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도수창병 (逃水槍兵)
이의채는 주서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세상에, 삼안신투의 비고라니!
두 귀를 의심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제가 복용했던 수령선과도 원래는 수중동굴이 아니라 비고에서 발견한 겁니다.”
주서천은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이의채가 조금이라도 믿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삼안신투의 비고 자체가 워낙 허무맹랑해서 이렇게 거짓으로 꾸며야만 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이의채는 침음을 흘렸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흔들림 하나 없는, 그야말로 확신을 지닌 눈이다.
빨려 들어갈 정도로 정직하고 깨끗했다.
생각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이의채는 믿음은 잠시 내려 두고,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비고의 존재 유무는 그렇다 쳐도, 그 많은 보물들을 어떻게 사람들 몰래 옮기실 생각입니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삼안신투의 비고에 잠들어 있는 보물은 결코 적지 않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건 유출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동원할 사람들이었다.
사람이란 건 눈앞에 놓인 재물에 약한 법이다.
태도를 뒤집으면서 강도로 돌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뒤통수를 치지 않을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을 동원하는 게 제일 확실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의채에게 돌아오는 것은 분명 적다.
아니, 애초에 자신을 끼워 줄지가 의문이었다.
“저희의 힘만으로 보물들을 전부 갖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화산의 연화각원인 대협께선 몰라도 한낱 소상에 불과한 제 목은 강도들에 의하여 필시 날아갈 겁니다.”
“전부 챙길 필요 없습니다.”
“하오면……?”
“소수라도 괜찮으니 믿을 수 있는 자로 몇 사람만 수소문하여 구해 오십시오.
그럼 제가 그들과 함께 비고로 들어가서 최대한 값진 것만 챙겨 오겠습니다.
그것들만 나눠도 충분할 겁니다.”
“과연”
원래는 그도 최대한 많이 운반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괜히 상왕을 찾은 게 아니다.
그가 아무리 전란의 시대에 활약했다 해도, 그럭저럭 수준의 상인일 거라 생각해서 그렇다.
그런데 그의 사정이 생각보다 안좋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다.
백에서 이백 명 정도는 통제하여 동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으나, 잘못됐다.
그래서 그를 보자마자 계획을 수정했다.
양을 최대한 버리고, 값진 걸 노리자고.
어차피 비고만큼 값어치 있는 자가 눈앞의 소상인, 아니 상왕이다.
상왕에게 부족한 건 자본이다.
자본만 있다면 알아서 승승장구할 터.
그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한다면 더 큰 이득이었다.
상왕은 돈에 환장하지만, 그만큼 거래 관계에서는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제안을 함구하고, 또 받아들이면 옹안의 군량을 금의상단이 맡을 수 있도록 손을 써 보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대협.
만약 비고가 정말이라 하면, 도대체 절 뭘 믿고 맡기려고 하는 겁니까?”
이의채의 눈에서 의아함과 혼란이 묻어났다.
“이보시오, 상단주.”
주서천이 바람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후원을 위해 필사적인 상단주조차 약조 받았는데도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누가 제 이야기를 믿겠습니까? 그런 겁니다.”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렇다.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아마 내일이나, 그 이튿날에 떠나게 될 겁니다.”
연화각원의 강호행은 그다지 길지 않다.
실전도 충분할 정도로 쌓았다.
잔류할 이유가 없었다.
“하겠습니다.”
이의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주서천의 말이 정말이라면 이건 대박이다.
게다가 굳이 삼안신투의 비고가 아니더라도, 옹안 군량의 상권을 내준다는 건 파격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본능이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외치고 있었다.
코는 아까부터 찌르는 전향(錢香)에 마비된 지 오래다.
술에 취한 듯 몸은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주서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 *
주서천은 이의채에게 계획의 일부를 전했다.
삼안신투의 비고에 대해서였다.
그가 정말로 믿는지 안 믿는지는 상관없다.
이득만 약조해 준다면,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이의채와 헤어진 뒤에는 곧바로 개양 지부로 돌아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신을 전서구로 날렸다.
수신자는 장탁.
옹안에서 함께 싸웠던 이류 무사의 이름이었다.
장탁은 생각보다 옹안 지부에서 지위가 높았다.
개안 분쟁에 출전했던 지부장의 오른팔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이번 일로 공적을 세워 곧 부지부장에 오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장탁이라면 부탁을 그냥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사시키려고 최대한 노력해 줄 것이다.
게다가 마음의 빛을 진 건 장탁 외에도 여럿 있으니, 여기에 관해선 굳이 걱정을 할 건 없었다.
오히려 걱정할 건 따로 있었다.
“내일 다시 화산파로 돌아갈 예정이니 채비를 하거라.”
연회도 끝났고, 화산파에서 귀환령도 떨어졌다.
이젠 돌아가야할 때가 됐다.
계속해서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장홍과 장서은은 아쉬워했다.
사대제자로서 규율 속에서 지내다가 맛 본 자유는 정말로 달콤했다.
위험천만하긴 해도, 그만큼 자유는 매력적이었다.
“소림사라거나, 무당파라거나, 안휘의 무림맹 본부는 보러 안 가나요?”
장서은이 구풍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올려다봤다.
남자라면 껌뻑 넘어갈 정도로의 귀여움이었다.
‘잘한다! 더 해라!’
주서천이 속으로 장서은을 응원했다.
하나 응원은 그다지 소용없었다.
구풍은 곤란한 듯 미소 지으면서 엄한 눈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도 좀 더 많은 걸 보여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구나. 내 심장이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아, 사백~”
장홍도 어리광을 부렸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연화각의 강호 출도는 원래 유람하듯이 경험을 쌓는 거지, 이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다.
이번 일이 워낙 예외였던 거지.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본산에서도 너희가 걱정된다며 돌아오는 게 좋을 거라는 의견이 나왔으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단다.”
강호행은 멈췄다. 꼼짝없이 귀환해야했다
‘세상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
원래는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틈을 보고, 화산파에 귀환할 때 즈음 이의채의 도움을 받아 비고를 털려 했다.
시간이 필요했는데, 최악으로 시간이 줄어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제갈세가에서도 귀환령이 떨어졌고, 비고가 위치한 중경까지는 함께할 수 있었다.
비고의 기관을 해체하려면 제갈승계가 필요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최소한의 거래가 있었으니, 상왕보고 따라오게 할 수는 없다.
중경에 가서 어찌어찌 비고를 털었다 해도 다시 귀주로 돌아와야 해. 하지만 어떻게?’
구풍에게 비고에 대해 알려 준다면 분명 화산파가 개입한다.
제갈상이 듣기라도 한다면 더 최악이다.
아니, 애초에 비고에 대해 믿을 리 없었다.
제갈승계를 데리고 몰래 빠져나가려고 해도, 초절정 고수인 구풍의 눈과 감각을 피하기에는 힘들다.
결국 주서천은 이 고민을 채 풀기도 전에 여러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귀주를 떠나게 된다.
귀향길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개양을 떠날 때 명마(名馬)는 아니나, 그에 못지않은 좋은 말을 받았다.
연화각에선 승마술도 가르친다.
괜히 영재 기관이 아니다.
화산에서 귀주까지 말을 타지 않은 건 보법과 경공의 수련 때문이지, 탈 줄 몰라서가 아니다.
제갈세가도 다들 수준급의 승마술을 보였다.
운동 능력이 영 꽝일 것 같은 제갈승계도 그럭저럭 탔다.
원래 집안 자체가 무공과 내공이 낮다 보니, 특히 내공이 많이 소모되는 경공에는 알맞지 않아 승마술을 수련한다.
여러 마리의 말이 먼지구름을 내면서 달렸다.
도합 열여덟 필이었다.
화산파 넷, 제갈세가 넷, 그리고 신도균이 호위로 내준 무림맹 개양지부 무사들 열이었다.
일행은 식사, 수면 시간 때나 정말 지칠 때를 빼곤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 덕에 귀주를 일찍 넘어섰다.
가끔 화적들이 보인 것 같았으나 딱 봐도 보통이 아닌 기세를 내뿜는 일행을 보곤 곧바로 도망쳤다.
주서천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구풍의 시선만으로도 성가신데 호위라는 이름의 감시자들이 붙었다.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 * *
사도천.
“천주(川主)님, 십사검협이 곧 있으면 장강에 도착할 거라는 소식입니다.”
사도천의 총관, 악관태가 보고를 올렸다.
“왔나.”
사도천주가 독사를 연상시키는 눈을 떴다.
불쾌함과 분노가 뒤섞인 살의가 내뿜어졌다.
“옹안을 습격했다가 도망친 머저리들을 참수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데, 어딜 멀쩡히 돌아가려 하는가.”
개안의 일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니었다.
원래 그쪽 지역은 싸움이 밥 먹듯이 일어나곤 했다.
주인이 바뀌는 것도 심하면 하루에 열 번 이상이다.
어디까지나 일상에 불과하니 그렇게까지 화가 날 만한 일은 아니다.
“평소처럼 패배한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걸세.”
패배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너무 자주 일어나서 패배해도 그러려니 하고 다음을 준비한다.
하지만, ‘완패(完敗)’라는 두 글자는 문제가 됐다.
천주가 직접 준비한 건 아니지만, 개안 분쟁은 나름대로 사도천에서 신경을 썼다.
총관인 악관태도 조금은 관여하여 양동 작전을 검토했고 승인했다.
옹안에 도착한 십사검협이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개안으로 향해 참전한 것 자체는 예상했다.
그러나 빈집이 된 옹안을 정복하지 못한 건 문제가 됐다.
성공했다면 인질을 이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완패하게 됐다.
그 결과가 치욕과 분노를 불러들였다.
주서천의 행동이 결국 일어나지 않았을 미래를 바꾸게 됐다.
옹안이 정복당하고, 붙잡힌 인질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안에서 후퇴를 해야했다.
하지만 미래는 바뀌고 또 다른 미래를 가져오게 됐다.
“화산파의 애송이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라.”
사도천주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 * *
장강, 포구.
“흠?”
구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사검협, 무슨 일이오?”
제갈삭이 그런 구풍을 보고 의아한 듯이 쳐다봤다.
“아, 다른 게 아니고 배의 숫자가 좀 적지 않나 싶어 의아해하고 있었소.”
구풍의 말에 제갈삭이 포구 주변을 슥 둘러봤다.
확실히 배가 적긴 적었다.
특히 편주처럼 작은 배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의아스럽긴 하지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오.
원래 이 시기에는 장강에 풍류를 즐기러 오는 자들로 붐비니까 말이오.
또한 우린 인원이 많으니 별로 상관없지 않소? 하하.”
제갈삭이 수염을 매만지면서 껄껄 웃었다.
일행은 편주가 아니라 오십 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중선(中船)에 탑승했다.
나눠서 편주에 타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호위로 따라온 무사들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연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옹안에서의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게 아닌가 싶구려. 들어가서 쉬는 건 어떻소?”
“그 정도는 아니외다.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고맙소.”
구풍도 자신이 너무 민감했다면서 넘겼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주변 경치를 즐겼다.
비록 손에 술을 쥐지는 않았지만 장강을 즐기기에는 충분한 경관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줄줄이 늘어선 기암절벽은 목을 늘어뜨려야 전부 눈에 담을 수 있고, 그 위에 자리한 울창한 수풀은 인세가 아닌 다른 세상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강호에 나와 장강을 보았을 때는 입을 떡 벌리고 구경했다.
이.대자연에 압도되어 심신이 굳었었다.
이제는 그럭저럭 익숙해져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 봐도 장강의 풍치는 대단했다.
머리를 내밀어 배 밑의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 물속에서 춤추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
강물을 내려다보며 추억을 되새기던 구풍의 눈이 순간 찢어질 듯 크게 확장됐다.
“무림맹 무사들은 들어라!”
스릉.
구풍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이 매끄럽게 뽑아져 나왔다.
검면에서 거칠고 예리한 기세가 내뿜어졌다.
“당장 연화각원과 제갈세가를 호위해라!”
“십사검협……?”
제갈삭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뭐라 묻기도 전에, 무림맹 무사들은 약속이라도 된 듯 동시에 움직여 호위진을 펼쳤다.
“흥! 과연 십사검협, 눈치 한번 빠르구나!”
제갈삭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기암절벽 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울창한 수풀이 움직이나 싶더니 청의인(靑衣人)들이 나타났다.
“올라타라!”
공중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첨벙, 첨벙!
“헉!”
무림맹 무사 중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이 갑작스레 위로 솟구치더니만, 병장기를 쥔 험상궂은 사내들이 배에 올라탔다.
그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대충 세어 봐도 족히 삼십에서 사십은 되어 보였다.
“이, 이런!”
“흔들린다!”
중선에 오를 수 있는 인원은 많아봤자 육십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니 중심이 흔들렸다.
수림구채!
제갈삭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장강에서 수영할 수 있는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물살이 워낙 변화무쌍해서 그렇다.
아니, 애초에 수면 아래 잠수한 채로 배를 따라오려면 수공을 연공한 자여야 한다.
장강에서 수공을 연공한 무인들은 수적 외에 없다.
“만약 배를 잘못 찾은 거라면, 그냥 넘어갈 터이니 당장 내리도록 하시오.”
구풍이 소매 안의 매화를 슬쩍 보여 주면서 나지막이 경고했다.
“하하 내가 그대와 구면인데 잘못 찾았을 리가 있겠소?”
무단으로 배에 승선한 수적들 중에서 체구가 제일 장대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대는……”
얼굴에 가득한 흉터.
이러한 특징을 지닌 자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이름은 그때 대지 않았으니 모를거요. 육대랑이라 하오.
얼마 전에 받은 품삭은 고마웠소. 흐흐.”
육대랑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흉악하게 웃었다.
“아! 그때의 그 수적!”
장홍이 육대랑을 알아봤다.
그제야 구풍이나 장서은, 주서천도 그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중경에서 처음으로 장강을 건넜을 때 만났던 수적의 우두머리였다.
“유, 육대랑이라 하면……”
제갈삭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하백대고수, 도수창병(逃水槍兵)!”
그리고 제갈상이 그다음 말을 이었다.
“흐, 오대세가의 자존심 높은 양반께서 날 알아봐 주니 정말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로군.”
육대랑이 음침하게 웃었다.
그 반응이 일행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특히 무림맹 무사들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감돌았다.
육대랑은 등에 멘 장창을 꺼내서 휘리릭 돌린 다음 지면을 쿡 찔렀다.
그러자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리던 배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진짜다.’
구풍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도수창병께서는 이 배에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오른 것이오?”
“무슨 볼일이냐고? 크하하!”
육대랑이 고개를 뒤로 꺾듯이 젖혀 웃었다.
결코 유쾌해 보이는 웃음이 아니었다.
“수적에게 남의 배에 무슨 일로 올라탔냐고 묻다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겐가.”
육대랑의 말투가 변했다.
목소리에서 싸늘함이 느껴졌다.
“도수창병, 미친 게냐!”
제갈삭이 호위들 사이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좌중의 시선이 제갈삭으로 옮겨졌다.
“미쳤다고?”
“화산파와 제갈세가의 미래들이 있는 자리를 습격하다니, 결코 무사히 끝나지는 않을 게다!”
“허, 과연 제갈세가인가. 누굴 모함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구나.”
육대랑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잘 들어라. 우리는 수림구채. 장강의 수호자다.”
육대랑이 입술을 혀로 적셨다.
“예로부터 장강을 건너려면 수호자들에게 통행세를 내는 것이 관례였지.
하나, 우릴 도적 떼라면서 모함하며, 품삭을 내지 않은 건 너희가 아니더냐.
시비를 건 것은 애초에 너희가 먼저였다.”
“하? 그게 뭔 헛소……”
제갈삭이 말을 이으려다가 말았다.
육대랑이 웃고 있는 걸 보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했다.
“제일 먼저 반발한 건 연화각과 제갈세가의 건방진 아이들이 아닌가.
그 아이들이 먼저 갑자기 수적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면서 검을 겨누지 않았나.”
육대랑이 창을 들어 호위의 중심을 가리켰다.
“숙부. 아무래도 모종의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놈들은 저희를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제갈상이 허리춤에 매단 검을 매만졌다.
도움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포구에 배가 없었던 건……그런 거였나.”
구풍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강호 초출에 혈기만 앞서, 무림세력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실수하는 건 ‘자주 있는 일’ 아닌가?”
육대랑이 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부터 시작해서 팔뚝, 어깨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나 장강은 수림구채의 영역.
이곳에서 네놈들이 문제를 일으켰으니, 수호자로서 장강의 법과 평화를 지킬 뿐일세. 하하하!”
육대랑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살려 보내지 마라!”
“케헤헤헤!”
수적들이 몸을 날렸다.
* * *
“엥?”
당황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주서천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제, 내 뒤로 숨어!”
장홍이 그래도 사형이라고 앞에 나섰다.
“수란아! 승계야!”
제갈상도 동생들을 뒤로 숨겼다.
주서천, 제갈수란, 제갈승계 세 명이 제일 중앙에 숨었고 그 주변을 제갈상과 장홍, 장서은이 둘러쌌다.
마지막으로 무림맹의 무사들이 호위진을 펼쳐 막았다.
하나같이 필사의 각오가 느껴졌다.
‘도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중선에 승선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끝났나 싶었다.
제갈승계를 데리고 배 밖으로 몸을 던져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한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도수창병과 싸웠다면 내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던가?’
천하백대고수는 시대에 따라 자주 바뀐다.
전란의 시대에는 특히 그랬다.
너무 빨리 바뀌어서 정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천하백대고수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한 자가 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도수창병 육대랑이다.
육대랑은 원래 관군 출신의 수병(水兵)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상관과 싸우다 화를 참지 못해 살해했고, 이후 상관 살해로 수배가 내려져 도주했다.
도주 생활 중 어쩌다 보니 수림구채에 투신하게 됐다.
원래는 잠깐 몸만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수적 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잘 맞았다.
여기에선 지랄 맞은 성격을 참을 필요도 없었고, 또 육대랑은 원래 무공이 강하다 보니 금세 높은 자리에 올랐다.
육대랑은 그대로 눌러앉아 수적이 됐다.
육대랑을 기억할 수 있었던 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수림구채 자체에 고수가 그다지 많이 없던 것이요, 둘은 육대랑이 장수해서 그랬다.
수림구채는 관부도 어찌할 수 없고 성가셔하는 세력이었다.
토벌하려면 힘이 필요한데, 현(現), 명(明)나라의 관군은 오랫동안 북방의 오랑캐를 상대하느라 육군에 집중되어 수군이 약했다.
강화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수군이라 해봤자 장강 정도이고, 장강은 나라 안에 있다.
차라리 중원 밖 서역을 경계하는 편이 나았다.
여하튼 이렇다보니 수림구채를 토벌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장강에서 나가지 않는 육대랑은 잡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수공이라는 특징 덕에 육대랑은 장강 위에서만큼은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최상위가 아닌가.
현실적으로 그를 잡으려면 수많은 시간과 병력이 요구되어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구풍이 그런 유명인인 육대랑과 싸웠다면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었다.
아예 기억이 없는 건 이상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다!’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머릿속에서 추측들이 빛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크아악!”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금속음에 주서천은 잠시 생각을 접어 두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한가하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보아하니 다른 수적들은 약해 보였다.
잘 쳐 봤자 이류 정도다.
애초에 도적들이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겠나.
도수창병의 등장에 다들 겁을 먹어서 그렇지, 수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채채채챙!
“크읏!”
“하하하하하!”
문제는 구풍과 육대랑이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구풍이 벌써부터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백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다.’
애초에 수공이란 건 수중, 그리고 배 위에서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육대랑이 유리한 건 당연했다.
무엇보다 그는 수병 출신으로 거의 반평생을 배 위에서 살았다.
그에 반면 구풍은 배의 흔들림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기도 했고, 선상 위 싸움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육대랑이 약했다면 이길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천하백대고수가 아닌가!
‘도와야 한다.’
주서천이 검을 쥐었다.
여기에서 진짜 실력이 발각되는 건 상관없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목이 날아갈 상황이었으니까.
‘여기에서는 죽을 수 없다!’
주서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으아악!”
풍덩!
생각하는 사이, 무림맹 무사 한 명이 수적들에게 몰려서 배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여자는 죽이지 마!”
“홀홀홀, 고년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구나!”
추악하게 일그러진 시선이 제갈수란에게로 향했다.
여태껏 무감정했던 그녀조차도 그 시선에는 몸을 흠칫 떨며 기분 나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기헤헤!”
수적이 빈틈을 파고들며 손을 뻗었다.
그 목표는 제갈수란이었다.
“안 돼!”
제갈상이 검의 방향을 급히 바꿨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수적의 손이 더 빨랐다.
‘이대로 물속으로…… 어?’
수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갈수란의 고사리 같은 손목을 낚아채려던 자신의 손이 안 보였다.
“이게 뭔…… 커헉!”
수적이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명치 부근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제……?”
장서은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서천을 쳐다봤다.
주서천은 검을 털어 내며 피를 바닥에 흩뿌렸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