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누군가를 놓치게 된다면, 당연히
적림십팔채에 알려지게 된다. 여기
서 문제를 하나 내마. 만약 그럴 경
우, 피해를 입는 건 누구인지 아느
냐?"
"저희…… 아니, 화산파인가요?"
장서은이 확실하지 않은 얼굴로 조
심스레 물었다.
이에 구풍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부정했댜 그러곤 시선을 선주에게
로 돌렸다.
“이 노인장이다.”
"예?"
장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명한
표정을 지었다.
"적림십팔채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
는 이상, 그들도 우리를 건들지 않
는댜 설사 소수의 수적들을 죽인다
고 하여도 복수하려고 하지 않겠지.
다만, 그 화풀이는 우리를 태우고
장강을 넘은 선주에게로 향한다.”
“아니, 선주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
는 건가요?"
장서은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게 아
니야. 그저 화풀이일 뿐이지. 수림구
제 아니, 적림십팔채가 괜히 혹도
(黑道)에 드는 게 아니다. 그런 놈
들이댜"
적림십팔채는 수호자도, 명예를 중
시하는 무인도 아니다. 사파예서조
차 안 받아 주는 게 적림십팔채다.
그들은 그저 도적 무리일 뿐이다.
"선주의 삶을 책임질 것이 아닌 이
상, 그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좋다.
또한, 이런 일이 소문이 난다면 선
주들 사이에서도 우리 얼굴이 알려
져 배에 태워 주지 않겠지. 적림십
팔채의 보복이 따를 데니까.”
"허…… . ”
장홍과 장서은은 충격이 가시지 않
는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깨
를 축 늘어뜨렸다.
“나도, 아니 모두가 잘못된 일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있는 법이지. 앞
으로 너희는 강호에 출도할 때마다
이처럼 불합리한 상황을 겪게 될 게
댜 그때가 오면 오늘의 일을 떠올
리며 뒷일을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해랴"
‘허, 구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군.’
주서천은 구풍의 가르침을 듣고 짐
짓 감탄했다.
고수란 건 자촌심이 높다. 그 경지
가 초절정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를 분한 감정
하나 없이 말하는 건 그렇게까지 흔
치 않다.
참고로 십사검협, 구풍 또한 전란
의 시대의 희생양으로서 몇 년 뒤
사망한다. 안타까운 일이 었다.
이번 삶으로 미래가 바뀐다면, 구
풍도 살아남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었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적림십팔재가 사라져야겠지. 하나,
그 규모와 힘은 너희도 알다시피 결
코 작지 않다. 아마 화산파뿐만 아
니라 무림맹이 움직여야 할 거고.
그러나 이것 또한 마땅치가 않다.
왜 그러는지 알고 였느냐?"
" ...... "
•
장홍과 장서은은 답하지 않았다.
둘 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으나,
말하기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구풍은 답변이 돌아오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보다 못한 주서천이 나서서 말했
댜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
전란의 시대 전, 무림은 아직 평화
를 유지하고 있다. 세력들의 힘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었다.
정파의 무림맹, 사파의 사도천(邪
道川) .
마도이세(魔道二勢)의 마교(魔敎)
와 혈교(血敎).
사세(四勢)의 힘은 엇비슷하다. 그
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
일 수가 없다.
전력 차이가 비슷하기에 승리한다
고 해도 피해가 크다. 그런 상황에
서 다른 두 세력이 힘을 합친다면
남은 세력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
댜
만약 무림맹이 적림십팔채를 적으
로 삼아 싸워 전력을 잃는다면, 비
슷한 꼴이 된다.
다른 세 개의 세력이 서로 힘을
합쳐 약해진 무림맹을 순식간에 쑥
대밭으로 만들 수 었었다.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잘 알고 있구나. 그리고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저 입
바깥으로 꺼내기 싫은 거겠지.”
구풍이 장홍과 장서은을 물끄러미
쳐 다봤다. 그 말이 맞는 듯, 두 사
람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다고 한들, 도적
들이 눈앞에 있는데도 가만히 둬야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한창 정의라는 것에 의의를 두고
혈기가 넘칠 나이다. 이해를 못 하
는 건 아니었다.
“이상(理想)을 이해 못 하는 건 아
니지만, 강호의 현실은 특히 냉혹한
법이다.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
구풍이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꿈을 버리고
현실에 타협한 어른의 웃음이었다.
* * *
편주가 포구에 닿았다. 일행은 장
강을 무사히 건넜다. 수적들은 만나
지 않았다.
장홍과 장서은은 여전히 생각에 잠
긴 표정이었다.
주서천은 그걸 보고 속으로 웃었
댜
헷일이 생각나는군. 냐도 저런 적
이 었었지.'
협의만 실천하면 그만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협의로 인해 더 큰 피
해가 일어난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었댜
저 두 사람이 지금 그랬다. 출발했
을 당시부터 쭉 말이 많았던 둘은
고민으로 복잡해 보였다.
"홈, 넌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로구
나."
구풍이 주서천을 신기한 듯이 쳐다
봤다.
그 말에 주서천은 아차 싶었다. 장
홍과 장서은을 보면서 추억에 빠져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다.
아까 편주 위에선 다른 생각을 하
면서 그럭저럭 연기했는데, 지금은
그만 연기가 풀렸다.
주서천은 순간 고민하다가, 이내
구풍의 말에 답했다.
“제가 어릴 적에 화산 바깥으로 나
갔던 적이 있는 건 사백도 알고 계
시지 않습니까. ”
“아아, 그때 무언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
"예, 그 일로 미리 충격을 받아서
지금은 덜합니다.”
주서천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
룰 긁직였다.
일행은 중경을 막 넘어 귀주 땅을
밟았댜
‘드디어 귀주다.'
이제 막 귀주에 도착했지만, 목적
지는 아니었다. 가야 할 곳은 개양
(開陽)이었다.
“오늘부터 경공은 쓰지 않는다.”
귀주의 정파와 사파 영역은 하루에
도 몇 번씩이나 바뀐다. 그만큼 혼
란스러운 땅이다.
무림맹과 사도천은 전쟁 중이지 않
지만, 이곳 귀주 만큼은 다르다. 언
제나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
경공을 쓰면 내공의 소모가 심하기
에, 자칫 잘못해서 적들을 만날 경
우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경공과 보법 수련을 멈추
고, 개양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귀주!'
일행만 아니었으면 들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귀주에 볼일, 아니 찾아야 할 사람
이 있다.
삼안신투의 비고.
그동안 이 비고에 잠들어 있는 보
물을 얻기 위해서 머리를 열심히 굴
렸댜
기억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면서 그
에 맞춰 계획을 수립하고 수정했다.
그 기간이 거의 삼 년이었다.
계획에는 몇몇 사람의 도움이 반드
시 필요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지금 귀주에 있을 걸로 추정됐다.
‘상왕(商王), 이의채(李毅采) ! '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훗
날 중원 제일의 상인이라는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석 자이다.
원래는 별 볼 일 없는 미곡상(米穀
商)이었으나, 전란의 시대가 시작할
때 즈음 그의 인생이 급변한다.
이의재는 상당히 탐욕스러운 사람
이었댜 그는 전란의 시대 때 우연
찮게 무림 인과 연줄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무림인에게 전란에 대한
소량의 정보를 얻어, 고립된 지역까
지 찾아가 군량(軍種)을 팔았다.
동료 상인들은 그런 이의재를 보고
목숨 아까운지 모른다면서 혀를 찼
으나, 그 목숨값은 충분히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의채는 순식간에
수많은 돈을 갈퀴처럼 끌어모았고,
재산과 상단을 부풀려 나갔다.
원래 이의채는 하늘이 내렸다 할
정도로 돈에 관련된 재능은 귀신같
았댜
그동안 자본도 적 었고, 운이 나빴
을 뿐 기회가 한번 찾아오자 그걸
통해 무섭게 성장해 갔다•
‘상왕은 절대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 돈벌레는 반드
시 내 편으로 삼아야 해.'
이의채는 정파인도 사파인도 아니
댜 처음부터 끝까지 상인이었으며,
그 이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정파와 사파. 심지어 마도이세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정체불
명 세력들까지.
이의채는 전란의 시대가 시작되고
끝날 동안 끝까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댜 누구의 편도 아니 었다.
배짱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 었다.
그 누가 전 무림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 할까. 괜히 상왕이 아니 었다.
‘심지어 전란의 승자는 상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
이의채의 보잘것없었던 금의상단
(金意商團)은 전란의 시대를 통해서
수많은 이익을 벌어들인다.
그리고 모든 전란이 끝났을 때, 금
의상단은 천하제일 상단이 되어 겨
우 찾아온 평화에 군림했다.
재물과 돈이 얼마나 많았냐면, 우
스갯소리로 돈으로 천하를 살 수 있
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 능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상왕에게 보물을 맡긴다면 알아서
운용해 줄 터 무엇보다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특히
중요해 . '
누군가에게 비고의 보물을 맡긴다
해도, 야반도주할 가능성이 있다. 하
지만 이의채는 아니다.
상인들에게는 신뢰무사(信頓無死)
라는 말이 있다.
신뢰가 없다면 죽은 것과 같다는
의미다.
그 정도로 상인에게는 상호 간에
신뢰가 필수이다. 그 믿음이 깨지면,
누구도 거래하지 않으려 한다.
이의재가 상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능력도 능력이지만 신뢰
를 반드시 지키기 때문이었다.
돈만 쥐여 준다면 천하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이 이의재다. 다만
반대로 돈이 없다면 믿을 수 없다.
즉, 이익이 되는 관계라면 상왕만
큼 든든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 였다.
다만 반대일 경우, 믿음의 유무고
자시고 간에 상왕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있을지 의문이었다.
실제로 주서천은 이의재가 화산파
에 방문했을 때 얼굴을 몇 번 봤을
뿐, 대화는 나눈 적이 없었댜
그가 직접 찾아왔을 때 주서천은
별 볼 일 없는 무인이었기 때문이었
댜
화산오장로가 되 었을 때 즈음에는
이의채가 워낙 거물이 됐기에 아래
에 있는 사람들을 보냈지 직접 모습
올 보이지는 않았다.
주서천은 이의재와의 만남을 고대
하며, 귀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