 함정 속에 시체를 내던지면 증거가 사라지는 것이니 후환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보물이 있는데 그걸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빼앗기 위해 죽이는 경우도 흔했다.
무림맹과 사도천도 비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탐사도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비고 안은 위험천만했으나, 보물을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팔자를 고치고도 남는다.
목숨을 걸어도 부족하지 않았다.
“암천회만 실컷 득 보겠군.”
강호에 기관지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암천회에 의해서다.
제갈승계 만큼은 아니지만, 기관에 대해서는 암천회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승계가 없으니 무림맹도 얻는 건 없을 거야.”
전생에서는 그래도 제갈승계가 탐사에 참여한 덕에 정파가 상당한 보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사파는 기관지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보물을 확보하기는커녕 손실만 얻었다.
이 일을 기점으로 후에 기관지술을 연구하게 됐다.
“그래도 중도만공이나 유령신공, 소환단을 암천회에게 넘기는 것보다는 낫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특히 중도만공의 경우, 안 그래도 괴물인 암천회주를 무신의 영역으로 올렸다.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삼안신투의 비고.
흉마의 무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있을 미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정보다 이 년 정도 앞서서 일어났고, 거기에 원래 정파가 얻어야할 보물도 확 줄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이 비고의 보물은 정파의 사치로 쓰이지 않는다.
얼마 뒤에 흉마의 무덤으로 칠검전쟁이 일어나서 군량을 확보하는 등의 군비로 사용된다.
이제 그게 사라졌으니, 크고 작은 전쟁에도 영향이 간다.
정말로 앞을 볼 수 없는 세계가 됐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걸 흔히들 등가교환이라 부른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일 년이 지났다.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이 됐다.
비고 탐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자세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대강 반절 정도는 된 듯했다.
“승계가 없으니 늦춰질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일 년을 넘어갈 줄은몰랐어. 예상외야.”
원래의 역사에선 탐사를 완료하는데 걸린 시간이 일 년.
그런데 아직까지도 반이란다.
새삼 제갈승계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은인, 오랜만입니다.”
반가운 사람이 방문했다.
“오, 질풍검(疾風劍).”
“부끄럽습니다.”
질풍검, 왕일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절정 고수의 반열에 들었으니, 부끄러워할 것 없소. 얼마든지 자랑하시오.”
주서천이 팔짱을 끼곤 옅게 웃었다.
“이게 다 은인 덕분입니다.”
왕일이 극진한 태도를 보였다.
눈에선 끝이 보이지 않는 존경심이 드러났다.
일 년 전, 귀주를 떠나기 전에 비고에서 얻은 무공 비급을 이의채에게 맡겼다.
단쾌검법과 질풍보였다.
단순히 맡긴 것만은 아니다.
자신과 비고 탐사를 함께했던 무사들 중 믿을 만한 자에게 선물하라 했다.
이후, 이의채는 그 말대로 무사들에게 비급을 전달했다.
주서천을 따라갔던 십 인 전부였다.
무분별한 행동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일정한 시간을 두고 지켜봐서 내린 결정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붙여 줬던 무사들은 탐사 사전에 선별해 두었던 이들이다.
실력은 좀 부족할지 몰라도, 믿음은 충분했다.
인성도 나쁘지 않고, 사정도 있어서 배신할 수 없었다.
이의채는 결코 어수룩한 상인이 아니다.
주도면밀한 성격에 이득과 손실 관계에선 더더욱 그렇다.
돌다리를 두들기고 걷는 건 물론이고 그 전에 구조물을 몇 차례 살펴볼 정도로 용의주도했다.
어쨌거나, 왕일을 비롯해 십 인의 무사들은 비급을 전수받게 됐다.
그들의 반응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섬서가 있는 방향으로 큰절을 했다.
단쾌검법과 질풍보는 일류 무공.
대문파는 몰라도 그들에게 있어선 목숨보다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왕일조차도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재능이 있어서 일류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다른 무사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운이 좋아 봤자 일류, 그게 아니라면 평생 삼류에서 이류다.
그런 상황에서 일류 무공을 전수받아 기쁜 걸 넘어 은인으로 여기면서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여하튼, 이 일 년 동안 십 인의 무사들은 그동안 못 배운 자의 설움을 보여 주겠다는 듯이 수련에 임했다.
그중 왕일은 원래부터 있던 재능을 발휘해 벽을 넘어 절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승이…… 아니, 승계는 어떻소?”
당연하지만 정체도 밝혀졌다.
어차피 나중에 알려지게 될 일이니 상관없었다.
“말 편히 하셔도 됩니다, 은인. 자꾸 이러시면 제가 더 불편합니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일에게 있어서 주서천이 몇 살인지는 무의미했다.
살아 있는 한 모든 걸 바쳐서 따라야 할 인물이었다.
비급을 전수받은 날 충성을 맹세했다.
“그래.”
다행히도 주서천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일흔일곱 살까지 살았던 기억 덕에 거리낌 하나 없었다.
이에 왕일이 기뻐하면서 보고를 올렸다.
“도련님은 여전히 제갈세가에서 공부 중입니다.”
금의상단은 정기적으로 선물 한 꾸러미를 들고 화산파를 방문했다.
웬만하면 상단주 본인이 오거나, 여유가 없을 경우 입이 무거운 측근들을 보냈다.
누가 보면 남들처럼 화산파에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 보려는 상단의 노력 같아 보이지만 아니었다.
당분간 외부로도 나갈 수 없고, 정보의 수집에도 제한이 있는 주서천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별 의심 없이 외부의 정보를 꾸준하게 얻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탐사가 진행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승계를 내놓아야 하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제갈세가가 제갈승계의 도움을 생각 안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 막 열한 살이 된 아이, 그것도 불과 일 년 전에 죽을 뻔했는데 무법 지대인 비고로 넣는 건 세간의 눈치가 보여서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무림 명가인 오대세가가 열한 살 아이에게 모든 걸 맡기고 기댄다는 것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상단주가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오지 않은 걸 보니 꽤나 바쁜 모양이군. 무슨 일이라도 있나?”
“희소식 뿐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옹안에서 막 자리를 잡은 금의상단은 이제 없다.
그 대신 귀주를 주름잡는 중규모의 상단이 있었다.
금의상단은 본래 상단주의 솜씨 덕분에 삼안신투의 금은보화를 얻기 전에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군량의 보급이 중점이었고 부수적으로 무기 사업도 시작해서 재산을 불려 갔다.
이후, 비고의 재화로 단숨에 규모를 확장.
동시에 인재들을 데려오면서 사업도 확장했다.
이제는 귀주뿐만 아니라 다른 곳으로도 느리지만 확실하게 영역을 늘려 가고 있었다.
“돈이 많다고 소문이 나면 파리가 꼬이는 법인데…… 무슨 문제는 없었나?”
“주로 하류 잡배들이 뭣 모르고 덤벼들었던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경쟁 상단.”
주서천이 선수 쳤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뻔하지.”
경쟁자의 성장은 누구든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상인은 특히 밥그릇을 뺏기기 싫어한다.
노점상이라면 모를까, 그럭저럭 규모가 있는 상단의 경우 거래를 놓치게 되면 손실이 결코 작지 않다.
그 돈을 위해서 영업 방해는 물론이고 암살자를 보내는 일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비고의 일로 고수들은 움직일 수 없으니, 당분간 위험이 될 만한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상단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동시, 이후 탐사가 끝낼 때를 대비해 전력(戰力)을 보강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왕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았거늘, 무력뿐만 아니라 지력도 두루 겸비하셨구나. 다시 봐도 대단한 분이시다.’
* * *
주서천은 수련의 나날을 보냈다.
어차피 나갈 일도 없으니 무공에 집중했다.
수련해야 할 게 많아서 지루하기는커녕 어지러울 정도로 바빴다.
주로 자하신공이나 일월신궁 탓이었다.
“음.”
자하신공은 열세 살의 해를 막 넘기기 전에 사성에서 오성에 올랐다.
자하검결은 아직도 일초식이다.
난해함도 난해함이지만, 무공의 연공 속도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비록 보름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짧긴 했으나, 그래도 생전에는 화경에 올랐던 적이 있는 자신인데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지진부진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자하신공은 일월신궁에 비해서는 형편이 나았다.
일월신궁은 화산파를 원류로 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검이나 권도 아닌 활이었다.
“어차피 자주 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배워 두는 편이 좋겠지.”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조급함이나 답답함 없이 구결만 외우면서 느긋하게 익혀 갔다.
일월신궁을 알고 있고, 중도만공 덕에 익혀 둘 수 있으니 겸사겸사 배우는 것뿐이었다.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내서 욕심부리지 않고 정해진 만큼 수련했다.
다만 화산파의 제자가 궁술을 수련하면 이상하게 볼 것이 뻔해서 안보이는 곳에서 수련했다.
“사제!”
일월신궁을 막 끝내고 연화각에 올라오자마자 사형제들이 자신을 찾았다.
장홍과 장서은이었다
“사형, 사저.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시간 있으면 비무나 하자고 하려 했지.”
장서은이 혀를 살짝 내밀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래. 앞으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잖냐.”
장홍이 손이 근질거리는 듯 검집을 쓰다듬었다.
“아아, 그렇군요. 이제 곧 출각(出閣)이셨죠.”
장홍과 장서은의 연령은 올해로 열네 살.
내년이면 성년이 되니, 더이상 연화각에 있을 수 없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차라리 저 같은 것보다 연화각의 다른 사형분들에게……”
툭 까놓고 말해서 귀찮았다.
‘부탁이니 거절을 받아주면 좋겠다.’
주서천이 희망을 가졌다.
“겸손은 좋지만,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은 법이야. 우리가 네 실력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장서은이 소매로 입을 가리곤 호호 웃었다.
‘찰거머리!’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다.
화산으로 돌아온 이후론 종종 사형제들과 어울렸다.
물론 그래 봤자 낙소월, 장홍, 장서은 정도였다.
가끔 이렇게 비무를 한다거나, 검진을 수련하기도 했다.
주서천 입장에선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사부님이 절 부른 것 같습니다.”
“방금 전에 너희 사부님께 다녀온 길이야. 괜찮데.”
“쉬펄……”
주서천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러고 보니 주 사제, 그 쉬펄이라는 건 무슨 말이야?”
“좋다, 기쁘다라는 뜻의 방언(方言)입니다.”
몇십 년 뒤, 미래에 쓰게 될 욕이라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주서천도 정확한 뜻은 모른다.
전장을 몇 번 구르다가 주변의 무사들에게 주워들은 욕이었다.
“그래? 이상하게 입에 잘 달라붙네. 나도 사제와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쉬펄 같아.”
장홍이 씩 웃었다.
“그만하십시오.”
주서천이 정색했다.
“왜 그래, 사제?”
“사제는 쉬펄스럽지 않아?”
장홍과 장서은이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비무, 합시다.”
이 날 조금은 전력을 냈다.
* * *
중경, 암장. 비고 입구.
거석(巨石) 밑,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나오는 공동.
갖가지 함정이 도사리는 비고로 통하는 입구였다.
끄아아아!
통로에서부터 비명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놀라기는커녕 무덤덤했다.
여기에서는 일상이니까.
“삼안신투, 그놈은 변태가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이 많은 기관을 설치했을 리 없어.”
“평생 동안 모아 둔 보물인데 그걸 그냥 넘겨주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난 이해하네.”
“닥쳐.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린다고.”
몇몇 무인들이 모여서 투덜거렸다.
“살았다!”
웅성웅성
환희 가득한 외침에 이목이 단숨에 집중됐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시선을 돌렸다.
생환자!
“손에 들린 것들을 봐 잔뜩 챙겼군.”
지옥으로 이어진 통로에서 십수 명이 나왔다.
하나같이 피투성이에 입은 옷은 넝마 조각처럼 엉망이었다.
그 외에도 잔뜩 고생한 티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눈을 빛냈다.
눈동자가 탐욕으로 음험하게 빛났다.
“관둬. 저것들에게 달려가는 놈들을 봐라. 딱 봐도 구파일방 아니면 오대세가잖아.”
비고에서 보물을 들고 무사히 생환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본 문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기관이나 함정이 워낙 험난하여 욕심은 나지만 목숨이 아까워 도전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생환자들을 확인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보물을 홈치거나 강탈했다.
“전에는 사도천, 이번에는 무림맹인가.”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해.”
중소 문파나 무소속의 무인이 보물을 손에 넣는 경우는 극소수였다.
심지어 이 경우도 삼안신투의 비고에 대한 소문이 막 퍼졌을 때이고, 사람들이 몰려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에는 거의 전무했다.
대부분의 보물은 무림맹 아니면 사도천이 손에 넣었다.
규모와 힘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보물을 들고 생환한 게 얼마 만이지?”
“두달 조금 안된것 같은데……”
“어쩌면 저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어.”
탐사가 시작되고 일 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초기에는 보물이 쉽게 발견됐지만, 이제는 아니다.
일주일, 이 주일로 시작해 점점 간격이 벌어졌다.
보물이 이제는 보기 힘들었다.
“솔직히 탐사가 이렇게까지 오래걸릴 줄은 몰랐네.”
“허허,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
무림맹과 사도천이 평화 협정까지 맺었다.
정파와 사파뿐만 아니라 온갖 사람들이 모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는데도 일 년을 넘기다니.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부럽다, 부러워. 나도 그 돈만 있으면 ……”
“적어도 비고에 다녀오고 그 소리를 하게나. 대체 몇 번째인가?”
“나 같은 하수에게는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이나 빨면서 구경할 수밖에.”
비고의 탐사도 끝을 보였다.
“무림맹과 사도천, 보물을 보다 많이 확보한 쪽은 어디인가?”
돈은 곧 힘이다.
지닌 돈이 크면 클수록, 전쟁의 판도도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무인들은 금력(金力)을 멸시하고 혐오하나,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군자금을 보다 많이 확보한 측이 유리했다.
“부디 어디 한쪽이 우세하지 않았으면……”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게 아닌가.”
평화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전쟁을 원하는 자도 있었다.
“아니, 무인이 전쟁을 겁내면 어쩌자는 거요? 순 겁쟁이들뿐이군. 당연히 무림맹이 우세해야 하오.”
“그래. 하루라도 빨리 그 비겁하기 짝이 없는 사파를 처리해야 함세.”
그리고 반년 뒤.
탐사 시작 이 년째가 되는 날, 무림맹과 사도천은 회의 끝에 각자의세력권으로 철수하게 된다.
누군가가 예상한 대로 반년 전, 두 달 만에 발견됐던 보물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세력이 철수한 뒤로도 미련이 남은 자들이 혹시 몰라 샅샅이 뒤져봤으나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