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章등하불명(燈下不明) (39/254)

第二章등하불명(燈下不明)

연회는 하루로 끝나지 않고 이틀 동안 이어졌다.

첫 하루는 오롯이 무사들을 위해서였다.

외부에서 귀찮게 굴지 않도록 방문을 금하고, 그들끼리 모여 축배를 들고 하루를 지새웠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는 상인이나 낭인 등의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방문 목적을 말하시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서요.

십사검협 대협에게 선물을 전해 주고 싶어 왔소.”

초절정 고수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화산파 같은 대문파에 소속된 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자에게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그 무엇보다 더 큰 이득이다.

또한, 구풍뿐만 아니라 제갈세가나 연화각원들과도 운이 좋으면 미리 연을 만들 수도 있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필시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그걸 노리고 조금이라도 쉽게 기억되기 위해 갖가지 재물을 챙겨 왔다.

어떤 이들은 고향에서 미색이 뛰어난 여아들을 데려왔다.

혹시라도 제갈세가에 시집이라도 갈 수 있다면, 그 날로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다.

화산파도 애매하긴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요직에만 앉지 않는다면, 자식도 낳는다.

다만 피붙이에게는 재능이 어떻건 간에 정식 제자만큼 무공을 전수할 수 없다.

속가제자에 한해서다.

화산파가 무당파에 비해 속가적인 성향이 있다 해도, 그래도 아예 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여러 제한이 붙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제한이 붙어도 혼례를 올리는 일이 전무하지 않고 가끔 있기는 하다.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려고 온갖 재물을 보이며 노력했다.

“오늘은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해 알려 주마.”

구풍이 연화각원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기껏 화산파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제자가 재물이나 여색에 눈이 멀어 누군가에게 넘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사랑에 빠지는 건 자유지만, 아이들이 뭘 알겠는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뻔히 보이는 수작에 걸려드는 건 문제였다.

이를 위해서 구풍은 귀찮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상대했다.

연화각의 사형제들은 구풍의 뒤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이름과 나이 정도만을 소개했다.

“선물을 받되, 요구나 비슷한 말을 듣게될 경우에는 거절하는 게 좋다.

또한, 도사에게 재물욕이란 건 금물. 어디까지나 성의 수준으로 받아라.

선물이 누가 봐도 과할 경우, 보는 눈이 달라질 데니까.”

“알겠습니다.”

“또한 어조에 조금이라도 약조한다는 게 있다면 이 또한 피하도록 하여라.

우리처럼 정파인에게 약조란 건 은원만큼 중요하고 또 무거우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장홍과 장서은은 구풍의 말에 집중하며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

주서천은 듣는 척만 했다.

그는 원래 화산오장로였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관해선 이골이 났을 정도다.

전생에선 반대로 누군가와 싸우는 것보다 대화하는 게 익숙할 정도였다.

“흠, 확실히 사백이 난 사람은 난 사람이야.’

무공도 무공이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초절정이다.

빈틈 하나 없이 훌륭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 사천에서 온……”

“화산파의 연화각이군요.

얼마 전에 개안에서 활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당파의 무룡관을 치켜세우지만 역시 연화각이 아니겠습니까?”

“화산파의 검에 다시 한번……”

하루에 수십, 수백 번 이상의 칭찬이 쏟아졌다.

장홍과 장서은도 처음에는 그 칭찬에 뿌듯해하는 눈치였으나, 계속 반복되자 점차 지쳐 갔다.

방문객들은 상인과 낭인 외에도 귀주의 정파에 속하는 중소 문파들도 많았다.

문주 정도 되는 인물이 아들이나 딸을 데려와 소개하기도 했다.

‘어디에 있는 거냐.’

한편, 주서천은 장홍과 장서은, 심지어 구풍조차도 지쳐 가는 사이에도 오직 한 사람만을 찾고 있었다.

낭인과 중소 문파의 문주들은 대부분 무시했다.

이름만 대충 듣고 머리를 비우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상인들이 찾아올 때만큼은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집중했다.

‘분명히 여기에 와 있을 거다.’

상왕, 이의채!

별호와 이름을 속으로 외쳤다.

상왕은 이맘때 즈음, 분명 귀주에 있었다.

자본조차 부족한 상인이라, 후원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굳이 위험한 귀주에 와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위험한 만큼 후원자로 삼을 만한 무림인들이 많이 온다.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명만이라도 걸린다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제기랄 당신을 도우려고 준비도 했단 말이오.

이제 좀 내 앞에 나타나시오.’

중천에 떴던 해도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있으면 방문객의 발걸음도 끊긴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밤에 몰래 나가서 방문객들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구풍은 옹안의 일로 주서천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더욱 신경을 썼다.

‘설마하니 제갈세가로 간 건 아니겠지?’

확실히 제갈세가도 개안 분쟁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구풍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이득을 철저히 따지는 상왕이라면 분명히 이쪽을 방문할 거라 생각했다.

거의 확신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이의채는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주서천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헤헤헤, 안녕하십니까. 또 이렇게 뵙는군요.”

해가 거 의 다 질 때 즈음,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방문했다.

허리와 머리를 과할 정도로 숙이고, 눈초리도 어딘가 모르게 비굴해 보였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소상, 이었나. 일단 저자는 절대 아니군.’

개양에 도착했을 때, 심하다고 말할 정도로 비굴했던 호객꾼이었다.

어쩌면 상왕이 개명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전생에서 들었던 상왕의 특징들을 기억해 내 나열해서 대조해보기도 했다.

상왕은 돈에 대한 집착이나 탐욕만큼, 지방 또한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또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라, 설사 무림맹주 앞이라 해도 굽히지 않았다.

그 태도가 오만하고, 또 상인 주제에 건방지다면서 무림에서 정사할 것 없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적어도 소상처럼 과할 정도로 비굴하며 또한 평범한 체구인 자는 상왕이 아니다.

주서천은 금세 관심을 끄면서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이렇게 된 거, 다 끝나고 방명록을 확인해 봐야겠다.’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제갈세가로 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곤란해진다.

이렇게 된 거 방문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빌었다.

“과연, 대화산파의 제자분들이십니다.

얼마 전에 소식을 듣고 이 소상, 탄복하였습니다.

자고로 검이라하면 화산파이고 구파일방 중 일파라 하면 화산……”

소상이 서론만 주야장천 꺼냈다.

전부 구풍이나 화산파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노골적이고 속이 뻔히 보여서 도리어 피곤하기만 했다.

“이보게, 소상. 미안하네만 오늘은 이걸로 하고 슬슬 일어나도 되겠나?

내 오늘 너무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서 그러니, 부디 이해해 줬으면 하네.”

결국 구풍도 참지 못하고 소상의 말을 끊었다.

“그, 그러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소상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마치 ‘준비한 것이 많은데 이리 돌아갈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눈에서는 필사적인 감정이 묻어났다.

“미안하네. 이만 들어가 보게나.”

구풍이 명백한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입구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움직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에게 기가 막힌 사업이 있습니다.

일각, 아니 반 각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

“저런 자는 그냥 혼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구풍도 피곤해하는데 장홍이라고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상당히 짜증을 내면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이리 와!”

“이 미친놈아, 네 처지를 좀 생각해야지!”

방문객들 중에서도 수준이 있다.

명성도에 따라 방문 순위가 바뀐다.

순서가 늦는다는 건, 그만큼 별 볼 일 없다는 뜻이다.

무사들도 그 점을 알고 소상을 거리낌 없이 끌어냈다.

“놔, 이것들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개양 지부 무림맹 무사다!”

“에잉, 쯧쯧.”

무사들이 혀를 차면서 소상을 끌고 갔다.

“금의상단!”

멈칫

구풍을 뒤따르던 주서천이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장홍과 장서은, 구풍이 떠나는 등이 보였다.

‘설마.’

세상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청각에 온 내공이 집중됐다.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말이 메아리쳤다.

주서천은 방명록에 대한 걸 모두 지워 버린 뒤,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탐욕과 필사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눈.

도인이 본다면 혀를 찰 정도로 탐욕에 찬 눈.

어째서인지 그 눈이 금색으로 보였다.

“소상인(小商人)은 금의상단이라하여 자그마한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이름은 이의채라 하여……”

그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주서천은 그가 끌려 나가는 걸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바람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하더니, 설마하니 이미 만났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 * *

살이란 건 곧 풍족함을 뜻한다.

가진 게 많은 자일수록 뚱뚱하다.

대상인들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의채는 가진 게 많기는커녕 부족하다.

후원자를 찾고 있는데 과소비를 할 리가 없었다.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과식한 것도 아니었다.

살이 많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성격 또한 사정이 있었다.

전생에서 상왕에 대한 걸 알게 됐을 때 즈음, 이의채는 이미 건드리기에 부담스러운 인물이 됐다.

설사 이의채가 멸시를 받을 정도로 비굴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해도, 그걸 말했다간 후환을 장담하지 못한다.

비밀에 부쳐진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의채의 과거는 전생을 기준으로 해서 약 육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과거가 그대로 알려진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실수다.’

이의채처럼 훗날 전란에 살아남고, 승리자가 된 사람들은 과거가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화산오장로에 올라도 모를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미래에 대한 정보를 너무 과신한 것에 주서천은 자책하면서 반성했다.

이튿날. 연회가 끝났다.

이의채는 다시 방문했으나, 구풍은 당연하게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방문 일정은 끝나 있었다.

몇 번이나 간곡하게 요청하였으나, 무림맹 무사들이 돌아가라며 경고한 탓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녕하시오, 상단주.”

이의채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마주하게 된다.

“주, 주서천?”

이의채가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곤 이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주 대협. 제가 놀란 나머지 그만 실례했습니다.”

대협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색함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한데, 저에게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혹시나 십사겸협께서……?”

이의채의 눈에 일말의 기대감이 어렸다.

“아닙니다.”

주서천이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습니까……”

이의채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그 눈에는 기대감 대신 절망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제가 볼일이 좀 있습니다.”

주서천이 엄지와 검지, 중지를 문지르며 씩 웃었다.

“그게 무슨……?”

이의채가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일단 자리 좀 옮기죠.

여기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무언가가 있다!’

이의채는 본능적으로 주서천의 볼 일이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돈 냄새다!’

후각부터 시작해 온몸의 감각이 알리고 있다.

드디어 기다렸던 기회가 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가 봤을 때,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주서천은 결코 보통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확실히 연화각원이란 건 일단 보통이라는 범주를 넘었다.

하지만 주서천은 그중에서도 더 특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에 의하면 주서천은 고작 열두 살.

외관이 열다섯처럼 보이는 건 그렇다 쳐도 그 성숙한 정신과 몸에서 풍겨 오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도저히 열둘로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속에 농구렁이를 품은 중년 혹은 노인으로 보였다.

걸음걸이에서도 기품이 언뜻 보이고, 몸짓이라거나 자신감 있는 시선과 기도도 보통이 아니었다.

‘분명 저번에 봤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내가 놓친 게 아니야. 그가 숨기고 있던 거다.’

과연, 훗날의 상왕.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빨랐다.

이의채는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자리를 따로 마련했다.

“괜한 서론은 내버려 두고 본론부터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 상단주께서도 굳이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서천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크, 크흠 말을 편히 하셔도 됩니다.”

이의채는 주서천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호의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대부분 무림인들은 나이가 어려도 건방지다.

자존심이 세서 그렇다.

특히 대문파의 제자는 더 그렇다.

이의채는 그동안 무인들에게 많은 무시를 받았다.

그런 입장에서 주서천의 행동은 상당히 감명 깊었다.

“괜찮습니다. 원래 거래라는 건 신뢰와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주서천의 속으로 미소 지었다.

상황이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훗날 상왕으로 불리게 될 이의채는 결코 자신의 아랫사람이 아니다.

그건 두 번째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왕은 정파와 사파, 마도이세, 심지어 숨어 있는 세력과도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살아남은 자다.

그의 재능은 진짜다.

앞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면 상하 관계보다는 동등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

상하 관계는 자칫 잘못하면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 있으니 위험 부담이 컸다.

“한데, 본론이라 하면……?”

“사백께 제의했던 사업.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 ……”

주서천의 말에 이의채가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흐음……”

이의채는 이제 막 다듬기 시작한 수염을 매만졌다.

고민, 아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주서천은 그런 이의채의 반응에 속으로 흡족해했다.

‘좋아. 이걸로 단순한 바보는 아니란 걸 깨달았어.

조금 불안했었는데…… 다행이야.’

이 상황을 의심 하나 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상은 제가 생각해도 별거 없는 놈입니다.

그런데 뭘 믿고 제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또한, 보아하니 십사검협이나 다른 연화각원에게도 비밀로 하고 몰래 오신 듯한데……”

이의채는 혹시나 주서천이 자신을 놀리거나, 아니면 어떤 음모에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물론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뭘 하겠냐 싶겠지만, 어쩌면 뒤에 꾸미기 좋아하는 제갈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소상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까지 노력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 역시 제안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안?”

“예. 다만, 그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상단주의 사업부터 듣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의아스럽긴 해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사실, 사업이라고 해도 눈에 띄려고 그리 말했을 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주서천은 이의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의채는 주서천의 눈치를 보면서, 그 얼굴이 굳지 않은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저희 금의상단에서 주로 취급하는 건 미곡입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상품이죠.

그러나 전 이 미곡을 군량으로 팔아치울 생각입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이의채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만큼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

“요컨대, 전쟁 상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거로군요.”

“허, 그렇습니다.”

이의채가 짐짓 감탄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머리 회전이 어찌나 이리도 빠른가.’

상계와는 거리가 먼 무림인이다.

고위 요직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그는 성년도 되지 않은 남아이다.

한데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귀신같이 맞추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서천의 경우 원래부터 알고있었던 것이지만 그걸 이의채가 알 리가 없었다.

“재정적인 후원이 필요한 것인지요.”

“그래 주신다면 감사합니다만, 실례하오나 ……”

이의채가 주서천의 눈치를 봤다.

“네, 아쉽게도 재정적인 면에선 후원하기가 힘듭니다.

아이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주서천이 쓴웃음을 흘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의채가 침을 꿀꺽, 하고 삼키곤 답했다.

얼굴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으나 상관없다는 게 묻어났다.

“재정적인 것 외에도, 후원해 주실 건 많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오… 조금은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협께서는 일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이의채는 긴장된 기색으로 역력했다.

그는 탁자 위에 올려 둔 물을 한 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연줄이 필요합니다.

어디건 개의치 않으니 군량의 거래권을 저에게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지닌 양은 대규모 정도는 아니지만, 중규모까지는 준비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림맹 등의 정파가 농사를 지을 리가 없다.

있긴해도 자기 입에 넣을 수준이다.

그래서 일정한 군량을 얻으려면 상인들에게 사야 한다.

대부분은 속가제자나, 혹은 정식 제자들의 혈족과 관련된 사람들을 통해서 자주 거래하곤 했다.

아무래도 거래되는 양이나, 오가는 돈이 적지는 않아서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다.

소개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의채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주서천의 얼굴을 몇 번이나 힐끗힐끗 살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를 반복했다.

주서천은 이의채가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말했다.

“화내지 않고 들을 터이니, 그냥 말해 주십시오.

전부 다 듣고 판단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이의채도 용기를 냈다.

“……대협께서는 아마 연화각원으로서 십사검협을 따라 개양 지부장이 자리했던 주요 회의에 참석했을 겁니다.

제 생각이 맞습니까?”

“예.”

“그렇다면, 아마 귀주의 분쟁 지역에 대해서도 대충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 그중 고립되거나 보급에 문제가 있는 곳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의채는 말을 끝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주서천이 어찌 반응할지 두려워서 그랬다.

이 요구 사항이 문제가 되는 건 열두 살, 아니 열 살이 된 어린아이라도 안다.

이의채는 상황에 따라선 기밀에 들어가는 정보를 대놓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 의도는 뻔했다.

보급에 문제가 되는 등 상황이 급한 곳을 찾아가 곡식을 팔아 해치우는 것이 더 돈이 돼서 그렇다.

‘하, 듣던 대로 탐욕이 장난이 아니로구나.

그나저나 원래 상왕을 도운 자도 정상은 아니었어.’

일화에 의하면 이의채는 군량이 필요한 곳을 귀신같이 찾아가서 값비싸게 넘겨 많은 돈을 벌었다.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정보처가 있다는 뜻이다.

그건 결코 올바른 행위라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상왕 자체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괜히 상단의 이름이 금의겠는가.

오롯이 돈에만 뜻을 둔 자. 이 정도는 예상했다.’

오직 돈과 탐욕만이 원동력이다.

정파와 사파의 신념도, 마도이세의 광기와 잔악무도함도 없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방금 전의 대화로 확신하게 됐다.

“전자의 경우, 도울 수는 있습니다.

다만, 연결해 준다고 해 봤자 옹안 정도입니다.”

옹안 지부 자체는 주서천에게 빚을 졌다.

게다가 주서천은 연화각원. 그 정도는 처리해 줄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의채의 얼굴이 화색으로 물들었다.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옹안은 귀주 지역 중에서도 최전선이다.

그만큼 보급도 잦다.

돈이 되는 최상의 지역이었다.

“하나 후자의 경우,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절입니다.

이유에 대해선 아시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상왕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해도, 선이 있다.

만약에라도 정보를 넘긴 게 알려지면 아무리 연화각원인 자신이라도 무사할 수 없다.

위험 부담이 너무 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이야기를 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미천한 자의 목이 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로군요.”

이의채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알고 계신다면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 하여도, 자기 앞일을 좀 더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라서 그냥 넘어간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검을 겨누었을지도 모릅니다.”

주서천이 경고했다.

말을 꺼내자마자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사안이라서 그렇다.

“저도 대협이기에 용기를 낸 것입니다.

이래 돼도 사람 보는 눈은 있습니다.

대협의 아량과 마음이 장강과도 같아, 적어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한 것이지요.

역시 대협이십니다.”

이의채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부를 했다.

목숨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굴함이 더했다.

“자, 그럼 이제 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삼안신투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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