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행방불명(行方不明)
삼주 뒤
귀주, 옹안.
“하하하,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이의채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품 안에 쥔 주머니의 무게가 좋았다.
삼 주 전 , 옹안의 군량 보급을 금의상단이 맡았다.
덕분에 상단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귀주는 상인에게 위험한 땅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분쟁이 자주 일어나는 만큼, 군량의 소모가 빨랐다.
그만큼 보급도 빈번했고, 자신의.입장에서는 거래량이 늘어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이의채의 주머니는 거래의 양만큼 불려 나갔다.
그리고 이 삼 주 동안 이의채, 곧 금의상단에 쌓인 신뢰는 상당했다.
벌써부터 유명세를 탔다.
이의채는 확실히 훗날 상왕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상인이었다.
상재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돈을 벌었다.
보급의 품목, 시기 등을 정확하게 맞췄다.
품질 또한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의채가 하는 일은 간단명료했다.
좋은 품질의 상품을 최대한 싸게 사오고, 그걸 적당한 가격에 판매한다.
말만으로는 간단하게 보여도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걸 기가 막히게 잘했다.
개양 지부장, 신도균도 그 솜씨에 최근 관심을 가졌다.
얼마 전에 신도균에게도 의뢰를 받았다.
옹안에서 장사한 지 삼 주.
벌써 개양까지 진출했다.
귀주 전체도 멀지 않아 보였다.
그 외에도 다른 수단으로 돈도 벌었다.
금의상단은 군량뿐만 아니라 무기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아직 대단한 정도는 아니지만, 주로 전장에서 버려지는 병장기들을 주워서 성도의 대장간에 팔았다.
그리고 성도의 대장간에서 하급의 병장기들을 헐값에 산 뒤, 전선에 가서 무사나 낭인들에게 팔았다.
돈에 눈이 먼 낭인들나 흑도 방파의 잡배가 금의상단을 노린 적도 있었으나, 옹안 지부와 더불어 신도균에게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소식에 얌전히 포기했다.
금의상단을 건드릴 수 있는 건 귀주에서 무림맹을 적대하고 있는 사도천 정도다.
“호히히! 돈이다, 돈!”
이의채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좋아했다.
돈, 특히 황금은 자신의 마음을 충족해 준다.
여자를 안는 것보다 돈을 세고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왜 주색에 빠지는지 이의채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냄새를 맡는다거나, 만지작거리는 건 돈만으로 충분하지 .
호호, 요놈들…… 죽겠다, 죽겠어.”
이의채가 황홀한 눈으로 은자가 쌓인 산에 얼굴을 묻고 비벼 댔다.
조금 아팠지만 그것조차 쾌감으로 변했다.
“부히힉 히히히……”
마교도와 혈교도도 질릴 정도의 광기였다.
“아, 주 대협에게는 정말 큰 빚을 졌구나.
그가 아니었으면 아직까지도 누구 엉덩이나 핥고 다녔겠지.”
이의채가 은자의 산에서 얼굴을 떨어뜨렸다.
“내 그 빚 갚고 싶기는 한데, 이승에 없으니 어찌하겠소.
아니, 어찌하겠나. 주 공자.”
말이 점점 짧아졌다.
“주 공자, 부디 극락왕생(極樂往生)하시오.
내 그대를 위해 은자…… 아니, 은자는 좀 그렇군.
어차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럼 세 푼? 두 푼? 아니…… 한 푼도 솔직히 좀 그렇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돈을 써? 그냥 마음만좀 보내 주자.”
이의채가 손을 모아 합장했다.
“주…… 뭐였더라. 이름도 기억이 안 나네.”
이의채가 주 뭐시기를 깨끗하게 잊었다.
똑똑.
“누군가?”
이의채가 은자들을 치우면서 물었다.
“상단주님, 웬 무인이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문밖에 있는 무사가 답했다.
“돈 좀 많아 보여?”
“땡전 한 푼도 없어 보입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아니면 무림맹이래?”
“낭인이라 합니다.”
“이름 좀 날렸대?”
“무명입니다.”
“내쫓아!”
예전 같았으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놈에게 내줄 시간 따위는 없다.
그 시간에 다른 이득이 되는 일을 찾는 게 훨씬 낫다.
“예.”
대화가 끝났다.
이의채가 이번에는 금자를 꺼내서 세기 시작했다.
그의 입꼬리가 기분나쁠 정도로 치켜 올라갔다.
똑똑.
“아, 또 뭐!”
이의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가도 됩니까?”
문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방금 전의 무사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래, 들어와!”
그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상단 소속의 또 다른 호위 무사인가 싶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갓 성년이 된 남자가 들어왔다.
“으악!”
이의채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다, 다, 당신은!”
이의채가 덜덜 떠는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안색이 훤해 보입니다, 상단주. 비고 털 준비는 됐습니까?”
“흐아아악! 귀신이다! 귀신이 틀림 없다!”
이의채가 돈주머니들을 품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멋대로 사람 죽이지 맙시다, 상단주.”
주서천이 씩 웃으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들어와라.”
“쓰러져 있는 무사는 어쩌고?”
주서천의 뒤로 아홉에서 열 살 정도 될 법한 소년이 따라 들어왔다.
또래 아이들보다 허약해 보였다.
“설마……”
이의채가 소년을 보고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제갈승계요. 알고 있습니까?”
“귀신이 둘이나 있다! 물러가라! 너희에게는 한 푼의 돈도 주지 못한다!”
이의채가 재차 기겁하면서 소리를 꽥꽥 질렀다.
“게 누구 없느냐!”
“시끄럽습니다, 상단주.”
주서천이 주먹을 휘둘러 벽을 후려쳤다.
쿵, 소리와 함께 벽에 주먹만한 구멍이 났다.
“난 죽지 않고 눈앞에 멀쩡히 살아있으니 입 좀 다물어 주시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의채가 머리를 살짝 들어서 구멍이 난 벽을 확인했다.
그러곤 방금 전 모습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굽실거렸다.
“무림에선 대협보고 죽었다 하였지만, 저 만큼은 생존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대혀업!”
이의채는 뻔뻔했다.
* * *
삼 주 전, 한 소식이 무림 전역을 강타했다.
천하백대고수, 도수창병 육대랑의 사망.
그리고 그를 죽인 자가 십사검협 구풍이라는 소식이었다.
고수들은 항상 무림의 시선을 끌고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이날 있었던 일이 금세 소문이 났다.
“그런데 대체 왜 싸운 겐가?”
“장강을 건널 때면 그 수적 놈들이 통행세를 요구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그 도중에 화산파와 제갈세가의 아이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선수를 친 모양일세.”
“허, 역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미래들이구먼.
암, 그래야지. 그래야 정파인이 아닌가. 잘됐어.”
수림구채는 의적이다 수호자다 말하지만, 헛소리다.
그들은 결국 남의 재물을 강탈하는 도적일 뿐이었다.
무림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이 소식을 듣고 하나같이 통쾌하다는 듯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 일로 미래라 부를 수 있는 아이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일일세.”
주서천과 제갈승계는 행방불명 처리됐다.
그 탓에 정파 무림은 난리도 아니었다.
한 명은 화산파의 자랑인 연화각원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제갈세가를 이끄는 가주의 친조카이다.
그 둘이 수적에게 살해된 의미는 크다.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다.
피해자인 화산파와 제갈세가는 크게 분노하면서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여기까지는 알고 계십니까?”
이의채가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차로 목을 축였다.
“예, 소문으로 대충이나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잘 모릅니다.”
“과연.”
이의채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화산파와 제갈세가가 추궁하기도 전에, 수림구채에선 정당방위라면서 반론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대협의 죽음은 특히 여기 옹안에서도 파장이 컸으니까요.
그만큼 자세한 사정에 대한 것도 듣게 됐습니다.”
그러나 화산파와 제갈세가는 그 반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커질대로 커진 소문 때문이었다.
강호뿐만 아니라 중원 사람들 대부분이 화산파와 제갈세가 일행이 수림구채의 불의에 참지 못하고 먼저 공격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그거에 대해 찬사를 받고 있었다.
하나 여기에서 그걸 부정하게 된다면 화산파와 제갈세가의 입장이 애매해진다.
수적의 불의를 평소에 침묵하고 무언의 허용을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반대로 더 큰 비난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 탓에 부인을 할 수가 없었다.
주서천과 제갈승계의 신분이 평범하진 않아도, 그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 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양측 다 이렇다 할 의견을.내놓지 못한 채, 끝났습니다.
대협도 알다시피 무림의 다른 세력 탓에 화산파와 제갈세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수림구채와 정면승부를 하게 되면 피해가 보통이 아니다.
그건 곧 힘의 균형을 깨뜨리는 일이 된다.
그다음에 기다릴 일은 약해진 정파를 노리는 전쟁이었다.
“한데, 그러던 중 대협과 제갈 공자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의채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얼굴로 둘을 쳐다봤다.
“저희는 장강을 통해 일행과 따로 떨어진 곳까지 떠내려 갔습니다.
거의 호북에 닿을 정도였죠.”
부상을 입은 상태로 의식을 잃은 제갈승계를 데리고 있는 건 힘들었지만, 다행히 어찌어찌 생존했다.
“그리고 호북에서 남하하여 호남으로 내려가, 다시 이곳 귀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리더군요.”
“아니, 왜 돌아온 겁니까?
호북은 정파의 영역인 데다가…… 제갈세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입니다.”
주서천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의채가 뭐라 묻기도 전에, 주서천이 선수 쳤다.
“저나 승계가 발견되면 분명 난리가 날 것이고, 각자 화산파와 세가로 돌아가 보호받을 겁니다.
그러면 정말 몇 년 동안 나올 수 없게 되지요.
삼안신투의 비고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
이의채가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 아닙니다.”
비고가 도망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몇 년 지체했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털릴 수는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진짜 있을지도 모른다.’
약 삼 주, 아니 거의 한 달 전에 들었지만 아직까지도 반신반의했다.
정확히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군량의 상권을 얻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일을 처리해 두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주서천이 이렇게 남들에게 비밀로 하고 자신을 찾아온 걸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제갈 공자를 데려온 건 비밀 엄수를 위함입니까?
과연, 대협. 철저하십니다.
사람도 구하고, 계획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하다니……
역시 대협이십니다.”
이의채가 손바닥을 비비면서 뻔한 아부를 했다.
“아닙니다. 승계는 저희의 또 다른 동업자입니다.
그가 없다면 비고를 터는 건 불가능합니다.”
주서천은 비고에 설치된 기관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진짜로 비고가 있는 거 확실해?
옆에 앉은 제갈승계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확실하건 말건 일단 따라와, 동생아.
설마하니 생명의 은인을 모른 척하고 배신하는 건 아니겠지?”
“……으”
제갈승계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주서천은 제갈승계를 구한 뒤,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을 따라오게 만들었다.
제갈승계는 무척 싫어했으나, 그 빚이 마음에 걸려 결국 불만 어린 얼굴을 하면서도 따라왔다.
“자, 상단주. 준비는 됐습니까?”
주서천이 옅게 웃었다.
“따르겠습니다, 대협!”
섬서, 화산파.
“날 용서하지 말거라!”
구풍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사형……”
유정목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설사 똑같은 삼대제자라 할지라도 구풍은 삼대제자 중에서도 제일 위에 있다.
이런 사과를 받으면 유정목만 곤란했다.
“연화각의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네 제자가 희생됐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구풍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찼다.
그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약 삼 주 전, 육대랑에게 기적적으로 승리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주서천만큼은 구하지 못했다.
화산파에 보고를 하고, 무림맹 무사들과 몇 날 며칠을 정찰했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더 찾고 싶었으나 본산에서 귀환 명령이 급히 내려져 연화각원들을 데리고 화산으로 돌아왔다.
탐색은 멈추지 않고 진행됐으나, 결국 단서 하나 잡지 못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사실상 사망 판결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 내 잘못이다. 만약 네 제자를 조금이라도 믿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게다.”
참고로 주서천의 평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더 이상 내화외빈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주서천의 활약에 놀라워했다.
그동안 힘과 실력을 숨기고, 주변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배움에 힘쓰던 태도에 감탄했다.
하나 그렇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런 인재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은 것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으……”
유정목은 초절정 고수가 된 이후로 오랫동안 강호에 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서천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면서 화산파로 급히 귀환했고, 그게 오늘이다.
마침 화산에 머무르고 있던 구풍은 유정목의 귀환 소식에 제일 먼저 찾아가 허리부터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수림구채, 그놈들을 지금이라도 찾아가 전부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나……”
사정이 여러모로 꼬여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무림맹에서도 따로 조사하고 있었다.
육대랑이 미치지 않는 이상, 연화각원과 제갈세가의 직계 혈족들을 갑작스레 습격할 리는 없다.
게다가 정보에 의하면 일행이 혹시라도 홀어져서 장강을 건널까 봐 일부러 배들을 통제했다고 한다.
체계적인 습격이었으니 무언가 있을 거라 의심을 하고 있었다.
“내 비록 제자를 두지는 않았으나, 제자를 잃은 슬픔과 분노, 고통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날 부디 원망하고 증오하여라.”
제자에게 스승은 곧 부모와 같다.
하면 스승에게 제자란 건 곧 자식이기도 하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그 이상의 사랑과 연으로 이어져 있다.
“내 이 일은 평생 동안……”
아까부터 가만히 듣고 있었던 건 아니다.
유정목도 그를 진정시키려고 시도해 봤다.
하지만 구풍은 계속해서 비슷한 말의 사과만 반복했다.
마치 자신을 죽여 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사형.”
결국 유정목도 할 수 없이 구풍이 하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래.”
구풍이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정목에게서 들려온 말은 전혀 달랐다.
“전 괜찮으니 ,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사제.”
“반대로 이러시는 게 저에게는 더 힘든 일입니다.”
유정목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 눈은 어딘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강호에 나가 있다가 화산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심신이 좀 지쳐서 그런지 ,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안 그래도 본산에 오를 때부터 주변의 시선이 여러모로 많더군요.”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다.”
구풍이 어두운 안색으로 재차 사과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 당분간은 내버려 두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알겠다. 배려하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하다. 쉬어라.”
구풍이 물러갔다.
그 두 어깨는 죄책감으로 목직했다.
유정목은 구풍이 떠나간 걸 확인한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천아, 너는 이 사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아이였구나.”
오른손을 들어 품 안을 뒤적거렸다.
안에서 고이 접어 둔 서신 한 장이 나왔다.
제자에 대한 소문이 막 퍼져 자신이 있는 무림맹 지부로 왔을 무렵, 전서응이 날아왔다.
처음엔 무언가 임무에 관련된 건 아닌가 하고 확인했지만 전혀 아니고 사적인 일이었다.
죽었다고 알려진, 자신의 제자가 발신자였다.
서신의 내용은 상당히 많았다.
축약하자면 자신은 무사하나 당분간은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며, 제갈승계와 함께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겠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걱정되니, 너무 늦지는 말거라……”
유정목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 * *
옹안, 금의상단.
이의채가 옹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보니, 아예 집을 구매하였다.
옹안의 집값은 의심될 정도로 저렴했다.
옹안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마당 앞에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모였다.
열 명이었다.
주서천은 이곳에 들어올 때 그들을 확인했다.
아홉 명이 이류 정도의 수준이었고, 딱 한 명이 절정에 가까운 일류였다.
“실력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비고에 대한 건 후에 어차피 알려질 터이니 상관없지만, 재물을 들고 도망치지 않아야 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의채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상단주님의 혈연이라서 믿어도 된다, 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런 거라면 사양합니다.
보물 때문에 친형제도 죽이는 세상 아닙니까.”
“저 그렇게 어수룩한 놈 아닙니다, 대협.”
이의채가 걱정 말라는 듯이 말했다.
“밖에 있는 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뿐 입니다.
또한, 가족 중에서 부양해야할 사람이 한 명씩 있습죠.”
“설마, 그 가족을 인질로 삼은 건 아니겠죠?”
제갈승계가 찌푸린 인상으로 물었다.
“어이쿠, 제갈 공자. 전 그렇게까지 악한이 아닙니다.”
이의채가 손사래를 쳤다.
“전 그들과 거래를 했습니다.
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의원의 진찰과 치료를 무료로 해 주겠다고요.”
사람이란 건 , 때때로 각자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뭐든지 할 때가 있다.
이의채는 그 사랑을 이용했다.
“일부러 제 지원이 없다면 채 며칠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한 자들만 찾아봤습니다.
또한, 그들의 인성도 사전에 조사해 두었습니다.
재물이 생겨 그걸로 가족들과 야반도주할 경우는 빼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주서천은 이의채의 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협박은 아니었으나, 잘 생각해 보면 협박이나 다름없다.
‘네가 배신하면 가족이 죽을지도 모른다.’ 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악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애초에 남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이의채가 비싼 돈 써가면서 의원을 불러서 돌봐줄 의리는 없다.
이의채는 어디까지나 협박이 아니라 제안한 것뿐이었고, 그걸 받아들인 건 그들 장본인들이니까.
‘소문대로 사람 다루는 것도 귀신같군.’
거래에 뛰어나다는 건, 곧 협상도 잘한다는 의미다.
상왕은 사람의 의도를 귀신같이 눈치챘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최대한으로 이득을 취했다.
이 대상은 정파건 사파건 마교건 혈교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세력이건 가리지 않았다.
괜히 전란의 시대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다.
‘그렇기에 또 무서운 사람이기도 한 거지.’
이의채는 사람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잘 알고 있어야 그걸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어서다.
그 이해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다.
조롱도, 비웃음도, 분노도, 동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정말로 순수하게 돈벌이로 쓰는 것뿐이었다.
“무사들에게는 무덤을 도굴할 예정이라고 미리 일러두었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별말 없이 명령을 따라야 할 고수라고 했습니다.
대협이나 제갈 공자의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니 정체를 들킬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잘했습니다. 비고는 중경에 있습니다.
자세한 위치는 여기에 있으니, 근처 마을에 사람을 보내 두십시오.
돌아갈 때 빠르게 연락할 수단이 필요합니다.”
주서천이 암호로 된 지도를 건냈다.
“그리고 이건 암호 해독법입니다. 다 외우시고 불태우십시오.”
“오오, 과연 대협이십니다!
제갈공명의 뺨을 후려칠 정도로의 지식!
그야말로 문무양도(文武兩道)군요!”
이의채가 과장스레 감탄하면서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캬하! 이 소상. 너무 감탄해서 눈물이 절로 나올 것 같습니다요!”
“그럼 우세요.”
“남자라는 건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이의채가 여비가 든 돈주머니를 건냈다.
“대협의 여행길, 제가 옆에서 뒤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삼안신투의 뼛속까지 털고 오십시오. 물론 뼈보다는 재물이 먼저인 건 알고 계시겠지요?”
“상단주, 침부터 닦고 말하십시오.”
“헛! 이런, 실례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 * *
주서천은 제갈승계, 그리고 이의채가 내준 무사 열 명을 데리고 중경으로 떠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경은 주서천과 제갈승계의 탐색으로 정파인들이 가득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수적들도 보이지 않았다.
적림십팔채에서도 당분간은 노략질을 자중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저기의 이제 막 털 난 어린애를 믿으라는 거야?”
비고행(秘庫行)이 시작되기 전, 무사들은 주서천을 처음 봤을 때 어이없어했다.
상단주가 고수라고 소개한 사람이 이제 막 성년에서 벗어난 정도였다.
중원에서의 성년은 십오 세.
아직 청년이라 부르기에도 부족한 나이였다.
만약 주서천이 사실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면, 경기를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쉿, 입 다물어라. 아무래도 정말인 것 같으니까.”
십 인의 무사 중, 유일하게 일류에 오른 무사가 검지를 들어 입가로 옮겼다.
조용히 하라는 손짓이었다.
고수는 하수를 알아본다.
하지만 반대로 하수는 고수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왕 형?”
왕 형은 일류 무사, 왕일을 말한다.
왕일은 이름이 조금 촌스럽긴 해도 절정에 가까운 일류 무사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자라 나름 존경도 받는 자였다.
그만큼 따르는 자도 많다.
“그냥 무인이 아닌 건 아닙니까?”
일반인들은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지도 없으니 알아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너희도 주 대장의 걸음절이나 빈틈없는 자세를 똑똑히 보았을 텐데?”
“으흠”
“자존심 때문에 눈을 돌리지 마라.
그리고 설사 그가 고수가 아니어도 우린 명령에 따라야 한다.
옹안을떠나기 전, 상단주님께 그리 듣지 않았는가?”
“죄송합니다, 왕 형.”
“나한데 사과할 필요는 없네.
나중에 잠시 쉴 때, 주 대장께 가서 사과하게나.
자칫 잘못하면 상단주님이 우리를 나쁘게 볼 수도 있으니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