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전생 1
수마(踊魔)에 사로잡혀 눈을 도저히 뜰 수가 없다.
힘을 내도 겨우 반개하는 것이 고작 그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
흙처럼 메마른 입술만 겨우 달싹거려 소리를 낸다.
하지만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장로…… 이렇…… 가시면……”
이미 시야는 안개처럼 희뿌옇게 일그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지만 귀가 멀어 뭐라 말하는지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주서천(奏緖川).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면서 삶을 되돌아본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고아로 떠돌다가 운 좋게 스승의 눈에 띄어 화산파로 입문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화산파라고 하면 정파의 명문지파인 구파일방(九派- 割)의 일파(派)이며 검(劍)으로 이름 높은 대문파다.
부모 잃은 고아 입장에선 이보다 더 운 좋은 일을 찾기가 힘들다.
이후 스승에게 감사하면서 화산파의 제자로서 살아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산오장로(華山五長老)까지 올랐다.
‘운이 좋았지.’
화산오장로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대문파인 화산파에서 장문인 다음으로 권위가 높은 자리이다.
이름이 무거운 만큼 쉽게 오를 수있는 자리가 아니고, 또 그만큼 다른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무공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지성을 필요로 하며 세간에서의 평가도 중요시한다.
강호에서의 명성과 더불어 실적 등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항렬이나 경험만으로는 결코 오를수 없지만…… 어디서나 ‘예외’라는 경우가 존재했다.
그 경우가 바로 자신이다.
‘설마하니 나 같은 놈이 장로가 될줄은 몰랐어.’
운 좋게 화산파에 들어왔으나, 그렇다고 딱히 특출한 재능을 보이면서 대단한 업적을 세운 건 아니다.
무재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머리가 비상했던 것도 아니다.
눈에 띄지 않고 남들과 비슷하게 살았다.
물론 피나는 노력조차 한 적이 없었기에 그 이상 바라는 것 자체가 크나큰 욕심이다.
애초에 그러한 욕구 자체가 없었지만.
그래도 고아인 자신을 거둬 준 스승에게 감사한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다.
정말로 ‘그럭저럭’ 살아온, 평범한 삶 그 자체였다.
하면, 어떻게 화산오장로가 될 수 있었던 걸까?
그 답은 ‘평온’하지는 않았던 삶에 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유독 전쟁이 많았다.
후세에 이르기를, 전란의 시대라 칭해질 정도로 많았다.
전쟁 발발, 휴전, 종전이 수십 년 동안 도대체 몇 번 이뤄진 것인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화산파도 그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또 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문파의 중진인 삼대제자는 물론이고 장로인 이대제자, 원로인 일대제자까지도 그 피해를 입었다.
화산오장로 역시 분쟁에 휘말려서 그 구성원이 숱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 분쟁이 끝날 무렵, 더이상 장로로 삼을 만한 인재를 찾을 수 없게 됐다.
비록 둔재(純才)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했던 주서천이 장로에 오를 수 있었던 연유는 여기에 있다.
화산오장로가 항렬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자리지만, 그렇다고 항렬이 필요로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무공이 대단하지만 경험이 적고 항렬이 낮은 자를 장로로 삼으면 반발을 삼아 문제가 된다.
그래서 조금 못 미더우나 항렬이 높은 자부터 장로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그 운 좋은 자가 자신이었다.
하지만 장로가 되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전란의 시대가 막을 내렸을 무렵이었던지라 목숨을 위협받을 일이 없었다.
간간이 장문인이나 다른 장로들을 도울 뿐, 화산파 내에서 잘만 지냈다.
다른 이대제자들은 후배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제자조차 받지 않았다.
누굴 가르칠 만한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불과 며칠 전에 화경에도 올랐거늘……’
노년에 뒤늦게 무공에 대한 재미를 찾았다.
장로에 오른 이후 여러 무공을 열람할 수 있던 덕이다.
그래서 어찌어찌 화경에 오르긴 했지만, 너무 늦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죽음을 느끼고 회광반조(回光返照)에라도 들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다지 의미 있는 삶은 아니었어……’
가만 돌이켜 보면 정말 미련뿐인 삶이었다.
남들 다 한다는 사랑도 해보지 못했다.
무공을 연공하는 데만 해도 벅차서, 여자 손 한 번 잡지 못했다.
무림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무림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혼란했던 전란의 시대다.
수많은 일화가 있었고, 영웅과 마두가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아아……”
점점 힘이 빠진다. 이렇게 죽는가 싶었다.
주변에서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는 이들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무관계인 사람들일 뿐이다.
대문파의 장로가 이제 막 영원한 잠에 들려 하니 예의상 온 것뿐.
그 이상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다.
가족이 있었으면 했다.
오랫동안 혼자, 쓸쓸히 살아왔다.
자상하셨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스승이 떠올랐다.
전란의 시대, 믿음직한 등을 보이던 영웅이 보였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미인들이 보였다.
‘그래, 나는……’
의식이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진다.
‘그런 삶을 동경해 왔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