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오해입니다, 사형.”
주서천은 순간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손사래를 치면서 쓴웃음울
지었다.
낙소월도 낙소월이지만, 주서천 역
시 어린아이답지 않은 별종이었다.
“제가 어떻게 사형의 말을 무시하
겠습니까? 사매는 그저 교두님의 전
언을 전달한 것뿐이었습니다. ”
주서천이 호소하듯이 말했다.
“정말이냐?"
이건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
댜 멱살을 흔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댜
"예, 정말입니다.”
"……호0’."
그제야 이건은 멱살을 쥔 손에 힘
을풀었댜
"재수 없는 놈!"
이건은 주서천을 한 번 째려보곤,
몸을 돌렸댜 여전히 성이 난 발걸
음이었댜
"여전히 목소리는 정말 크네.”
입각했을 때부터 이건은 주서천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낙소월이 주서
천에게 갖는 관심 때문이다.
낙소월은 화산파예 입문했을 때부
터 유명했다. 자질도 자질이지만, 눈
에 띄는 미모가 특히 그랬다.
입문하자마자 남아( 男兒)들의 가슴
에 불을 질렀고, 그 탓에 자제와 절
제에 대한 교육만 높아졌다.
이건 역시 그 남아 중 한 명이다.
반한 입장에서 주서천이 몹시 마음
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낙소월과
대화하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가끔 그 행동에 조금 화가 날 때
가 었었지만, 그래도 이건이 선을
넘지 않은 덕에 참을 수 있었다.
이건 역시 여타 화산파의 사대제자
들처럼 매화검수를 꿈꾸고 있다.
연화각에서 사고를 치게 되면 훗날
매화검수에 오르는 데 감점 사항이
될지도 모른다.
그게 마음에 걸려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직접적으로 크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선을 넘는다면 주서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혼내(?) 주려고 했지
만, 그러지는 않았댜
이건 외에 다른 연화각원들과의 관
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교류
자체가 없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연화각 때의 일로 경멸
어린 시선도 받아 봤다. 신성한 심
사장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였
댜
그러나 그것도 초기에만 그랬지,
일 년 정도 지냐자 그들의 시선도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합격진의 수련을 할 때 손발이 맞
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주서천이 적
당히 따라가서 별말은 하지 않았다.
대놓고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이건 정도였다.
그 외의 연화각의 생활은 평탄했
댜 어떠한 사고도 없이 일과를 보
냈다.
주로 무공 수련으로 시간을 보냈
고, 일과 수련을 끝내면 명상으로
삼안선투의 비고에 대해 고민했다.
‘얼마 남지 않았댜'
앞으로 이 년 남았다. 그동안 열심
히 계획을 세워 두었다.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언제냐. '
연화각원들은 일반 제자들보다 뭐
든지 빠르다. 강호 출도도 마찬가지
였댜 약관도 되지 않아 나선다.
설사 실력이 조금 부족하다 하여
도, 경험을 쌓는다는 명목하에 보호
자가 붙어 나가게 된다.
이는 연화각의 전통인 동시 교육
정책.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다.
주서천은 그 날을 기약하며 인내하
고 또 인내했다.
* * *
앞을 보면 느리고, 뒤를 보면 빠르
다는 말이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일 년
이 또 지났다.
"허, 언제 봐도 내공만큼은 괴물이
따로 없구나.”
화산오장로, 영진이 진맥을 끝내곤
짐짓 감탄했다.
주서천은 열두 살이 됐다.
매화생공은 일 년마다 육 년의 내
공을 쌓았고, 그 덕분에 내공의 양
은 총 오십일 년이었다.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무려 일 갑
자댜 구파일방의 다른 제자라고 해
도 이 정도의 성과는 낼 수 없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 갑
자를 앞에 두고 있다니, 기연이 괜
히 기연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화산파에서 주서천에게 관심을 갖
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단약사 영진
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 년 전, 영진은 주서천을 관찰하
겠다면서 입각 허가에 손을 들어 주
었댜
관찰이 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
댜 그저 정기적으로 몸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수령신과가 아니라, 매화생공의
힘이지만 말이야.'
주서천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영진은 주서천의 내공이 날이 갈수
록 초고속으로 증가하는 걸 보고 수
령신과의 덕이라 착각했다.
매화기공에 대한 비밀. 매화생공에
대해서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좋은 걸 너랑 그 약골이 나눠
먹다니 . 이 치사한 놈들아. 문파의
어르신부터 챙겨 줘야 하지 않느
냐.”
영진이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워했
댜
"약골 아닙니다. ”
"허미, 사부 얘기 하니 눈깔을 부
라리는 거 봐라!"
영진이 못살겠다는 듯이 언성을 높
였댜
"거 그만 좀 놀리십시오. 열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주서천이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댜
"암, 재미있지! 껄껄껄!"
영진은 정기적으로 진맥하러 방문
하기에, 교류가 제일 잦다. 이 년
동안 그럭저럭 친해졌다.
그래서 이 렇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진맥 끝났다면 이만 일어나 보겠
습니댜"
"네 사부 소식 들고 왔는데?"
“영 장로님께서는 화산 제일의 장
로입니다.”
주서천이 일어나려다 말고 자리에
앉았댜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손
을 공손히 올려 두었다.
이 년 전, 유정목은 강호에 출도한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화산의 바
깥에서 보냈다.
이따금 화산에 돌아와 얼굴을 비치
긴 했지만,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명령을 하달받고 하산했다.
이에 주서천은 불만이긴 했지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유정목은 좋지 못한 건강 탓에 그
동안 그만큼 편의를 받아 왔기 때문
이었댜 그 빚을 갚을 때가 됐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니까 눈깔
에 잔뜩 들어간 힘 좀 풀어라.”
영진이 질린 얼굴로 유정목의 근황
을전했댜
그 말대로 정말 대단한 건 아니었
댜 어디에서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
여 완수했다는 정도였다.
화산오장로와 친해지다 보니, 주서
천은 유정목이 서신을 보내기도 전
스승에 대한 소식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주서천이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댜 몸짓 하나하나에서 진심이
묻어났댜
입에 훈훈한 미소가 절로 걸렸다.
누가 봐도 참으로 멋지다고 생각되
는 사제애(師弟愛)였다.
“아, 그리고 네놈도 슬슬 나갈 재
비를 해야 할 게다.”
영진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
가면서 말했다.
" ...... ," •
주서천이 눈을 크게 떴다.
‘드디 어 !'
쿵!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뛴다. 호흡이 조금
빨라졌댜 뇌 속에서 무언가가 분비
되어 열기를 뿜었다.
영진은 주서천이 어떠한 반응을 보
이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시선을 종
이에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연화각원들이 일반 제자들에 비해
서 강호 초출이 이른 건 네놈도 들
었으니 잘 알고 있을 게…….”
영진이 열심히 뭐라 설명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주서천은 최대한 고양된 기분을 가
라앉혔다.
‘드디어, 때가 왔다.'
기한이 일 년밖에 남지 않아서 올
해 들어 상당히 초조했다. 다행히도
그 초조와 불안도 이제 끝이다.
강호 출도. 이 넉 자가 주서천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연화각의 강호 출도는 전원이 아니
댜 정해진 몇몇 인원들만 나간다.
우선순위는 연화각에 있을 수 있는
연령으로 따진다. 열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강호에 나가지 못한 인원들
이 무조건적으로 영순위로 정해졌
댜
그 외에는 추천이나 무공의 순위
댜 추천의 경우, 보통 스승이냐 교
두가 강호 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
하면 그걸 연령 다음으로 우선순위
로 삼는다.
주서천은 미리 서신을 통해 유정목
에게 부탁해 두었다. 유정목은 걱정
이 많은 눈치였으냐, 여태껏 어리광
하나 부리지 않았던 제자가 거의 처
음으로 애원에 가깝도록 부탁하자
어쩔 수 없이 승낙하였다.
참고로 강호 출도의 경우, 경쟁이
많지는 않았다.
연화각원이라면 어차피 무조건적으
로 딱 한 번, 성년이 되기 전 강호
예 나간다. 급할 건 없었다.
또한 이미 강호에 나간 경험이 있
는 연화각원의 경우 그 순위는 자연
스레 후순위로 밀려난다.
경쟁을 걱정할 필요 자체가 없었
댜
강호 출도 인원이 정해졌다.
"반갑댜 오늘부터 너 희를 맡을 구
풍이댜'’
십사검협(十四劍俠) 구풍(求風).
이번 연화각 강호행의 인솔자이자
보호자였다.
삼대제자 중에서도 그 무력은 발
군. 강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초절
정 고수다.
무위뿐만 아니라 항렬도 높았다.
삼대제자에서도 구풍을 보고 사제라
고 하대하는 자가 없다.
주서천에게도 사백(師伯)이 된다.
“하산하기 전에 인원을 확인하마. ”
구풍은 눈앞의 햇병아리들을 호명
했댜
"장홍(張弘), 장서은(張徐恩), 주서
천.”
"예 ! "
세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댜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들
어가 있었다.
이에 구풍이 쓰게 웃고는, 세 사람
의 어깨를 각각 두들기면서 부드러
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
니고, 그렇게 긴장할 건 없다. 화산
올 내려가는 것뿐이니까.”
굳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
댜
“자, 그럼 가자"
구풍이 앞장서서 걸었고, 그 뒤를
따랐댜
‘장홍 사형 장서은 사저’
주서천은 제일 뒤에 서서 정면의
소년과 소녀를 살폈다. 둘 다 기대
반, 긴장 반이 섞인 표정이었댜
장홍은 열네 살로, 연화각에서 연
령과 항렬 모두 제일 많았다. 장서
은은 열세 살로 장홍의 사매 였다.
주서천은 이 두 사형제가 동행한다
는 걸 듣고 안도했다. 연화각에서
비교적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그렇게 좋게 보는 건 아니
었지만 그렇다고 멸시하지는 않았
댜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무관심했
댜
이건처럼 괜히 성가시게 시비를 거
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참고로 강호행이 정해지자마자 낙
소월이 찾아와서 아쉽다는 눈초리로
인사해 줬다.
낙소월도 마음 같아선 따라가고 싶
다고 말했으나, 그를 안 좋게 보는
심옥련의 눈치가 보여 포기했다.
“사백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도
괜찮습니까?"
주서천이 구풍에게 물었다.
"얼마든지 물어보거라.”
“저희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이대로 남하(南下)하여 중경(重
慶)을 넘어서 었는 귀주(貴州)다."
"귀주, 말인가요?"
장서은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되물
었댜
“그레 정파와 사파의 경계 지역이
댜"
귀주는 예로부터 싸움이 끊이지 않
는 곳이었다.
정파 세력권과 사파 세력권의 영향
력이 검으로 딱 가른 것처럼 반반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 그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넓혀
정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 왔다.
휴전 중에도 수십 번이나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분쟁 지역 그리고
이 귀주는 전쟁이 아니어도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라 구파일방 같은 대
문파에서 제자들을 보내 실전 경험
을 쌓게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나도 있고,
귀주는 위험한 만큼 정파 고수들도
다수 포진되어 있으니까. 다치거나
죽을 일은 없단다. ”
무인이 강호에 나간다는 건, 그동
안 쌓은 무공을 사람에게 써서 실전
경험을 쌓는 걸 의미한다.
비록 유람하듯이 나온 것 같았지
만 결코 아니었댜
‘중경!'
장홍과 장서은은 귀주에 간다는 사
실에 잔뜩 긴장한 듯했으나, 주서천
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귀주가 아닌 중
경이댜
그곳에 그토록 찾던 게 숨겨져 있
댜
‘삼안선투의 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