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제자생환(弟子生還)
생환이 소문나기도 전, 화산파와 제갈세가는 제갈중호에게 앞서 연락을 받아 알고 있었다.
생존 소식이 화산파에 알려지자마자, 유정목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데리러 가겠다고 말했다.
화산파에선 그런 유정목을 막을 수 없었다.
안전이 걱정되어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가라고 제안했으나, 유정목은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거절했다.
같은 초절정 고수가 아닌 이상, 경공을 펼치면 다들 따라오지 못하니 방해가 된다.
유정목은 그렇게 밤낮을 달려 무한에 도착했다.
다행히 무한은 섬서에서 인근이다.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정말로 걱정 많이 했단다.”
유정목이 주서천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까지의 걱정을 내뱉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실종되기 전, 최대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살아 있다고 서신을 보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걸로 걱정이 다 해소될 리가 없었다.
“알면 됐다, 요 말썽꾸러기 녀석.”
유정목은 주서천을 혼내듯이 머리를 꾹꾹 눌렀다
‘많이 속상하셨구나.’
유정목은 전생과 현생을 포함하여 제자가 어떠한 잘못을 해도 화를 내거나 때리지 않았다.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혹은 유정목을 속상하게 했을 때는 이렇게 머리를 꾹꾹 누르곤 했다.
그런데 이것도 그다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조금 눌린다는 느낌만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주서천은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닥치니 무척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유정목이 화산파에서 자신을 걱정하며 마음 졸였을 걸 떠올리니 가슴 속 어딘가에서 울적했다.
“훌쩍.”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정목도, 주서천도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서 그 둘을 지켜보던 제갈승계였다.
“형님…… 끅!”
제갈승계가 소매로 눈 주변을 닦았다.
“음?”
유정목이 고개를 갸웃거 렸다.
“아니, 넌 또 왜 울어?”
주서천이 제갈승계를 보고 어이없어했다.
“나에게는 스승이 따로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사제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 것 같아! 으흐흑!”
제갈승계가 감격한 듯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역시 아이는 아이다.
죽은 줄 알았던 제자!
그리고 그 제자를 만나러 온 스승!
“저 아이는……?”
유정목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흑흑, 소개가 늦었습…… 끄흑…… 니다.
형님의 의형제가 된제갈세가의 제갈승계라 합니다. 훌쩍.”
제갈승계가 눈물을 멈추지 않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아아, 네가 그……”
유정목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아는 척을 했다.
“만나서 반갑다. 화산의 소유검 유정목이라 한단다.
너도 아직 세가 내에서 뛰어놀아야 할 나이인데, 정말 고생 많았다.”
유정목은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아 제갈승계와 눈을 마주치면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 아닙니다. 저도 무가(武家)의 자식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제갈승계가 눈물을 뚝 그쳤다.
‘역시 사부님이셔. 대단하다.’
미소에도 경지가 있다면 유정목은 천하제일이다.
비록 의도된 유혹은 아니지만, 화를 내던 사람도 저 미소를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언성을 낮추고 열기를 가라앉혔다.
방금 전에 눈물을 짜내고 있던 제갈승계도 저 미소를 보고는 금방 마음을 가라앉혔다.
“허어, 아직 어린데도 참으로 대견하구나. 내 제자가 강호에 나가 정말로 소중한 연을 만들었어.”
유정목이 제갈승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실린 감정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 훌쩍 !”
제갈승계가 코를 훌쩍였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
주서천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혈연을 중시하는 오대세가이거늘, 정작 세가 내에서 가족애라는 걸 알지 못하다니…… 기구한 삶이다.’
그동안 제갈승계와 지내면서 그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훗날 천재 남매로 칭송받게 되는 제갈상과 제갈수란의 친부이자 세가의 현 가주는 제갈운(諸葛潔)이다.
제갈운에는 동생이 둘 있었는데, 둘째가 제갈삭이고 셋째가 바로 제갈승계의 친부였다.
하나 불행하게도 친부는 그가 천자문을 막 접하기도 전에 강호의 일에 휘말리게 되어 단명했다.
어머니 역시 태생적으로 몸이 약해서 출산으로 인해 일찍이 목숨을 잃었다.
부모를 잃고, 세가에서도 외면받은 제갈승계는 그렇게 평생을 이용만 당하며 살다가 죽었다.
그게 만각이천의 삶이었다.
‘넌…… 아니,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오. 만각이천, 제갈승계.’
자신처럼 운이 좋아 기회를 얻은 사람과는 달랐다.
‘부모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가족애라는 것도 모르고, 세가에선 손가락질을 받았지. 하지만 그런데도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았소.’
기관지술이 인정받게 되는 건 머나먼 미래다.
그것도 사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정파건 사파건, 심지어 무림인이 아닌 자들도 기관지술이 별것 아니라고 천시했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일가친척이 당장 그만두라면서 멸시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주서천은 언젠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힘들지 않아?”
“힘들지.”
“그런데 왜 하는데?”
“재미있으니까!”
“그것뿐이야?”
“응!”
제갈승계의 그 환한 웃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 *
길다면 길었던 여행도 끝났다.
주서천은 유정목과 함께 화산으로 떠난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다음에 또 보자고, 형님.”
제갈승계는 세가에서 따로 사람을 보낸다고 해서 무한에 남았다.
나중을 기약하며 이별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유정목이 무한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었다.
‘왔구나.’
주서천이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예상했다면 예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에 대한 고민은 상당히 오래됐다.
진실을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
“일단 알려진 것과 비슷하긴 합니다.”
“하하. 알려진 것이라니, 역시 뭔가 더 있었구나.”
유정목은 무릎을 탁 치면서 웃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주서천이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서신에 그렇게 써 두었으니 누구나 속사정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게다. 그나저나 정말로 어떤 일이 있었느냐?”
“그게……”
주서천은 말을 꺼내기 전 다시 한번 주변을 슥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다행히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물은 말이니 괜찮단다.”
“과연 사부님이십니다.”
주서천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사정 설명을 했다.
“허, 삼안신투의 비고의 최초 발견자가 너라고?”
세상에!
유정목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뭔가 범상치 않은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
주서천은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다.’ 라는 부분을 제외하곤 적당히 둘러 말했다.
“그러니까, 장강에서 살아남은 너희는 길을 따라서 어찌어찌 가다 보니 비고에 도착하였다는 게냐?”
“예, 그렇습니다.”
“흠, 그렇다면 절벽에 떨어져 고립되었다는 건 거짓이었구나.”
“예. 비고의 발견자가 저희라는 것이 알려지면 노려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사부님.”
“아니다, 잘했다. 올바른 판단을 했구나.”
유정목이 주서천을 칭찬했다.
‘으윽.’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하지만 그래도 양심이 찔리는 건 별개였다.
“마침 의형제가 된 승계가 기관지술에 일가견이 있어 탐사하게 됐습니다.
이를 위해 인근 마을에서 사부님께 전서구를 보냈고, 구풍 사백과 함께할 당시에 만났던 상인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 얼마 전까지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로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이의채와 처음 만났던 건 구풍과 함께했을 때다.
그 덕분인지 말을 더듬는 등의 일은 없었다.
“흐음.”
유정목이 침음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사부님?”
주서천이 살짝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재욕에 눈이 멀까 봐 조금 걱정되는구나.”
그 걱정 어린 말에 속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만약 유정목이 의심하여 계속해서 추궁했다면 어쩌나 싶었다.
“과한 재욕은 파멸을 부른다는 화산파의 가르침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비고에서 얻은 건 어떻게 하였느냐?”
“몇 가지를 제외하곤 그 상인에게 부탁하여 배고픈 자들에게 베풀어달라고 했습니다.”
“장하구나. 한데, 몇 가지라 하면……?”
“말 나온 김에 꺼내도록 하지요.”
주서천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목함을 꺼냈다.
“소환단입니다.”
“뭣이……?”
유정목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화산파에 돌아가기 전에 복용하십시오. 두 개 정도는 충분히 복용할 수 있을 겁니다.”
삼안신투를 쓰러뜨리고 얻은 소환단의 숫자가 무려 열이다.
그중 네 알은 주서천과 제갈승계가 복용했다.
남은 여섯 중 넷은 이의채에게 맡겼다.
원래라면 남은 소환단 전부 유정목에게 주고 싶었으나, 자고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였다.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 할지라도 세 개나 되는 소환단의 기운을 전부 흡수하려면 제법 오래 걸린다.
그리고 단시간 내에 영약을 과다복용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도 몰라 일부러 두 개만 챙겼다.
“호법은 제가 서도록 하겠……”
“서천아.”
유정목이 무언가 결심한 듯 주서천을 불렀다.
“예, 사부님.”
“이건 나나 네 것이 아니다. 하물며 화산파의 것도 아니다.”
유정목이 엄한 눈초리로 주서천을 마주 봤다.
‘설마……’
불안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삼안신투의 비고에서 얻은 것이라면 이 소환단은 분명 소림사에서 훔친 것일 테지.
금은보화들은 주인을 찾을 수 없으니 그렇다 쳐도 이 소환단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줘야하는 게 도리다.”
“사, 사부님!”
주서천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허.”
유정목은 평소답지 않게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서천의 진맥을 짚어 확인했다.
“허어, 일 갑자가 넘다니!”
유정목의 얼굴이 경악으로 번졌다.
재차 확인해 봐도 믿을 수 없는 내공이었다.
열두 살에 일 갑자!
“내 예상은 했으나…… 하아.”
유정목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얼마나 복용했느냐?
“두 알입니다.”
주서천이 이실직고했다.
“이게 전부더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절 도와준 상인에게 네 알이 있습니다만 ……”
“마음 같아선 귀주로 되돌아가 그것까지 회수해 소림사로 가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구나.”
유정목이 머리를 짚었다.
그가 혼자 제자를 데리러 갔으나, 그렇다고 이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연화각원은 그만큼 각별하다.
괜히 화산파가 수림구채와 싸움을 각오한 것이 아니었다.
화산파의 명예이기도 하고, 연화각원을 잃게 되면 그만큼 오랫동안 이어진 전통을 해쳐 자존심이 상한다.
다른 정파는 삼안신투의 비고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화산파는 주서천에 대해서도 상당히 신경 썼다.
“실제로 이틀 정도 떨어진 마을에서 사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들과 하루빨리 합류해야 한단다.”
영약을 복용해 흡수할 시간도 없었다.
‘으윽, 내 실수다!’
뼈저리게 아픈 실수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유정목의 성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삼백 년 전의 도둑이 숨겨 두었던 영약을 얻어 온 것이라서 유정목이라면 그냥 복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승은 생각 이상으로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네가 날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강호에는 도리가 있는 법이지.
특히 소환단처럼 출처가 명확한 것은 함부로 써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냥 모른 척 복용하면 아무도 모르는데!
속말이 입 안까지 치솟았지만 도로 집어삼켰다.
“역시 내 제자다.”
유정목이 자랑스러워했다.
‘소환단 ……’
주서천의 마음은 타들어 가기만 했다.
참고로 반야심경에 대해선 아직 비밀이다.
소환단을 밝힌 것이 워낙 컸던지 다른 건 묻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잘 있으려나?’
주서천은 호북에서 은거하던 산에 반야심경을 묻어서 숨겼다.
동물이 파헤치지 않도록 장소도 신경 썼다.
혹시 몰라서 구결도 사전에 외워 두었다.
훗날 소림사에서 빚을 지게 만들어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사제(師弟)는 이틀 뒤, 유정목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던 화산의 제자 다섯 명과 만났다.
주서천과 면식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사형.”
유정목보다 배분이 위인 사람은 없었다.
“내 무한에서 전서구를 날리긴 했지만, 그래도 보고가 중요하니 합류하여 출발한다고 화산에 보고하여라.”
“알겠습니다, 사형.”
일행은 전서구를 날리고 마을을 떠났다.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섬서의 화산이었다.
호북, 운현.
북서 끝자락에 있는 어촌(漁村)이다.
바닷가에 있는 건 아니지만 바로 근처에 나름대로 큰 강이 있어, 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 갔다.
규모도 그럭저럭 있는 곳이었다.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그동안 꾸준히 달려왔으니 삼 일 정도 쉬도록 하자구나.”
유정목이 여장을 풀면서 말했다.
“예, 사형!”
화산의 제자들이 반색하면서 대답했다.
다들 말만 안 했지 슬슬 지쳐가는지라 휴식에 목말라 있었다.
일행은 적당한 객잔을 잡고 짐을 푼 후 식사를 끝냈다.
“난 올라가서 쉬고 있으마.”
식사가 끝나고 유정목은 방으로 돌아갔다.
유정목이 올라가자마자 사형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서천에게 몰려들었다.
그 기세가 대단하여 주서천도 살짝 당황했다.
“휴 드디어 눈치 보지 않고 물을 수 있겠군.”
“이봐, 주 사제. 괜찮다면 수림구채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
강호 무림 전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화산파 내부에서 주서천은 나름대로 유명했고, 관심도 많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노수창병 때의 활약 탓이었다.
“아, 예. 전 또 뭐라고…… 괜찮습니다.”
주서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야. 주 사제가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억지로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는 싶지 않고.”
“그래.”
사형제들이 배려해 주려는 듯했다.
‘개뿔.’
눈을 보면 영 아니다.
호기심으로 번쩍거리는 게 얼른 말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사부님 눈치가 보여서 입을 닫고 있었구나.’
화산파와 제갈세가가 협력해 찾아봤지만 시체도 건지지 못했다.
말만 행방불명이지 죽은 게 확실했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겨우 열두 살에 죽은 건, 보통이라면 미쳐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직 아이이기에 끔찍한 기억이 될 수도 있었고, 그걸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은 게 스승의 마음이다.
그들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기에 이렇게 나름 배려는 해 줬다만 그 배려심은 보다 큰 호기심에 묻혔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오!”
주서천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자 사형제들이 대놓고 좋아했다.
알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주모, 여기 아무거나 좋으니 술과 안주 좀 맞춰서 내주시오!”
화산파건 무당파건 도가 문파의 규율에 금주(禁酒)는 없다.
다만 과주(過酒)는 자제하라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산에 있을 때는 여기저기 눈치도 보이고 실수할 것 같아서 잘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강호에 나오면 이렇게 술을 줄기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주서천은 기억을 더듬으면서 중선에 탑승할 때부터 이야기해 줬다.
“흠, 그랬구나. 확실히 들은 대로야.”
사형제들은 주서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작은 문제가 아니다보니 이때의 일이 화산파에서도 잘 알려져 전혀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장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과는 역시 달라.”
“크으!”
술이 절로 넘어갔다.
“그런데, 사제. 내 듣기론 사제가 노수창병과 몇 합을 겨루었다는데 그게 진짜야?”
열두 살에 천하백대고수와 몇 합을 나누었다는 건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당시 노수창병은 구풍 사백 덕에 지쳐 있어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 도중에 구풍 사백의 십사수매화검법을 막느라 저에게는 아무렇게 휘두르는 게 고작이었죠.
그걸 쳐 내거나 피한 게 다입니다.”
이미 많이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평이 절하되는 것이 좋았다.
암천회가 신경 쓰인다.
“역시 그랬군.”
“맞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돼.”
아무리 수적이라지만 천하백대고수다.
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무나가 아니다.
그런 고수가 봐주지 않는 이상 몇 합을 나누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구풍 사백이 네 덕에 이겼다는데, 그건 뭐야?”
“그거야 당연히 제가 근처에서 신경을 분산시켜서 그런 거죠. 원래
최고수들끼리의 싸움은 신경이 다른 곳으로 조금이라도 분산되면 승패가 결정나지 않습니까.”
주서천의 혀가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끄러졌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래도 선상 위에 있던 수적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다고 들었다.”
“수적들의 무공이 형편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해.”
사형제들도 그제야 수긍이 간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구풍이나 장홍과 장서은 등에게 사정 설명을 듣긴 했지만 역시나 그대로 믿기에는 힘들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장본인에게 자세한 걸 들으니 그동안 품은 의문이 속 시원히 해소됐다.
“일단 장홍이나 장서은보다 무공이 높다는 거잖아?”
“솔직히 그동안 널 운만 좋은 놈이라고 무시했었는데, 내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해서 사과하마.”
“자, 네 스승님 눈치가 보여 많이는 못 주지만 한 잔 정도는 주마. 미래의 매화검수.”
활약을 최대한 낮추고 숨겼지만, 그렇다고 내화외빈 시절처럼 평가절하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주서천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노수창병 때의 행동은 충분히 인정받고 칭찬받을 일이었다.
“감사히 받겠습니……”
콰앙!
술잔에 술이 다 차기도 전, 객잔문이 거칠게 열렸다.
손님들을 포함해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누, 누가 좀 도, 도와주세요!”
옷차림이 엉망이 된 여성이었다.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무슨 일이오?”
객잔 주인이 물었다.
“그게,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던 도중이었는데 웬 무림인들이 와서는 행패를 부리고 있어요!”
“무림인?”
주서천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미친 건가?”
술병을 기울이려던 화산의 삼대제자, 을지호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어이없어했다.
호북의 치안은 상당히 높다.
남존이라 칭해지는 무당파와 더불어 정파의 두뇌인 제갈세가가 있어서다.
아무리 운현이 변방에 있다고 해도 그 세력권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두건 사파인이건 간에 웬만해선 호북에 오지 않으려고 하고 어쩔 수 없이 와도 숨어 지내기 바빴다.
“혹시 그들이 수련하고 있는 걸 훔쳐 본 건 아니오? 그러면 그들이 화낼 수도 있소.”
무슨 오해나 실수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니에요!”
여성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들겼다.
“운현, 아니 호북에서 행패를 부려?”
다른 손님들도 술렁였다.
그들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미친 거 아니야?”
운현은 무당산과도 인접해 있다.
그만큼 치안이 높았다.
실제로 무림인이 날뛴 적은 손에 꼽았다.
게다가 설사 날뛴다고 해도 후환이 문제다.
어디 소속이건 간에 무당파의 영역에서 날뛴 게 된다.
“침착하시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십시오.”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유정목이었다.
“화산의 제자로서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지요. 말씀해 주십시오.”
유정목이 여성을 쳐다봤다.
“그게……”
여성은 마을의 아낙네들과 평소처럼 빨래를 하려고 개울가에 나갔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인으로 보이는 남정네들이 찾아오더니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안을 느낀 여성들은 빨래를 챙겨 도망치려 했지만, 가지 못하도록 막고 행패를 부렸다.
“몇명 정도 됩니까?”
“자, 잘 모르겠어요. 얼추 이십은 되는 것 같았는데…… 아이 참,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요!”
여성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저를 따라오세요!”
여성이 문 바깥으로 나갔다.
“사형.”
을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가득한 눈초리였다.
“보아하니 함정이로구나.”
유정목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상쩍어도 너무 수상했다.
“동공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같고, 시선은 똑바로 마주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정말 무림인들이었다면 설사 삼류들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아낙네를 놓쳤을 리 없습니다.”
을지호가 확신했다.
“더불어 고민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안내해 주겠다는 게 수상쩍구나.”
“따라가실 겁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불의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느냐.
어쩌면 저 여성은 협박을 당해 저러는 것일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을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사형제들도 따랐다.
주기(酒氣)는 일찍이 내공으로 태워 없앴다.
* * *
여성을 뒤따라갔다.
달리던 도중에 넘어져서 그냥 업고 길안내만 받았다.
“아까 개울은 지나친 것 같소만.”
“그, 그게…… 근처에 있는 개울은 오늘 동물의 시체가 떠내려와 물이 더러워졌어요. 그래서……”
서툰 거짓말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함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안내받은 곳은 마을에서 좀 떨어지고 인적이 드문 산이었다.
흔한 약초꾼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비교적 평평한 땅 부근에 도착하자 수풀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불쾌한 목소리였다.
“흠. 나타났나.”
스르릉.
일행이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아들었다.
“기다리느라 지쳤다.”
수풀이 갈라지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숫자가 이십이었다.
다만 무리에 어울리지 않은 예닐곱 살 정도의 남아가 섞여 있었다.
밧줄로 포박된 채였다.
“아가!”
여성이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과연, 그렇게 된 건가.”
유정목이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웠다.
그 대신 차가운 분노가 감돌았다.
“사정은 대충 알겠소. 뒤에 숨어계시오.”
“흐윽……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
여성이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설마 나에 대해 눈치채고 온 건 아니겠지?’
주서천은 불안을 느꼈다.
“소유검, 유정목!”
그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네놈을 만나러 친히 호북까지 왔다!”
‘내가 아니라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