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마(踊魔)에 사로잡혀 눈을 도저
히 뜰 수가 없다.
힘을 내도 겨우 반개하는 것이 고
작 그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 "
흙처럼 메마른 입술만 겨우 달싹거
려 소리를 낸다. 하지만 신음에 가
까운 목소리만 홀러냐올 뿐이었다.
"장로…… 이렇…… 가시면…….”
이미 시야는 안개처럼 희뿌영게 일
그러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지만
귀가 멀어 뭐라 말하는지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 '
주서천(奏緖川)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 려 보면서 삶
울 되돌아본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고아로
떠돌다가 운 좋게 스승의 눈에 띄어
화산파로 입문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화산파라고 하면 정파의 명문지파
인 구파일방(九派- 割)의 일파(
派)이며 검(劍)으로 이름 높은 대문
파댜 부모 잃은 고아 입장에선 이
보다 더 운 좋은 일을 찾기가 힘들
댜
이후 스승에게 감사하면서 화산파
의 제자로서 살아왔고, 정신을 차리
고 보니 화산오장로(華山五長老)까
지 올랐다.
‘운이 좋았지.'
화산오장로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댜 대문파인 화산파에서 장문인
다움으로 권위가 높은 자리이다.
이름이 무거운 만큼 쉽게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또 그만큼 다
른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무공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지성을
필요로 하며 세간에서의 평가도 중
요시한다.
강호에서의 명성과 더불어 실적 등
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항렬이나 경험만으로는 결코 오를
수 없지만…… 어디서나 ‘예외’라는
경우가 촌재했다.
그 경우가 바로 자신이다.
‘설마하니 나 같은 놈이 장로가 될
줄은 몰랐어.'
운 좋게 화산파에 들어왔으나, 그
렇다고 딱히 특출한 재능을 보이면
서 대단한 업적을 세운 건 아니다.
무재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머리
가 비상했던 것도 아니다. 눈에 띄
지 않고 남들과 비슷하게 살았다.
물론 피나는 노력조차 한 적이 없
었기에 그 이상 바라는 것 자체가
크나큰 욕심이다.
애초에 그러한 욕구 자체가 없었지
만.
그래도 고아인 자신을 거둬 준 스
승에게 감사한 마음에 보답하기 위
해서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다. 정
말로 ‘그럭저럭’ 살아온, 평범한 삶
그 자체였다.
하면, 어떻게 화산오장로가 될 수
있었던 걸까?
그 답은 ‘평온'하지는 않았던 삶에
있댜
수십 년 세월 동안 유독 전쟁이
많았댜 후세에 이르기를, 전란의 시
대라 칭해질 정도로 많았다.
전쟁 발발, 휴전, 종전이 수십 년
동안 도대체 몇 번 이뤄진 것인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화산파도 그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또 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문파의 중진인 삼대제자는 물론이
고 장로인 이대제자, 원로인 일대제
자까지도 그 피해를 입었다.
화산오장로 역시 분쟁에 휘말려서
그 구성원이 숱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 분쟁이 끝날 무렵, 더
이상 장로로 삼을 만한 인재를 찾을
수 없게 됐다.
비록 둔재(純才)는 아니지만, 그래
도 평범했던 주서천이 장로에 오를
수 있었던 연유는 여기에 있다.
화산오장로가 항렬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자리지만, 그렇다고 항렬이
필요로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무공이 대단하지만 경험이 적고 항
렬이 낮은 자를 장로로 삼으면 반발
을 삼아 문제가 된다.
그래서 조금 못 미더우나 항렬이
높은 자부터 장로로 삼을 수밖에 없
었고, 그 운 좋은 자가 자신이었다.
하지만 장로가 되어도 변하는 건
없었댜
전란의 시대가 막을 내렸을 무렵이
었던지라 목숨을 위협받을 일이 없
었댜
간간이 장문인이나 다른 장로들을
도울 뿐, 화산파 내에서 잘만 지냈
댜
다른 이대제자들은 후배 양성에 노
력을 기울였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제자조차 받지 않았다.
누굴 가르칠 만한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불과 며칠 전에 화경에도 올랐거
'- ' 늘 .......
노년에 뒤늦게 무공에 대한 재미를
찾았댜 장로에 오른 이후 여러 무
공을 열람할 수 있던 덕이다.
그래서 어찌어찌 화경에 오르긴 했
지만, 너무 늦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죽음을 느끼고 회광반조(回光返照)
에 라도 들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
던 모양이다.
‘그다지 의미 있는 삶은 아니었
어…… . '
가만 돌이켜 보면 정말 미련뿐인
삶이었다.
남들 다 한다는 사랑도 해 보지
못했댜 무공을 연공하는 데만 해도
벅차서, 여자 손 한 번 잡지 못했
댜
무림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싶었지
만, 역부족이었댜
무림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혼
란했던 전란의 시대다. 수많은 일화
가 었었고, 영웅과 마두가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자신의 이름은 없
었댜
“아아… .... "
점점 힘이 빠진다.
이렇게 죽는가 싶었다.
주변에서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는
이들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
도로 무관계인 사람들일 뿐이다.
대문파의 장로가 이제 막 영원한
잠에 들려 하니 예의상 온 것뿐. 그
이상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다.
가족이 있었으면 했다.
오랫동안 혼자, 쓸쓸히 살아왔다.
자상하셨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스승이 떠올랐다.
전란의 시대, 믿음직한 등을 보이
던 영웅이 보였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미인들이 보였
댜
‘그래, 냐는…….'
의식이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진다.
‘그런 삶을 동경해 왔을지도…… . '
第一章화산회귀(華山回歸)
흔들흔들.
“서천…… 서천야… .. 일어…….”
배 위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몸이
흔들린댜 뇌까지 요동치는 그 흔들
림에 눈이 절로 떠졌다.
게슴츠레 떠진 눈 사이로 제일 먼
저 보인 건 삼심 대 후반으로 보이
는 미중년이었다.
" ...... ? "
•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남아는
자신을 깨운 미중년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 렸다.
“사부님…… 어째서……?"
”며칠 전에는 이 사부를 사자(死
者) 취급하면서 펑펑 울더니만, 또
잠꼬대를 하는구냐.”
곱게 늙는다면 그를 대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단처럼 곱
게 흘러내리는 새카만 머리카락, 유
려하고 선한 눈매, 주름이 그옥하지
만 어째 추하지 않고 아름답기만 하
댜
남아, 주서천은 사부인 유정목(流
正木)의 말에 눈을 굴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그 생각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일
주일 전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
이 빛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주서천은 그 짧은 순간 동안 현재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
했댜
‘주서천, 여덟 살, 화산파의 사대제
쟈'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자신에 대한
정보.
‘유정목, 불혹(不惑:40세), 화산파
의 삼대제자’
화산파의 구성원은 일대제자(一代
弟子)부터 사대제자(四代弟子)로 나
뉜다.
먼저 일대제자는 강호의 일에 더
이상 참견하지 않고 은거한 문파의
어르신들이다.
이대제자는 장문인을 비롯한
진이다. 장로 외에도 배분이
자들이 주로 구성을 이룬다.
장로
노 0
工亡
삼대제자의 경우 문파의 중진이다.
대부분 청년부터 중년을 이루며, 그
인원수도 제일 많다. 제자도 이때부
터 들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대제자인 아직 무인
으로 부르기도 힘든 아이들이나 풋
내기뿐. 후학을 뜻한다.
사대제자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
고 해도 잘해 봤자 약관. 이제 막
강호에 나올 수준 정도다.
그리고 주서천은 그 사대제자 중에
서도 늦깎이로 들어온 참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
침음이 절로 홀러나왔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요
며칠 동안 수십 번 동안 의심하면서
생각해 왔다.
전란의 시대를 겪고, 화산오장로에
운 좋게 올랐던 주서천은 죽었다.
그 삶은 결코 거짓 따위가 아니다.
말년에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올랐
지만 얼마 뒤에 수명을 이기지 못하
고죽었댜
하나 이게 웬일. 감았던 눈을 다시
뜨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젠 희미한 기억도 제대로 남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 아이였던
시절로 회귀( 回歸)해 버렸다.
처음엔 꿈인가 싶었다. 두 번째는
저승의 어떠한 형벌인가 싶었다. 세
번째는 혹시 자신이 우화등선(羽化
登仙)을 하여 선계에 온 것은 아닐
까 싶었다.
하나 그 추측은 모조리 빗나갔다.
어떠한 것도 맞지 않았다.
꿈도, 지옥의 형벌도, 선계의 보상
도 아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일주일 동
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순응하게 됐다.
‘피로 물든 꽃이 피기도 전의 일.
분쟁으로 가득한 소용돌이가 생기기
도 전의 일. 그 시대로 돌아왔다.'
아직 평화스러운…… 유일하게 자
신을 소중히 생각해 주었던 가족,
스승과 함께했던 시절로.
할 수 있댜'
머릿속에 쓸데없는 감정, 잡념들이
흩어진댜 그 대신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어떠한 감정이 불타올랐다.
‘다시 한 번 . '
어째서 과거로 돌아온지는 모른다.
누가 자신을 보냈는지는 모른다.
아니, 솔직히 어떻건 간에 상관없
댜
그게 일주일 동안 내린 결말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삶을 살아왔
고,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 하나 없
는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과거로 돌아왔
댜
그것도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
진 재 .
좀 더, 내가 원하던 대로의 삶
을? ! ’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 기억이
있다면 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었
댜 그 사실에 감정이 고양됐고, 차
갑게 식 었던 무언가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앞으로 일어날 정사대전. 그리고
이후에 있을 수많은 분쟁과 전쟁의
뒤에 숨어 있는 암중 세력.
그 외에도 노년에 화산오장로에 올
랐던 덕에 화산파나 무림맹의 기밀
에 대해서도 열람할 수 있었기에 ,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여인들과 이런 것 저런
것도 해 봐야지!'
동정으로 죽었던 게 얼마나 억울하
던지. 노년에 가서야 성욕이 줄었지
만, 그 전까진 고통이 었댜
화산파는 도가 문파치곤 세속적인
편에 속해서, 혼인도 자유로운 편이
었댜
장문인의 경우엔 화산파를 책임져
야 하는 몸이었기에 혼례를 올려도
자식을 낳는 건 자제시켰지만.
여하튼 정파이다 보니 대놓고 성욕
올 탐하는 건 금했지만, 그래도 적
당히 눈 정도는 감아 줬다.
그런 데 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자 손
조차 제대로 잡아 보지 못하고 사내
들 사이에서 살아왔다.
그 억울함과 미련은 시간을 거슬
러,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 주서천
의 눈동자에 담겨 고요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