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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二章화산귀행(華山歸行) (49/254)

第十二章화산귀행(華山歸行)

“설마하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불쾌한 웃음소리의 주인이 물었다.

팔이 유난히도 길었다.

“오엽……”

유정목이 중얼거렸다.

장완저(長腕祖)!

을지호가 그 이름에 곧바로 반응했다.

“장완저나 되는 무인이 어째서 이곳에!”

을지호는 약간의 여유까지 전부 버리고 자세를 바꿨다.

그동안 없었던 긴장감이 묻어났다.

장완저, 오엽!

별호 자체는 별거 아니었다.

팔이 길고 원숭이를 닮은 특징을 지녀서 붙었다.

하지만 결코 우습게 보거나 비웃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원숭이를 닮은 건 그렇다 쳐도, 무인에게 팔이 길다는 것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점이었다.

팔이 길면 그만큼 손이나 무기를 펼칠 때 미치는 범위도 넓다.

무인에게 있어서는 축복이었다.

“사도천의 초절정 고수가 어째서……”

을지호가 검 끝으로 오엽을 겨눴다.

‘초절정 고수?’

주서천이 눈썹을 구부렸다.

‘누구지?’

주서천도 전부를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주변인들이거나 혹은 유명인들 정도다.

“흥, 이곳에 왜 왔냐고?”

오엽이 코웃음을 치면서 상의를 들췄다.

“비만 오면, 아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네놈에게 당한 상처가 욱씬거리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느냐?”

상의를 들추자 잘 단련된 복근에 사선으로 길게 새겨진 검상(劍傷)이 보였다.

“복수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인데 그걸 미쳤다고 스스로 걷어차겠나? 카악, 퀘!”

오엽이 바닥에 침을 뱉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사부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서천이 물었다.

“얼마 전 강호에 나와 있을 때의 일이다.

무림맹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그와 만나 싸운 적이 있단다.

다만 그때 내 어리석게도 마무리를 어설프게 했구나.”

유정목이 후회 가득한 눈초리로 오엽과 마주 봤다.

“마무리를 어설프게 해? 헛소리!”

오엽이 발끈했다.

“그때는 내가 그 머저리 같은 웃음에 속아 잠시 방심했을 뿐이다!”

‘또 예상하지 못한 일인가. ’

유정목이 원래라면 나가지 않았을 강호에 출도하게 되면서 오엽과 은원 관계를 만들게 됐다.

그것도 나름 사도천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가 있는 초절정 고수다.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면 그래도 미래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 듯했다.

“그 재수 없는 낯짝을 뭉개 주마!”

오엽이 유정목에게 달려들었다.

“사형!”

을지호가 끼어들어 막으려 했다.

“유정목 외에는 관심 없다!”

파바밧!

오엽이 데리고 온 사도천의 무사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몸놀림을 보니 적어도 삼류는 아니었다.

숫자는 이십이고 이류에서 일류 정도였다.

절정 고수는 없는 것 같았으나 역시 숫자가 제법 많았다.

“죽어랏!”

화산파의 제자들과 사도천의 무사들이 격돌했다.

격돌 후 일각 정도가 지났다.

주서천을 포함해 여섯 명이었던 화산파의 제자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십 명이 세 명씩 짝지어서 밀어붙여 왔다.

모이려고 해도 사도천의 무사들이 그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폭풍처럼 쏟아냈다.

“사도천, 이 비겁한 놈들!”

을지호가 짜증을 냈다.

제일 고수인 그에게는 두 명이 더 붙어 다섯 명이었다.

“서천이는 어디에 있느냐!”

화산파에서 자신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주서천의 무사 귀환이었다.

그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전 여기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풀 너머에서 주서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버티고 있어라! 내 금방가마!”

“괜찮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전 안전합니다!”

주서천은 수풀 너머로 외쳤다.

산책이라도 나온 돗 여유 가득한 표정이었다.

“미친놈!”

한편, 그를 쫓은 사도천의 무사들은 황당해했다.

“수적 몇 놈 베었다고 의기양양한 것 같은데, 정말로 어이가 없구나!”

중앙의 무사가 주서천을 조롱했다.

“네가 연화각원이라 할지라도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꼬마이지 않느냐. 흐흐, 그 잘난 콧대부터 잘라주마.”

오른쪽의 무사가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았다.

“이렇게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무공은 몰라도 머리는 모자란 놈이로군!”

왼쪽의 무사가 비웃었다.

“과연, 진법(陳法)을 저지하려고 병력을 분산하고 초장부터 정신없이 몰아쳐서 흩어지게 만든 건가.”

주서천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전법이 나쁘지는 않은데, 상대가 영 안 좋았다.”

“슬슬 듣기 힘들어지는군!”

무사들이 입가에 맺힌 조소도 지웠다.

그 대신 살기가 질척하게 흘러나왔다.

“사부님이 신경 쓰이니 적당히 놀아 줄 수는 없다.”

주서천의 몸이 흐릿해졌다가 가운데 있는 무사 앞에 나타났다.

허억!

무사가 순간 숨을 멈추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는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놀란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생애에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검법을 펼칠 정도의 수준도 아니었다.

최대한으로 공력을 실어서 검을 힘껏 내질렀다.

“컥!”

어떻게 반응을 할 수도 없을 만큼 빨랐다.

무사는 가슴에 박힌 검을 내려다보면서 피를 토해 냈다.

“이 자식!”

좌우의 무사들도 놀랐지만, 멍하니 보지는 않았다.

무언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끼고 공격에 나섰다.

“죽어랏!”

좌측에 있던 무사의 칼이 사나운 기세로 들어왔다.

목을 벨 기세가 아니라, 아주 쥐어뜯을 정도로 거칠었다.

“한 번 죽었는데 두 번 죽기는 싫다!”

무릎을 굽히면서 상체를 숙여 회피했다.

번개 같은 반사 신경과 움직임이었다.

“말도 안 돼!”

무사가 경악했다

“돼!”

힘의 원천인 내공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근육이 울긋불긋 팽창하면서 괴물과 같은 완력을 줬다.

주서천은 검을 무사의 가슴을 꿰뚫은 채로 있는 상태에서 좌측으로 힘껏 휘둘렀다.

근육과 지방, 갈비뼈가 막고 있었지만 무의미했다.

마치 두부를 가르는 모양새였다.

장애물이 사라지고 나타난 건 좌측에 있던 무사였다.

“이런 미……”

무사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욕했다.

“친!”

주서천이 대신 욕을 이어 주면서 검에 힘을 가했다.

“크아악!”

무사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뭐, 뭔!”

눈앞에서 동료가 순식간에 죽었다.

“뭐가 이렇게 강해! 사기잖아!”

혼자 남은 사도천의 무사가 입을 떡 벌렸다.

“원래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강해지는 법이지!”

주서천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아, 그런데 범재(凡才)면 영약 좀 먹어야 한다.”

내공이란 건 곧 힘의 원천이다.

기초적인 신체 능력뿐만 아니라 이런 폭발적인 힘도 발휘할 수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제가 몰라봤습니다!”

정파는 자존심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사파는 아니었다.

아예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버린다.

“그래!”

주서천이 문답무용의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케헥!”

무사가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사부님, 제가 금방 가겠습니다!”

화산파의 사형제들도 걱정됐다.

하지만 유정목에 비해선 조족지혈이었다.

장완저 오엽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초절정 고수다.

승부를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스승의 무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자 입장에서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을지호 쪽이 위험했다면 조금 더 고민하고 우선순위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 * *

유정목과 오엽은 벌써 백 합의 공수를 교환했다.

“끈질긴 놈!”

오엽이 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기야, 내 배에 칼침 놓은 놈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이 날을 꿈꾸면서 몇 날 며칠을 지새웠다.

눈을 감으면 유정목의 얼굴이 떠오르고, 아침에 일어나거나 비만 보면 칼침 맞은 부위가 쑤셨다.

“장완저, 이렇게 홀륭한 무공을 지녔는데 어째서 사리사욕에만 쓰는가!”

유정목이 탄식했다.

“허, 또 시작했네.”

오엽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놈의 의협심(義俠心), 내 살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알고 있나? 그딴 거에는 쥐뿔도 관심 없다!”

채채챙!

정파와 사파의 검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불꽃이 튀기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난 그냥 네놈에게 당한 걸 되갚아주려고 온 것뿐이다! 쳐 죽여 주마!”

오엽의 목소리는 원한으로 들끓었다.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그의 특유의 긴 팔 덕에 범위에 들어왔다.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부득부득 갈린다!”

절강(浙江)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평소처럼 사도천을 등에 업은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사도천의 세력권이라 걱정할 건 없었다.

그가 저지른 패악질은 바로 인근의 안휘에도 알려졌다.

무림맹 본부도 소문을 듣고 고수를 파견했다.

그중이 유정목이 있었다.

당시 소유검이라는 별호를 들었을 때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정목이 워낙 강호에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결과는 달랐다.

화산의 검수를 무시했던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결국 치명상을 입고 도주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굴욕!

“죽어라!”

오엽이 분노를 담아서 검격을 날렸다.

“흡!”

유정목은 날아온 검격을 쳐 냈다.

오엽의 검에 담긴 원한과 증오, 그리고 살기까지 온몸으로 전해졌다.

“네 배에도 칼침을 놔 주마!”

오엽이 복수에 눈이 멀었다.

공격을 끊임없이 쏟아 내면서 유정목을 몰아붙였다.

누가 보면 유정목이 속수무책으로 밀린다고 보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성을 완전히 잃었구나!’

원한이 깊은 나머지 이성이 감정에 먹혔다.

공격에만 미쳐서 수비는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 뻔한 공격만 해 댔다.

주로 가슴과 배만 노렸다.

혹시나 일부러 틈을 보이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틈을 보고도 지나쳤다.

공수를 백여 번 넘게 교환하고 나서야 오엽이 진심을 보이는 걸 깨달았다.

“추어(猶魚 :미꾸라지) 같은 놈!”

제대로 된 공격 하나 맞추지 못하자 화가 났다.

“허, 자기 자신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전에 싸웠을 때는 이 정도로 허점이 많지는 않았다.

아니, 허점 자체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힘들게 싸웠던 기억이 남는 상대다.

결국 끝내 자신도 지쳐 놓쳐 버리고 추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전과 비교해서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어디까지나 초절정이라는 이름의 신체 능력만 보일 뿐, 그 외에는 고수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했다.

“그 원한, 여기에서 끝내겠네!”

함정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자마자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유정목은 마무리를 위해서 내공의 팔 할 이상을 끌어 올렸다.

“하압!”

기합을 터뜨리면서 몸을 날렸다.

오엽과 최대한 거리를 좁혔다.

서로 검의 범위가 차이가 나니 붙는 게 나았다.

“흐.”

오엽이 입꼬리를 말아 비틀어 올렸다.

“이래서 정파란 것들은!

오엽이 근접해 오는 유정목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했다.

오른손에 쥔 검에 힘을 줬다.

‘무언가 이상하다!’

유정목이 심상치 않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러나 목숨을 끊으려는 절초는 이미 전개됐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의 빠르기다.

숨이 턱 막히는 공력도 느껴졌다.

그러나 오엽의 입가에 맺힌 불길한 웃음은 지워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채앵!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파와 사파의 검기가 부딪치면서 파장을 만들어내 주변을 슥 훑었다.

“퉤!”

오엽이 피가 섞인 침을 내뱉었다.

“으음!”

유정목이 침음을 흘렸다.

얼굴빛이 거무튀튀했다.

“독을…… 쓴 겐가!”

시선을 아래로 돌리니 잘 보이지도 않는 침(針)이 옷을 꿰뚫고 옆구리에 박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학령초(鶴靈草)에서 독을 추출해 발라 두었다. 독성이 지독하기로 소문난 독초 중 하나지. 크흐흐.”

오엽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크으……”

유정목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옆구리에서 시작된 독성이 벌써부터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나와 싸우느라 내공을 제법 소모했겠지. 해독은 불가능할 게다.”

오엽이 비릿하게 웃었다.

“네 입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눈앞이 희뿌옇게 일그러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

“응?”

오엽이 머리를 들었다.

유정목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서 …… 천아……”

유정목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크큭, 제자 놈인가!”

오엽이 잘됐다는 얼굴로 주서천을 환영했다.

“제자가 보는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제자 놈을 눈 앞에서 죽이는 편이 좀 더……”

“네가!”

주서천이 매처럼 날아올랐다.

“누구를 건드린 건지 아느냐!”

그러곤 벌처럼 쏘아졌다.

검 대신에 발 끝에 힘이 집중됐다.

“성깔 좀 있구나!”

오엽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소매에 암기를 숨겼던 왼손을 들어서 날아오는 발을 잡으려 했다.

우지끈!

“어?”

원래라면 발을 낚아챈 다음 거꾸로 들려 했다.

한데 실패했다.

눈을 껌뻑 뜨니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손가락이 전부 기형적으로 부러졌는데 특히 중지와 약지 사이가 뜯겨져서 살이 덜렁거렸다.

그 충격의 여파는 손목까지 전해졌다.

손목뼈 역시 엿가락처럼 구부러졌다.

“도대체……?”

오엽은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손을 멍하니 쳐다봤다.

내공을 적게 쓴 건 아니었다.

열두 살 아이의 발차기 정도는 막아야 했지만 막기는커녕 손이 전부 뜯겨졌다.

이 상황이 너무 이질적이라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후웁!”

주서천이 멍하니 서 있는 오엽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법은 아니었다.

그저 좌에서 우로 수평을 그은 것에 불과했지만 실린 공력이 특별했다.

공기조차 놀라 가볍게 진동했다.

오엽도 그제야 그걸 느끼고 얼른 막으려 했다.

“늦었어.”

주서천이 싸늘하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서걱!

오엽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공중에 떠올라 한 바퀴 회전하는 그 얼굴은 경악과 불신이었다.

초절정 고수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사부님!”

주서천이 유정목을 다급하게 부르며 달려갔다.

“으으……”

유정목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안 좋다.’

주서천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딱 봐도 보통 독은 아니었다.

당황하고 있는 순간 자체가 아깝다.

“실례하겠습니다, 사부님.”

의식을 잃은 유정목에게 사과하면서 품 안을 뒤졌다.

얼마 전에 보여줬던 목함이 잡혔다.

‘있다!’

소림사의 소환단이었다.

‘학령초가 어떤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소환단이라면 해독할 수 있을 거야.’

보통 중독될 시에는 그에 맞는 해독제를 복용해야 하지만, 때로는 영약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그 대신 영약의 기운이 날아가겠지만, 사부님의 목숨을 생각하면 반대로 싼 편이지.’

소환단 한 알을 꺼내 스승의 입 안에 넣고, 삼킬 수 있도록 죽통(竹簡)에 넣어 둔 물을 흘렸다.

“사부님, 제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린다면 운기 하셔야 합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은 유정목을 눕히고 그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는 게 좋았지만 불가능했다.

‘한 눈 팔지마!’

집중, 또 집중!

스승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자칫 잘못해서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주서천은 주변에서 얻는 불필요한 정보를 차단했다.

호법이 없어 불안했지만, 그 감정도 잠재웠다.

지금은 모든 걸 집중해야 할 때!

유정목이 운기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왔다.

‘틀렸어. 완전히 의식을 잃으셨다’

내공을 주입해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내가 모든 걸 해야 한다.’

다행인 점은 유정목이 스승이라는 점이다.

자하신공을 제외하면 동일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었다.

매화육합심법을 생전을 포함해 두 번이나 대성했다.

내기의 조정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다.

‘사부님께서 의식을 찾지 않기를 빌자.’

무심코 중얼거릴 뻔했지만 유정목이 들을까 봐 속으로만 삼켰다.

소환단을 복용한 적도 있으니 영약의 기운 자체를 움직여서 해독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만약 도중에 유정목이 정신을 차리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기에 놀라 반응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마음 같아선 깨워서 좀 더 안전하게 해독하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이 부족해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제발!’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시간이 없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가슴에 닿았던 손이 배꼽 아래로 옮겨졌다.

하단전의 위치였다.

내기가 손가락 끝에서부터 유정목의 몸 이곳저곳으로 가지처럼 뻗어져나가며 뿌리를 내렸다.

성질이 일치하니 거부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유정목의 몸을 채우고 있는 건 네 가지 기운이었다.

하나는 본인의 기요, 둘은 주서천의 것이었다.

셋은 독기였고, 마지막은 영약의 기운이었다.

중요한 건 세 번째와 네 번째.

주서천은 본인의 기를 움직여서 영약의 기운을 휘어잡아 통제했다.

‘독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 벌써 칠 할이나 퍼졌다.’

주서천은 거의 유정목이 중독되자마자 나타나서 오엽을 죽였다.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는데도 벌써 이렇게 중독됐다니, 참으로 지독한 독이었다.

‘사부님!’

꿈틀!

유정목이 움직인 게 아니다.

그 내부에 안착한 영약의 기운이었다.

본래 몸의 주인이 통제해야 할 영기(蓋氣)가 주서천에 의해서 움직이며 단전을 중심으로 넓게 퍼졌다.

‘놓치지 않겠다!’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맹수가 사냥에 나선 모양새였다.

다만 숨죽여 있다가 급습하는 건 아니었다.

독기는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전력으로 쫓아야 했다.

소환단으로 둥글게 뭉쳐 있던 영기는 나무의 줄기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몸 이곳저곳에 파고들었다.

‘심장!’

우선적으로 잡아야 할 곳은 역시나 심장부터였다.

심장은 몸의 중심이다.

심장이 약해지면 신체 구조 전체에도 문제가 생긴다.

대신 중요한 만큼 면역이나 방어도 뛰어났다.

실제로 독기가 심장 부근부터는 느릿느릿했다.

주서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영기를 이용해서 독기를 먹어 치우고 불살랐다.

영기도 그만큼 줄었다.

‘됐다!’

속으로 신나하며 위로 올라갔다.

그다음 목표는 척수선경을 위협하려는 독기였다.

다행히 머리까지 치솟지는 않았다.

독기가 뇌를 침범하면 해독해도 후유증이 심각해 꼭 막아야 했다.

‘천천히……’

목 중간 즈음부터는 기경팔맥(奇經八脈) 중 독맥(督脈)인 아문혈(亞門穴)이 있다.

아문혈에는 뇌신경이 밀포되어 있어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사지가 마비된다.

그 외에 주위는 사혈(死穴) 천지였다.

이 순간만큼은 주서천도 조급해 하지 않고, 신중 또 신중하게 독기를 밑으로 끌어냈다.

무슨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아까처럼 영기로 태우지 않았다.

‘됐다.’

유정목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어려운 건 끝냈다.’

이제 좀 안도할 수 있었다.

마음을 눈곱만큼 편하게 먹으면서 독기들을 몰아냈다.

‘한꺼번에 없애버릴 수는 없어.’

독기가 결코 적지 않았다.

이 정도 양을 처리한다면 자극을 피할 수 없다.

반드시 의식을 찾는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으니 고민도 길지 않았다.

결심을 하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흩어져 있던 독기들을 한곳으로 밀어낸다.

사전에 기맥에 상처가 남지 않도록 영기로 보호해 두었다.

학령초에서 추출되었던 독기는 소환단의 정순한 기에 밀려 도망치듯이 이동했다.

그 목적지는 또 다른 몸인 주서천이었다.

‘들어온다!’

손바닥을 통해서 상당량의 독기가 들어왔다.

그의 낯빛이 조금 안 좋아졌다.

‘됐어!’

스승의 몸을 갑아먹던 독은 이제 없다.

태워서 없어진 것을 제외하곤 전부 흡수했다.

혹시라도 독기가 흘러나오면 어쩌나 싶어 스승의 곁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으음!”

유정목이 드디어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도 낯빛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후, 이제 이걸 처리해야겠다.’

주서천은 조금 무리해서 거리가 꽤 있는 수풀 속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으응?’

독기를 재차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주서천은 문득 의문을 가졌다.

‘내가 내기 통제 능력이 이렇게 뛰어났던가?’

급한 상황에서 벗어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그에 따라 잡념도 생겼다.

방금 전까진 스승이 자칫 잘못하면 불구가 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일념에 빠져 있었다.

집중이 끝나자 그제야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너무 빠르잖아.’

기를 조종하는 것 자체는 문제없다.

유정목이 지닌 기는 자신과 다를 것 없으니 이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서천은 생전에 화경에 올랐던 경험이 있으니 못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한데 그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예상한 것에 비해 너무 쉽게 끝났다.

아까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해냈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걸 별다른 실수가 없이 집중해서 후딱 끝냈다.

주서천 스스로도 놀랐다.

‘무엇이 다르지?’

회귀 이전의 자신과 비교해 봤다.

수령신과, 소환단을 복용했지만 내공만 증가할 뿐 별다를 건 없다.

그 외를 꼽자면 자하신공이 있지만 이것도 아니다.

자하신공에 통제 능력이 높아지는 효능은 없었다.

‘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중도만공!’ 

무공을 종류에 상관없이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깊게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중도만공으로 무공을 배우면 주력 무공이 아닌 이상 위력이 반이나 감소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공 방식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각 무공에 따라 구결을 외우면서 정해진 경로로 운기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자고로 운기란 건 무공마다 다르다.

수십, 아니 수백 이상으로 나뉜다.

그러나 운기는 자신이 연공하는 무공의 원류를 따르기에 보통 평생 동안 잘 바뀌지 않는다.

조금씩 변화는 있어도, 크게는 벗어나지 않았다.

매화기공과 자하신공을 예로 들어 보자.

자하신공은 난해한 만큼 거쳐야하는 기혈이나 기맥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공에서나 건드릴 법한 곳으로는 운기하지 않는다.

즉, 원류가 같으니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 좀 더 증가할 뿐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도만공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무공은 회귀 전에도 손을 대지 않았던 곳을 문제없이 수련할 수 있게 해준다.

화산파의 무공은 도가 무학이지만, 일월신궁은 아니다.

원류 자체가 다르니 둘의 운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배우기가 힘들다.

하나 중도만공을 연공하면 둘의 원류가 다르더라도 수련이 가능해진다.

물론 중도만공이 있어도 일월신궁 자체가 난해해 운기조식을 할 때 시간이 제법 걸린다.

무엇보다 일월신궁은 신공(神功)이 아니던가!

자하신공과 일월신궁.

둘다 난해하고 어려우며 운기도 전혀 달랐다.

결국 이 둘을 경험하고 수련할 수 있었기에 기의 통제와 조절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 틀림 없었다.

이는 모두 중도만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연, 그렇게 된 건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무공이야.’

그야말로 무공을 위해 존재하는 무공!

‘다만 회귀가 없었다면 이 특성을 제대로 살리는 건 불가능했겠지?’

이것도 화경에 올랐던 경험과 깨달음 덕이었다.

회귀 전이라면 일월신궁은커녕 아직도 매화육합심법을 배우는 데에도 벅차서 지지부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중도만공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이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먼 훗날이 분명했다.

‘아니,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무학에 집중해도 너무 집중했다.

자신이 중독됐다는 걸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음, 내장이 끊어질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군!’

독에 내성이라곤 쥐뿔만큼도 없으니 당연했다.

‘독공을 알고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이건 더 이상 독이 아니라 영약이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내성을 높이는데 써먹어야지.’

독기를 나눠서 몸 이곳저곳으로 보냈다.

일찍이 기맥은 내공으로 보호하고 있어 내상은 피했다.

주서천은 홀어진 독기를 땀샘을 통해 내보냈다.

뚝뚝

시커먼 땀방울이 몸에서 비 오듯이 흘러나왔다.

그의 주변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 왔다.

바깥으로 빼낸 독기의 영향은 대단했다.

근처에 있는 수풀이 전부 말라비틀어져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던 벌레들도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 죽고, 땅도 시커멓게 죽어 갔다.

‘이 정도면 됐어.’

독기를 전부 내보내지 않았다.

몸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소량은 남겨서 순환시켰다.

독공을 배우지 않아 내공으로 전환할 수는 없었지만 독에 대한 내성 정도는 키울 수 있었다.

본래의 내공이 넘치다 보니 가능한 방법이었다.

혈도나 기맥 등을 보호하니 내상도 없었다.

“후우……”

드디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쉴 수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쉬워.”

시간과 상황만 맞았다면 좀 더 내성을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여의치 않으니 별수 없이 독기의 순환을 중지했다.

독공을 배우지 않았으니 독기의 흡수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공으로 태워 없앴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스승과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을지 모르는 사형제들이 걱정이었다.

* * *

걱정과 달리 다행히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

금창약을 바르면 충분히 나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화산파의 승리였다.

아무리 뿔뿔이 흩어졌어도 명색이 화산파이다.

애초에 강호에 나온 것 자체가 일정한 수준의 무공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결코 하수에 속하지는 않았다.

주서천만큼 순식간에 승부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었다.

을지호는 승부가 나자마자 주서천을 찾았다.

다행히 주서천이 돌아왔을 때와 시간이 맞았다.

“사형!”

을지호가 파리한 낯빛으로 나무에 기대고 있는 유정목을 살폈다.

얼굴에 떠오른 건 걱정이었다.

“괜찮다. 난 무사하다.”

유정목이 지쳤는지 조금 쉰 목소리로 답했다.

이에 을지호는 휴우! 하고 안도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제일 눈에 띈 건 단연 오엽의 시체였다.

“허어, 역시 사형이십니다.”

을지호가 목의 단면을 살피곤 짐짓 감탄했다.

“별거 아니다.”

유정목이 쓴웃음을 흘렸다.

“아닙니다. 아무리 하찮고, 비겁한 사도천 소속이라 할지라도 초절정 고수이지 않습니까?”

을지호가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러워 했다.

“고맙구나. 그보다도 다들 크게 다친 곳은 없고?”

“예, 멀쩡합니다.”

“장완저가 죽은 것보다는 너희가 다치지 않은 것이 중요하지.

보아하니 경상을 입은 것 같으니 한시라도 빨리 하산하여 의원을 찾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을지호는 유정목의 세심한 마음씨에 감격했다.

“예!”

일행은 운현으로 되돌아왔다.

화산파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안내했던 여성과 아들도 포함됐다.

“대인! 저,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운현에 도착하자 여성이 몸을 살짝 떨면서 깊이 사죄했다.

그 눈동자에 감도는 건 공포였다.

을지호는 마음 같아선 왜 거짓을 고했냐고 윽박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함정이라는 건 일찍이 눈치챘었긴 하지만 진실을 고하지 않은 것이 괘씸했다.

“괜찮습니다.”

유정목이 이해해달라고 잘 타이르지 않았다면 화를 내고도 남았다.

“감사합니다, 대협! 대협 같은 사람이 되겠어요!”

아이가 눈을 반짝이면서 감사인사를 했다.

그 눈에는 영웅을 향한 동경심이 있었다.

“그래, 잘 지내거라.”

유정목이 부드럽게 미소 지어 줬다.

그렇게 두 모자를 떠나보냈다.

“사제는 전서구를 날려 본산과 무림맹에 이 일을 보고하여라.

나머지는 의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거라.”

“예!”

유정목과 주서천만 남았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주서천이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제자의 공을 가로챈 스승에게 뭔 감사더냐.”

유정목이 시원치 않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을 가로채다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에 오엽은 사부님과의 싸움으로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지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못 말리는 제자구나.”

유정목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명예욕을 부리고 오만방자한 것보다는 나았다.

“감사합니다.”

주서천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나저나……”

유정목이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소환단을 복용했으니 어이해야 할 꼬?”

자신은 분명 독침에 당해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 독은커녕 내공량이 늘어났다.

무슨 일인가 하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는 머리를 잃고 쓰러진 오엽과 안도하는 제자였다.

이후 주서천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다.

그제야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비밀로 해 달라고 스승에게 부탁했다.

암천회에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암천회에 대해 설명한 건 아니었다.

왜, 강호에는 삼 할을 숨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주서천은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안 그래도 노수창병 때의 일로 이목을 모은 게 부담됐다고 말했다.

제자의 공을 빼앗는 것 같아서 싫었지만 간곡한 요청에 할 수 없이 함구해 주기로 했다.

“끙.”

자신에게 소환단을 먹인 제자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스승을 살리려고 한 건데 어찌 뭐라 하겠는가?

유정목도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부님, 불초 제자가 말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격식 차릴 것 없단다.”

“감사합니다. 여하튼, 복용한 건 이미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소림사에게 사정을 설명한다고 해도 일이 쉬이 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외적인 위신이란 게 있다.

비록 오래되었다고 해도 훔친 물건이다.

그걸 마음대로 복용한 걸 알려 양심 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소림사의 입장에선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무림이란 게 다 그렇다.

“사부님께서 일부러 복용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처도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성인(聖人)이지 않습니까? 분명합니다.”

혀가 매끄럽게 움직였다.

기가 막힌 솜씨였다.

그래도 유정목의 불편한 마음을 조금은 녹여 없앴다.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진리와도 같다.

어떠한 불합리한 상황이라도 선악에 구분없이 이해시킨다.

어쩔 수 없으니까.

주서천은 그동안 무공이 아니라 혀를 굴리는 것을 수련했는지 현란한 말솜씨로 유정목을 변호했다.

“진실을 말했다간 화산파도, 소림사도 곤란하게 됩니다.

별수 없으니 그냥 지나가는 게 좋을 돗싶습니다, 사부님.”

“…… 알았다.”

유정목도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마음에 잔뜩 걸리는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미련을 버리고 단념했다.

“이로써 소림사에게 빚을 졌구나.

내 이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겠지만, 언젠가는 갚도록 해야겠어.”

그래도 끝까지 양심적이었다.

‘됐어!’

이걸로 완전히 넘어갔다.

속으로 환호했다.

‘사부님께서도 천하백대고수의 반열에 오르시겠군.’

소환단의 영기는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독 일부를 태워 없앴지만 나머지는 그러지 않고 밀어냈다.

그래서 전부는 아니지만 육 할에서 칠 할 정도의 양은 남아 있었다.

이걸 흡수하면 최소 십 년 정도의 양은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서 천운이 따라 준다면 다음 경지도 넘볼 수도 있었다.

영약이 괜히 영약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홀리면서도 어떻게든 차지하고 싶어 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생전에 갚지 못한 은혜를 몇 배로 되돌려 드려야지.’

천하백대고수의 반열도 부족했다.

할 수만 있다면 화경의 경지까지 올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고생하고 겨우겨우 화산에 돌아가려 하는데, 내 탓에 피곤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로 미안하다.”

“자꾸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부님. 따지고 보면 제가 행방불명된 탓이기도 하니까요.”

“정말로 보면 볼수록 장하다.”

유정목이 주서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슬슬 떠날 채비를 하거라.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겠다.”

그리운 고향, 화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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