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주서천은 몸에 맞는 철검으로 매화
검의 일초식을 펼쳤다. 낙소월이 얼
른 검을 세워 막아 냈다.
째―앵!
파르르
험청난 내력(內力)!'
낙소월의 가녀린 손목이 미세하게
떨렸댜
주서천이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그래 봤자 아직 소년을 벗어나진 못
했댜
청년이 아닌 이상 순수한 근력이
이렇게 강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내공의 힘이라는 의미였다.
낙소월은 선수를 양보한 걸 후회하
면서 다음 행동에 나섰다. 일단 보
법을 밟아 빠르게 퇴보(退步)했다.
‘진정해 . ’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순간, 낙소
월의 머리는 쾌속으로 회전하면서
행동 방안을 강구했다.
‘어떻게 이런 내공을 지녔는지 의
문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낙소월은 어리지만, 사고방식은 이
미 어른에 가까웠다. 흔히들 말하는
천재이댜
무공에 대한 이해도, 상황 판단,
지식 역시 도저히 아홉 살의 것으로
보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최대 장기는 검을
맞대는 짧은 순간에도 여러 가지 가
능성을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다움은 어떻게 공격해 올지 생
각해 봐야 해…… . '
매화검, 육합검, 낙영검법, 매화영
롱검 오행매화검
상대의 연령에 배울 수 있는 무공
들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걸 수련한지는 모르
지만, 이 중 하나로 공격해 올 거라
고 확신했다.
낙소월은 이 다섯 무공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대웅하려고
미리 머릿속에 그려 두었다.
하지만…··.
”……네?"
그 짧은 순간 동안 계획한 게 전
부 무너졌댜 단 하나도 맞지 않았
댜
상승의 무공을 쓴 건 아니었다. 아
니, 애초에 무공 같은 게 아니었다.
“받아라!”
주서천이 호기롭게 외치면서 검을
휘둘렀다.
말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매화검
올 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구잡
이로 휘두른 것에 불과했다.
어떠한 형식도 갖지 않았고, 검으
로도 갖추지 않았다.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 사선으
로 그었다.
매화검조차도 아니었다.
”뭔……!"
허를 찔렀다.
낙소월은 찰나의 순간에도 여 러 가
지 방안을 강구할 수 있지만, 반대
로 그게 결점이 되기도 한다.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
고, 그 생각에 관념이 고정되어 그
외의 것이 날아오면 당황했다.
주서천이 검법이라 부르기예도 민
망한 검을 펼치자, 낙소월은 얼떨결
에 막아내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간다!"
주서천은 보라는 듯이 외쳤다. 하
단전에서 내공을 무식하게 끌어올려
사용했다.
파바바밧!
몸이 내공을 받아 빠르게 움직 인
댜 절벽 등반으로 잘 단련된 근육
이 힘을 냈다.
검이 그어질 때마다 ‘부웅' 하고
묵직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대기
가 갈라지며 낙소월을 노렸다.
그러나 역시 검법이 아니었다. 그
냥 휘두르기였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을 토해
냈다.
“깍!"
낙소월이 옅은 비명을 홀렸다. 검
에서 손, 그리고 온몸으로 퍼지는
그 충격이 적지 않았다.
"합!”
쐐애액―!
짧은 기합에 따라오는 파공음.
낙소월이 검을 들어 주서천의 검을
막아 냈다.
재재재챙!
이와 같은 공세와 수세가 계속됐
댜
주서천은 내공의 힘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여,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
댜 낙소월은 그걸 전부 막아 냈댜
처음에는 당황하긴 했으냐, 낙소월
은 천부적인 재능. 반사 신경으로
검을 어째 막아 내긴 했다.
마구잡이 검이 불규칙적이긴 하지
만 그렇다고 막을 수 없는 게 아니
었다. 반대로 더 쉬었다.
너무나도 단조로운 움직임이기에,
어떠한 고차원적인 검로가 촌재하지
않아 대놓고 경고하는 꼴이 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목검을 마구잡이로 휘 두른다고 할
까. 그런 느낌이었댜
"까악!”
이윽고 최후의 비명이 터져 나왔
댜
확실히 검로(劍路)는 눈에 훤히 보
인댜 하품이 냐올 정도로 뻔했다.
한쪽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의 예상
경로에 한해서다. 날아오는 검의 힘
과 속력 자체는 전혀 아니 었다.
예상 경로를 예상할 수 있다고 한
들, 몸이 그걸 따라 주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식한 내공!
그 힘 앞에 결국 백기를 든 건 낙
소월이었다.
“졌……습니다…….”
낙소월이 검을 떨어뜨렸다. 그 낯
빛은 밝지 못했다.
아까 전만 해도 보였던 여유 역시
하나도 없었다.
"승자, 주서천!"
심사관이 손을 들어 비무의 종료를
알렸댜 그러나 그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저게 뭐야!"
"뭐 저딴 게 었어!"
여기저기서 야유가 들려왔다. 패배
자인 낙소월이 아닌, 승자 주서천을
향한 야유였다.
"저딴 걸 인정하라고?"
"삼류보다 못한 놈!"
"네가 그러고도 화산의 제자냐!"
화산파. 아니, 정파는 명예를 목숨
보다 중시한다.
특히나 화산파의 경우, 검에 대해
서는 더욱 엄했다.
그 사상과 이념 에 따르면 주서천의
행동은 설사 승리했다 해도 야유와
욕이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연화각의 심사다.
거기에서 검법은커녕, 무공이라 칭
하기에도 부끄러운 방식으로 이겼
댜
비록 바닥을 구르거나, 흙을 뿌리
거나, 암수를 쓰는 방식이 아니어도
충분히 모욕에 가까운 행위였다.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뭐 . '
주서천은 아무렇지 않게 야유와 욕
을 흘려넘겼다.
‘너무 강해도 문제다. '
낙소월뿐만이 아니 라 자신을 뜻하
기도 했다.
낙소월 정도 되는 무인을 이기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힘들다. 매화검
올 펼쳐서 무위를 보여 줘야 한다.
근데 그러면 너무 세다. 어떻게 약
하게 노력해 보려고 해도, 이놈의
증진 체조로 강화된 몸이 문제였다.
심지어 넘치는 내공도 있어서, 기
초 검공인 매화검만 펼쳐도 삼류를
가볍게 넘는 위력이 나왔다.
이걸 보여 준다면 심사관들이 입을
떡 벌리면서 장문인과 화산오장로에
게 보고할 게 상상됐다.
하나 그렇다고 실력을 너무 낮추면
낙소월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낸 방법이 이거였다.
낙소월을 이기되, 천재라거나 그런
쓸데없는 소문과 평가를 막는 방법.
내공과 육체만으로 승부한다.
이러면 실력도 감출 수 있고, 이길
수도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다만, 그에 따른 대가가 조금 썼
댜
‘나 역시 전란의 시대가 아니었다
면 치욕스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
겠지.’
그 역시 전형적인 정파인이었다.
원래라면 이러한 행위를 용서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애초에 이런
짓을 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 이후, 정파가
가진 그 특유의 틀어박힌 사고방식
을 상당 부분 바꾸게 됐다.
전통이나 풍습 등을 지키고 고집하
기에는 무림의 사정이 워낙 안 좋았
댜
자하신공이냐 자하검결 등의 일인
전승인 무공을 화산오장로가 알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다.
문파의 존속 등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다면서 정파는 꽤나 진보적으
로 변했댜
그만큼 전란의 시대는 무림의 수많
은 걸 바꾸었고, 주서천 역시 시대
의 흐름에 변화한 사람 중 하나였
댜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사부님의 명예에 홈이 갈 터이니 마
음이 편치 않구냐.'
주서천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
었댜
* * *
연화각의 심사는 끝났으냐, 무사히
끝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 건 아니 었
지만, 논란이 된 비무 때문이었다.
주서천과 낙소월의 일이다.
"불허(不許)합니다.”
지천명(知天命: 50세) 즈음 된 중
년 여성이 말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
특징이었다.
화산오장로 철혈매검, 심옥련(深玉
聯)이다.
"심 장로.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
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좀 들어 봐
야 하지 않겠소?"
왜소한 체구에 인자한 웃음이 어울
릴 듯한 노인이 말했다. 그 역시 화
산오장로 중 한 명이다.
지검옹(智劍翁) 학송(學送). 이대제
자 중에서도 장문인 다음으로 항렬
이 높았다.
“이야기를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학 장로님. 화산의 검을 모욕한 자
를 연화각에 입각시키다니요.”
심옥련이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따져 가면서 말했다. 대부분 주서천
의 잘못이나 예법에 대한 의견이었
댜
확실히 주서천의 행동은 화산파,
아니 정파의 입장에서 그다지 좋지
못했댜
"심 장로님의 말대로요. ”
상궁의 자리한 사람들 중, 신장이
제일 훤칠한 중년인이 심옥련의 주
장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마찬가지로 같은 화산오장로, 명수
악(命手振) 조무양(朝務樣)이 었다.
참고로 화산오장로들은 스승이 같
지 않은 이상, 사형제의 호칭을 쓰
지 않는다.
설사 향렬이 다르다고 해도, 화산
오장로 자체의 지위를 우선으로 하
고 존중해서 그렇다.
다만 학송의 경우, 이대제자 사이
에서 워낙 연령이나 항렬이 높은 편
인지라 예외로 두는 편이었다.
"허허허, 두 분 모두 너무 학 장로
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시구
려. 나도 이야기는 듣고 싶소.”
우일문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두 분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소?"
장문인의 도움에 학송이 감사하다
는 눈빛을 보였다.
“내 듣자 하니 소유검의 제자 되는
놈이 영약을 복용했다는 제보를 받
았소. 그게 사실이오?"
단약사(丹藥士) 영진(靈珍)이 눈을
반짝였댜
심사장에서 보였던 주서천이 보여
준 움직임. 그건 도저히 아홉 살이
낼 수 였는 것이 아니었다.
힘과 속력은 곧 내공에서부터 나온
댜 그 정도의 속력이라면 최소 이
십 년 내공이어야 했다.
화산파의 심사관이나 되는 무인들
이 그걸 모를 리 없었고, 당연히 그
대로 보고를 올렸다.
주서천에 대한 추궁도 있었다. 이
에 주서천은 수령신과에 대해서 거
짓을 섞어 실토했다.
과거, 유정목이 정기 회합에 나갔
을 때 몰래 빠져나와 일탈 행위를
즐기다 우연히 발견했다고 말을 한
것이다.
어차피 연화각에 들어가면 수련동
과 달리 교두가 한 사람 한 사람에
게 붙어 신경 써 준다.
진맥 역시 그중 당연히 포함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반 갑을 살짝 넘
는 내공이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경우, 별로 큰 문제로 거
론되지는 않았다.
화산파 소유의 영약이라면 모를까,
주인 없는 걸 복용한 것이니 잘잘못
을 따지기에는 애매했다.
수령신과에 대한 소문을 미리 듣
고, 발견하면 복용하지 말고 즉시
보고하라고 명령했으면 또 모른다.
이렇다 보니 영약 복용에 대한 건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넘어갔다.
대신 유정목이 자리를 비웠을 때
몰래 빠져냐가 일탈 행위를 즐긴 건
벌을 받았다.
벌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었
고, 변소의 청소 둥의 잡무를 한 달
가량 정도 맡게 된 것뿐이었다.
“그놈 뱃속에 들어간 영약을 꺼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영약이 어떠한
효능을 보이는지 알고 싶소.”
연화각에 넣어 두고 관찰하고 싶다
는 속뜻이었다.
영진은 별호에도 알 수 있다시피,
무인인 동시에 단약을 제조하는 의
원이댜
이걸로 찬성 둘, 반대 둘이 나왔
댜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 곳으로
향했댜
매화검장(梅花劍將) 위지결(位知
潔)
화산오장로. 아니 , 화산파에는 북해
궁주처럼 대대로 이름이 이어져 내
려오는 별호가 존재한다.
장문인과 나란히 이십사수를 독자
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 지위 자
체가 별호인 매화검장이 었다.
그 이름은 화산오장로 중에서도 특
별하며, 대외적인 권한도 강했다.
"입각시키시오.”
경장.”
심옥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위지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반 갑의 내공을 품고 있소. 자질이
어떻건 간에 두들겨서라도 가르친다
면 충분한 전력이 될 거요. 말이 좀
많겠지만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
오.”
화산오장로들도 각자 분야가 있고,
그에 따라 권한도 주어진다.
연화각이나 매화검수 등, 정예 집
단의 등용은 매화검장의 권한이 우
선된댜
설사 찬성이 둘, 반대가 셋 나온다
고 해도 매화검장이 손을 들어 주면
그쪽이 더 힘이 실린다.
짝!
우일문이 손뻑올 쳐 좌중의 시선을
모았댜
“그럼 회의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
겠소. 연화각에 입각하는 인원은 주
서천과 낙소월. 이상 두 명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