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비고진입(秘庫進入)
중경의 대부분의 지역은 사암(砂岩)이나 석회암(石灰巖)으로 된 낮은 구릉으로 되어 있었다.
삼림의 북부, 장강이 이어진 중부는 제외이다.
동부에는 암장(巖場)이라는 지역이 있다.
사암과 석회암 같은 바위들이 특히 즐비한 곳이었다.
주서천 일행은 이 암장에 도착했다.
“여기에 뭐가 있다는 겁니까?”
왕일이 물었다.
암장 근처에서는 농업이나 목축업도 불가능했다.
죄다 바위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철광석 등이 잠들어있는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는 건 낮은 구릉 지대에 펼쳐진 바위뿐.
제대로 된 식물도 자라지 않으니 죽음의 땅과 다름없었다.
마지막 마을에서 휴식을 취한 지 어언 삼 일 전.
일행은 지칠 대로 지쳐 갔다.
주서천은 암장 중에서도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 하나 없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보물 창고.”
주서천이 입가에 진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반짝이는 눈 너머 서로 겹겹이 붙은 바위들이 보였다.
“어……?”
제갈승계가 머리를 들어 바위를 슥 살폈다.
그의 눈은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무언가, 이거……”
“오, 동생. 뭔지 좀 알겠어?”
주서천이 반색하면서 물었다.
“아니, 뭐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음, 그래. 어디 보자 뭔가 이쪽이 이상한 것 같아.”
제갈승계가 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바위 한 부분을 매만졌다.
그의 눈이 탐구심으로 빛났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주서천은 아무 바위 위에 앉았다.
앉은 자세를 보니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휴, 괜히 기관의 일인자가 아니야.
승계를 데려오지 못했다면 입구도 못 찾을 뻔했어.’
조금 헤매긴 했으나,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비고의 위치는 성공적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와 보니 기억과 조금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출입구의 존재였다.
전생에서 왔을 때는 이미 발견된 이후라 출입구가 개방되어 있는데, 오늘 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솔직히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달칵.
“어, 이거다.”
바위를 한참 만지던 중, 무언가 소리가 났다.
쿠구구궁!
그 직후, 곧바로 굉음이 터지면서 땅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뭐, 뭐야!”
무사들이 기겁했다.
조금 있으면 노장 소리도 들을 만한 왕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 그런가. 이렇게 해 둔건가. 과연, 대단해.”
지면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오는 진동에 주변 일대가 울부짖듯이 흔들렸다.
제갈승계는 일찍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으나, 딱히 겁먹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반대로 호기심 어린 얼굴로 신기하다는 듯, 주변 상황을 살펴보면서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겁이 잔뜩 많은 주제에 기관과 관련되면 이렇게 별난 성격을 보이곤 했다.
‘드디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회귀한 이후, 비고를 떠올리며 계획을 세웠다.
몇 번이나 준비하고, 생각하고, 수정했다.
그리고 여러 마음고생과 노력 끝에 비고를 찾았다.
훗날, 역사에도 중요 사건으로 기록될 순간의 첫 발견자가 됐다는 생각에 탐험가의 심정이 이해됐다.
“미안하오.”
원래라면 이 광경의 주인은 따로 있다.
주서천은 이름도 모를 그에게 사과했다.
“으으…”
왕일이 침음을 흘렸다.
반 각이 덜 된 시간이 지난 뒤, 일행들 앞에 나타난 것은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왕일이 중얼거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소.”
주서천이 바닥에 주저앉은 제갈승계를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 이런 기관이 설치된 무덤이라니…… 도대체 여기에 누가 잠들어있는 거요?”
“보물.”
주서천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 * *
화르륵
횃불이 어둠을 밝혔다.
계단을 내려오자 보인 건 수백 명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공동이었다.
공동의 바닥에는 세 개의 눈이 그려진 문장이 있었다.
“설마……”
왕일이 바닥에 그려진 문장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니, 왕일뿐만이 아니다 다른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삼안신투의 문장이잖아!”
제갈승계가 그들을 대변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삼안신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도둑이다.
대여섯 살 아이들도 안다.
“아니, 그럴 리가.”
머릿속에 떠오른 추측이 있었으나, 너무 허황된 이야기인지라 금세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부정했다.
“이보시오, 대장.”
굵직하지만,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였다.
십 인의 무사 중, 유일한 여성 무사였다.
다만 덩치가 웬만한 남자들보다 컸고, 잘 단련되고 부풀어 오른 근육은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했다.
입가에는 세로로 흉터가 길게 나있고, 눈매 가 상당히 날카롭다.
그 얼굴은 결코 예쁜 편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애초에 연애 대상으로 볼 수 없는 중년 여성이었다.
“무슨 일이오, 초련(初鍊).”
주서천이 공동 주변을 꼼꼼히 살피면서 답했다.
“솔직히 말하시오. 여기 대체 누구의 무덤이오?”
초련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무덤이 아니라 비고요.”
적어도 전생에선 삼안신투의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누구 말이오?”
초련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삼안신투.”
주서천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거짓말!”
제갈승계가 펄쩍 뛰었다.
“여, 여기가 그 전설적인 도둑의 비고라고?
그건 헛소문에 불과하잖아!”
삼안신투의 사후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가 남긴 보물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거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둑이 훔친 보물이 어디로 사라질 리는 없다.
분명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관부의 조사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소문만 무성했을 뿐, 발견되지 않았다.
관부도 무림도, 그리고 도굴꾼들도 전부 나서서 찾아봤지만 단서 하나 없었다.
그렇게 세월에 잊혀졌다.
“그건 들어가 보면 알지.”
주서천이 앞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공동의 정중앙을 중심으로 가지처럼 뻗어진 통로가 총 여덟이었다.
다들 똑같이 생겨서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통로는 전부 칠흑으로 뒤덮여, 그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사람 있소?”
주서천이 뒤를 돌아보면서 일행의 의사를 물었다.
“……”
하지만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다들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진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요?”
초련이 왕일에게 물었다.
그만큼 불안감 솟아났다.
“어떻게 하기는…… 설사 죽는다고 해도 대장을 따라야겠지.”
“죽지 않게 노력하겠지만, 만약 사망할 시에는 그대들의 가족들을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하겠소.”
왕일의 대답에 주서천이 바로 말을 덧붙였다.
“에휴.”
그 말에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명령만 내리시오, 대장.”
“앞장은 내가 설 것이고, 승이를 중앙에 두고 앞, 뒤, 옆으로 호위하시오.
다만 그의 시야는 가리지 마시오.
이래 봬도 우리 중에서 제일중요한 사람이니까.”
승은 제갈승계의 임시로 쓸 가명이다.
“어째서입니까?”
“이 비고 자체가 하나의 기관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기관 장치가 많소.
그걸 알아보고,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거기에 있는 승이요.”
“이 꼬맹이가?”
초련이 의심스러운 눈치로 제갈승계를 내려다봤다.
“엣헴.”
제갈승계가 가슴을 펴면서 우쭐거렸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제갈승계지만, 이렇게 기관 관련으로 띄워 주면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괜히 내버려 두었다가 여기 있는 모두가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그러시오.”
“……쯧”
초련이 혀를 찼다.
“또한, 대부분 제가 앞장서서 이끌긴 하겠으나 말을 최우선으로 들을 건 승이입니다.
저와 다른 의견이라 할지라도 승이의 말부터 따르시오.
적어도 여기에 있는 우리보다 전문가니까.”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손에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영 가볍지 않군.”
왕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은 통로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 점검을 했다.
“어디로 가면 되겠냐?”
주서천이 제갈승계에게 물었다.
“음, 아무런 차이 없어 보이는데?”
제갈승계가 머리를 긁직였다.
“그래, 그럼…… 여기로 가자.”
좌측에서 세 번째 통로를 향해 걸었다.
“아, 잠깐만.”
제갈승계가 주서천을 막아섰다.
주서천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제갈승계는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를 주워 입구로 던졌다.
채채채챙-!
돌이 입구를 지나친 순간, 입구 부근의 천장에서 창날이 무섭게 떨어지면서 지면에 꽂혔다.
“……차이 없다며?”
주서천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전부 설치되어 있는데?”
제갈승계가 무슨 문제나는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미치겠군.”
왕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안색이 살짝 파리하게 질렸다.
“그다음에는…… 뭐 없지?”
“응.”
“하아, 일단 저 창날 좀 처리해야겠군.”
일행은 입구를 막은 창날들을 검으로 쳐 내서 바깥으로 꺼냈다.
그 숫자가 무려 백이었다.
그다음에서야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승 공자는 대체 어떻게 방금 전 그걸 안 거요?
괜찮다면 나도 좀 가르쳐 줄 수 있소?”
왕일이 공손한 태도로 제갈승계에게 물었다.
“그거 물어도 소용없을 거요.”
주서천이 피식, 하고 바람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아, 이런. 실례했소.”
왕일은 제갈승계에게 있어선 기관 지식이 무공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무공의 구결을 불러 달라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사과했다.
“아니, 그 뜻이 아니오.”
주서천이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럼 ……?”
“승아, 모두에게 좀 알려 줘 봐.”
주서천이 잠시 멈춰 서서 제갈승계를 쳐다봤다.
“왜 다들 이 쉬운 걸 모르지?”
제갈승계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그냥 보이잖아요?
저기에 무언가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고 말이죠.”
“……”
왕일을 비롯한 무사들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재수 없는 꼬맹이군.”
초련이 중얼거렸다.
“동감이오.”
주서천도 동의했다.
그도 예전에 제갈승계에게서 복잡한 건 그렇다 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간단한 것 몇 가지는 배워 두려고 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항상 제갈승계는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이런 식으로 해괴한 소리만 해 댔다.
제갈승계의 말을 빌려 보자면 해제하는 것 역시 그냥 어색한 부분을 건드리면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천재, 그것도 제일 싫은 부류였다.
“하지만 그만큼 든든하지.”
통로에 설치된 함정은 정말 수십 가지였다.
아직 반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발동되었거나 혹은 해제된 함정은 횟수를 세다가 도중에 포기할 정도였다.
그가 없었다면 진작 죽었다.
주서천의 말에 반신반의하고 있던 일행들도 그제야 제갈승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호위에 진지해졌다.
그리고 반 시진 정도 지났을까.
통로가 조금 넓어지나 싶더니만, .인형(人形)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하고 횃불을 들어 확인한 일행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목인(木人)?”
약 삼십여 개의 목인들이 양옆 벽에 붙어 있었다.
다들 부동자세였다.
“목인이 왜 여기에 있지?”
무사 중 한 명이 의아해했다.
무인에게 있어 목인은 친숙하다.
어릴 때 목인을 상대로 무공을 수련해서 그렇다.
주로 장기나 혹은 혈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목인에게 검이나 주먹을 휘둘렀다.
그 외에도 가끔씩 누군가 상대가 필요한데 아무도 없다면 창고에 먼지가 쌓인 목인을 꺼냈다.
“저것도 기관 장치네요.”
제갈승계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천장, 바닥, 벽, 그리고 목인들을 살폈다.
“어떤 건데?”
주서천이 물었다.
“나도 본 적 없으니 잘 모르지.”
제갈승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러네. 미안하다, 동생아.
내가 널 너무 의지했어. 반성하마.”
주서천이 검을 휘리릭 돌려 고쳐 잡았다.
“일단, 이 주변은 저 목인들 외에는 어떠한 장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주서천이 목인들로 향하자 제갈승계가 경고했다.
“그래, 고맙다.”
“주 대장 혼자만으로 괜찮겠소?”
왕일이 물었다.
“난 괜찮으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승이나 잘 지켜 주시오.”
왕일들을 데리고 온 건, 짐꾼의 역할도 있지만 제갈승계를 보호하기 위함이 컸다.
주서천은 살짝 경계하면서 앞으로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일정한 부근에 들어선 순간, 제일 앞에 있던 목인이 번개같이 반응하며 주먹을 날렸다.
“흠.”
주서천이 재빨리 퇴보하면서 주먹을 피했다.
“응?”
다음을 기다렸으나,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하고 다시 전진하니 동일한 공격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검을 들어서 주먹을 막아봤다.
서걱!
나무 팔이 검에 베여 잘렸다.
주서천은 다시 후퇴했다.
그러자 목인의 팔이 잘린 채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과연, 그런 거군.”
어떻게 된 장치인지 이해했다.
아무래도 일정 영역에 들어오면 기관 장치에 의하여 정해진 행동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해제할 수 있겠어?”
주서천이 뒤를 돌아 제갈승계에게 물었다.
“아니. 이 근처에는 안 보여.”
제갈승계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죄다 박살 낸다!”
주서천이 몸을 날렸다.
“하앗!”
일단 팔이 잘렸던 목인부터 검을 휘둘러 처리했다.
검을 수평으로 긋자 몸이 두 동강났다.
목인의 소재를 생각하면 아직까지 하나도 썩지 않은 것은 의문이었으나, 깊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 기관 장치의 힘이라고 생각하면서 목인들 사이에서 춤을 췄다.
드르르륵!
목인들이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어떤 목인은 팔과 다리를 동시에 움직였고, 어떠한 목인은 혼신의 주먹이나 발차기만 날렸다.
다들 하나같이 반응하는 속도는 번개와 같았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면 막는 것만 해도 급급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통로의 넓이 탓에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압!”
확실히 대단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주서천은 움직임이 제한되었음에도 목인들의 공격에서 무사했다.
한 치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결코 회피하거나 막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반격을 해서 목인을 파괴했다.
검법만으로 목인을 상대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씩 필요하면 매화권으로 반격에 나서서 박살 냈다.
‘흠, 오기 전에 경지를 올려 둬서 다행이다.’
동체 시력이나 반사 신경이 전과 달리 몇 배나 상승했다.
매화육합심법을 전부 대성하고 경지를 올린 덕분이었다.
약 한 달 전 , 수적들과의 싸움에서 본신의 무위를 모두 보였다.
이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동안 일부러 멈춰 두었던 매화육합심법을 수련했다.
대성한 순간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검법은 원래부터 화경이었으니 변화는 없었다.
대신 신체 능력이나 내공의 총량이 올랐다.
내공은 이제 총 육십 년, 일 갑자였다.
주서천은 콧노래를 낼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전혀 문제없이 목인들의 공격에 반격해 갔다.
“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무사들이 감탄을 흘렸다.
“왕 형의 말대로였군.”
“정말로 고수였네.”
자고로 사람이란 건 의심이 많은 동물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끝까지 의심한다.
아무리 왕일이 대신 증명해준다 할지라도, 다들 반신반의했었다.
“그러기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왕일도 짐짓 감탄하면서 주서천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함이다.
“소위 천재들인가……”
초련이 주서천과 제갈승계를 번갈아서 쳐다봤다.
“세상 살기 싫어지네.”
“동감일세.”
제갈승계는 그렇다 쳐도, 주서천을 보니 시기를 넘어서 상대적 박탈감이 생겼다.
누구는 중년인데도 절정의 경지 근처도 못 가는데, 누구는 막 성인인데 벌써 절정의 고수였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은 알았으나, 그걸 눈으로 목격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또 고통스럽다.
“우리 같은 것들의 심정은 알까?”
“알 리가 있겠나?”
무사들이 울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충분히 알고 있소.”
주서천이 그 중얼거림에 답했다.
방금 전에 막 마지막 남은 목인까지 처리했다.
서로를 마주 보면서 굳건한 자세로 서 있던 목인은 모두 엉망이 됐다.
“이제 다 처리한 거야?”
제갈승계가 물었다.
무언가 참는 얼굴이었다.
“그래. 왜?”
“그럼 저것들 좀 조사해도 괜찮아?”
제갈승계가 눈을 반짝였다.
“적당히 해라.”
주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승계는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박살 난 목인들을 살폈다.
기관과 관련만 되면 정말 활발해진다.
“일단 나무인 것 같은데 어떻게 썩지 않은 거지……
호, 이게 여기에 연결돼서 움직였나……”
제갈승계가 목인에 빠져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주서천은 약 일각 정도 되는 시간을 기다려 줬다.
현재 무림에서는 기관 장치를 볼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제갈승계에 있어선 흔하지 않은 기회다.
그걸 알고 있기에 그의 편의를 봐줬다.
게다가 제갈승계가 목인을 보고 무언가 지식을 쌓게 된다면 나쁠 것 하나 없었다.
언젠가 그 지식은 큰 도움이 되어서 돌아온다.
“슬슬 가자.”
“넵.”
제갈승계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 했다.
* * *
목인을 처리한 뒤 다시 통로를 걸었다.
이각 덜 되는 시간이었을까, 통로 끝이 보였다.
횃불에 의지하던 시간도 끝났다.
통로 끝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함정을 만났다.
정말 이놈의 기관 장치가 얼마나 설치되어 있는지 셀 수가 없었다.
다들 뭐만 보면 의심부터 했다.
“허.”
통로 끝을 나오자, 여태껏 생각하지도 못했던 공간이 일행을 반겼다.
“이, 이게 무슨……!”
“허어억!”
다들 하나같이 경악했다.
그들의 눈에 펼쳐진 건 여태껏 보지 못한 은자들의 산이었다.
산. 그 외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은자가 각 벽에 쌓여서 산맥을 형성했다.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은자밖에 없는 건가.”
주서천만 놀라지 않았다.
무덤덤한.얼굴로 주변을 슥 둘러보면서 다른 보물이 없나 확인했다.
“거기! 건들지 마세요!”
탐색 도중 제갈승계가 소리를 꽥 질렀다.
고개를 돌리니 은자에 손을 대려던 초령이 보였다.
초령은 주서천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사과했다.
“어흐흠! 함부로 건드려서 미안하오.
하지만 어차피 이 모든 게 상단주의 것이 될 텐데, 조금만 눈감아주면 안 되겠소?”
“나야 상관없소. 하지만 아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지금 누가 막은 건지 다시 생각해 보시오.”
“아!”
초련이 그제야 제갈승계가 여태껏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떠올렸다.
“설마……?”
왕일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은자들을 살폈다.
“네. 짐작대로 기관 장치가 설치되어 있네요.
그러지 않은 것도 있긴 한데, 알려 드릴까요?”
제갈승계의 마지막 물음에 무사들의 눈에 탐욕이 일렁였다.
다만 다들 주서천의 눈치를 봤다.
“우선순위로 챙길 것이 있어서, 그 전에는 한두 푼 정도가 아니라면 무리요.
그리고 움직이다가 돈을 떨어뜨려 자칫 잘못하면 괜한 함정을 건드릴 수도 있으니, 정 원하면 귀환할 때 챙기시오.”
주서천이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저런 거 말입니까, 대장?”
왕일이 은자들의 산에 묻혀 있는 목함을 가리켰다.
주서천은 제갈승계를 바라봤다.
제갈승계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은자의 산을 뒤져 목함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호.”
목함을 열자마자 알싸한 향이 코를 찔렀다.
환단이 안에 들어 있었다.
딱 봐도 영약이 틀림없다.
“잘했소.”
주서천이 왕일을 칭찬하면서 목함을 건냈다.
왕일은 목함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다가,
두 눈을 딱 감고 짐 안에 집어넣었다.
“괜한 욕심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나중에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면, 적절한 보상도 해 주겠소.
미리 말하지만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마시오.”
주서천이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경고했다.
미연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시작이다.’
은자는 맛보기일 뿐이다. 이제 막 첫 관문을 통과했다.
앞으로 있을 보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행은 다음 관문으로 향했다.
* * *
화산파.
“하앗!”
낙소월이 소리를 내지르면서 검을 힘껏 내질렀다.
“아가.”
심옥련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네, 사조님”
낙소월은 검을 내리고 부름에 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으냐.”
심옥련이 엄한 눈초리로 낙소월을 내려다봤다.
“……죄송해요.”
낙소월은 심옥련의 눈치를 보면서 잘못을 고했다.
“……하아”
심옥련은 이마를 짚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력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나아지지도 못하는구나.
그 반푼이 때문이더냐.”
반푼이라는 건 곧 주서천을 말한다.
외화내빈이라는 별호에 알맞은 별명이었다.
“이제는 반푼이가 아닌걸요……”
낙소월이 침울해하면서 중얼거렸다.
평소의 낙소월이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사조, 그것도 철혈매검의 말에 반론을 하다니.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낙소월 스스로도 놀랐는지 말하고 아차, 하는 얼굴로 얼른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죄, 죄송합니 ……”
“아니, 됐다. 맞는 말이니까.”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심옥련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대단한 아이다.”
심옥련이 주서천을 안 좋게 봤던 건, 운이 좋았을 뿐 그 외에는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고, 사실은 검술도 뛰어나다는 것에 인식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미 죽은 아이다.”
심옥련이 냉정하게 말했다.
괜히 철혈매검이라는 별호가 붙은 게 아니었다.
“잘 들어라, 아가야. 훗날 네가 강호에 나가게 된다면 주변 사람의 죽음은 질리도록 경험하게 될 거다.
그걸 좀 더 빨리 경험하게 된 것뿐이니라.
그러니 이제 그만 울고 수련에 집중해라.”
죽음.
그것도 개인적으로 호의를 지녔던 사형의 죽음이다.
그 사실이 낙소월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을 정도로의 냉혈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울도록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제 그만 그를 잊거라. 주서천은 죽었다.”
……멀쩡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