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 전혀. 여느 때처럼 아무 일도 없다네.”
아렌은 황금 가면 뒤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여느 때? 그래, 평소와 같긴 하겠지. 이런 일이 점점 늘고 있으니.’
아렌은 여전히 레온나토스의 비서관이었고, 내원 시종장은 다른 이의 역할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실은 아렌이야말로 황궁의 진짜 실세임을 알고 있었다.
레온나토스가 작은 결정 하나마저도 일일이 아렌에게 물어보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
물론, 서로 의견이 갈리면 철저한 논의를 거치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렌의 위치를 아는 사람들마저도, 아렌이 이따금 황제의 복식과 가면을 쓴 채 황좌에서 업무를 대신 본다는 사실은 몰랐다.
[아렌. 내일 업무는 자네가 대신 좀 보게.]
[네? 폐하, 몇 번 들어드렸다고 너무 대수롭지 않게 부탁하시는 것 아닙니까? 들키면 목이 날아갈 겁니다.]
[하하하, 감히 누가 네 목을 자른단 말이냐. 이 제국에서?]
[…바로 충성스런 당신의 부하들이요.]
[걱정하지 말게. 꾸며낸 목소리를 엇비슷하게 내고, 체격도 나와 거의 같으니 금면병들도 모를 거야.]
[…제국의 황제가 되어서, 그깟 소설책에 정신이 팔려서야 되겠습니까?]
[뭐가 문제인가? 자네가 내린 결정이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네. 대신 업무를 봐줄 믿음직한 신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군.]
“…….”
어쩐지, 제국의 흑막이 된 게 그렇게 좋은 일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바에야 스스로 흑막이 되고 싶었는데, 설마 지금 황제의 황금 가면 뒤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예전에, 레온나토스의 대역이 되는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긴 하지만.’
이웃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중요한 일마저 직접 다루게 되는 그림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국과 도국 연합 둘 다 제국, 더 정확히는 아렌과 동맹을 맺었다는 점이다.
제국이 유서깊은 확장정책의 종언을 선언하고, 고국과 도국 양국은 제국의 견제를 멈추면서 국제 정세는 유래없는 평화기를 맞았다.
어쩌면 이것보다 모두에게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아렌이 본 20번의 다른 삶 중에서는 가장 나은 결말이었다.
‘그나저나, 황금 가면이라니. 황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렌은 황제의 상징, 황금 가면 뒤에서 한숨 쉬었다.
이미 황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다.
레온나토스는 자신에게 모든 전권을 아낌없이 위임했다.
아렌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그만한 암군이 따로 없겠지만, 아렌은 굳이 사사로운 욕심을 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이안의 꿈에 휘말려 20번이 넘는 인생을 되돌아가면서, 웬만한 것들은 다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누군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부귀영화도 이제는 지겹다.
“…….”
아렌은 황제의 옷 안에 숨겨진 단검을 무의식중에 만지작거리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안되지. 이제 심장을 찔러도 회귀는 못해.’
제국의 장막 뒤는 화려했지만, 그만큼 공허했다. 아렌은 삶이 권태로움을 느낄 때마다, 라이안의 꿈처럼 스스로 심장을 찌르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았다.
아렌은 자주 생각했다. 제국의 황실이라는 거대하고 찬란한 장막의 뒤보다도, 상대와 자신 사이의 얇은 한겹.
어쩌면 아렌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족했을지 모른다고.
‘…흠, 슬슬 그리운데?’
아렌은 좀이 쑤셨다.
*****
“후, 오랜만에 푹 쉬었군.”
황제가 자신만을 위해 만든, 직접 엄선한 책들이 들어찬 서고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던 제국의 황제, 레온나토스는 기지개를 켜며 서재에서 나왔다.
그는 정말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밀린 책만 보며 하루를 보냈다.
물론, 책벌레인 황제의 독서가 밀렸던 이유는 그간 제국의 통치에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이번에 아렌을 자신의 대역으로 세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렌, 그 녀석은 어째서인지 항상 뒤에만 서 있으려 한단 말이지.”
아렌이 하는 말은 옛날부터 묘하게 잘 맞았다.
아렌은 자신의 점괘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레온나토스는 믿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그의 말이 점괘라서 잘 맞는 건지, 단지 통찰력이 뛰어난지는 중요치 않았다.
확실한 건 아렌의 말은 잘 맞는다는 것, 그 사실 하나 뿐이다.
“그러니, 제국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힘써줘야지.”
레온나토스 역시 섣부른 각오로 아렌을 자신의 대역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황실의 업무를 하나하나 익숙하게 한 다음, 아렌을 자신의 바로 옆에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마저 고려하고 있었다.
이미 도국과 제국의 사절들 모두, 아렌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는 눈치였다.
‘미안하군, 아렌. 뒤에 숨어있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지만, 난 제국의 사람이란 말이야? 우리 우정보다도, 제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
레온나토스는 아렌이 기다리고 있을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너무 늦었군. 미안하네, 아렌-”
하지만, 황제가 앉아있어야 할 집무실 책상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아렌이 남기고 갔을 만한 쪽지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잠시 마음 식히고 오겠습니다. 부디 찾지 마세요.]
“…가출하는 철부지 꼬마도 아니고.”
쪽지를 확인하자 마자 황제는 더글라스와 발커스, 황자일 때부터 자신을 보좌했던 최측근들을 불렀다. 그들 앞에서는 레온나토스도 황금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더글라스, 있나?”
“여기 있습니다, 폐하.”
“아렌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
“네? 오늘 하루 모습을 감출 거라고… 폐하께서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아무래도, 정말 도망친 것 같다.”
“…네?”
레온나토스는 아렌이 남기고 간 쪽지를 흔들어보였다.
“…….”
“…….”
모인 가신들은 하나같이 기가 찬 표정이 되었다.
아렌이 오른 자리는, 누군가에겐 피를 물처럼 뿌려서라도 오르고 싶어하는 자리다.
그걸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망가다니.
황제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명했다.
“이 일에 적합한, 가능한 모든 사람을 동원하라. 제국 전역, 그리고 이웃국에도. 심지어 북쪽과 동쪽의 황무지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아렌을 찾아내야 한다. 제국의 국운이 달린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가신들은 고개를 숙였다.
일개 가신의 수색 명령치고는 지나치게 거창할지도 몰랐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
제국의 서남부, 어느 소도시 앞. 빈민가 거리.
검은 천으로 빙 두른 간단한 천막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몇 달에 한 번,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용한 점집에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기다림의 무료함을 잊기 위해 앞뒤 사람들과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를 나눴다.
“흠, 젊은 친구는 이곳이 처음인가? 묘하게 어색해 보이는데.”
“아, 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럼 마침 시기를 잘 맞췄네. 이 점집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야. 글쎄 점괘가 틀리는 게 하나도 없지 뭔가?”
청년과 늙은 남자 뒤쪽에 있는 머리 벗겨진 노인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 내 아들이 다친다고 엄포를 놨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엉터리 같으니!”
“거참, 노인네 말하는 것 하고는. 아들이 무사하다고 역정 낼 일입니까? 그 점괘 덕에 대비했으니 무사하다고 생각하시죠?”
“크흠…”
“아, 이런. 젊은 친구 차례로군. 잘 다녀오시게.”
청년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작은 촛불 하나로만 간신히 밝혀두고 있었고, 손님과 점술가 사이에는 검고 얇은 막 하나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점술가는 손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네. 이 제국이,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청년의 물음을 듣고서야 점술가는 앞을 봤다.
“…폐하?”
“3개월 만이군, 아렌. 벌이는 좀 괜찮은가? 아무리 쏠쏠해도 황궁에서만큼은 못 벌 텐데.”
빈민가 앞에 천막을 차린 점술가는, 사실 황궁을 움직이는 실세 아렌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찌?”
“제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했는데, 자네 하나 못 찾을 것 같나?”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시는 분이 은퇴한 사람 쫓겠답시고 그렇게 일을 벌여서야 되겠습니까?”
“제국의 황제가 제멋대로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제멋대로 한 건 자네도 마찬가지지. 설마, 이대로 영영 떠날 생각은 아니었겠지?”
“…….”
“만약 그렇다면 말해주게. 자네의 뜻을 존중해줄 테니.”
“…그 안에서의 생활이 조금 권태롭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평생을 황궁에서 자란지라, 애착이 가더군요. 그 안에서의 시간이 제법 길었나 봅니다. 어쩌면 폐하의 생각보다도 더.”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럼 은퇴는 아닌 걸로 하고, 휴가는 좀 일찍 끝내주겠나? 도국 연합의 카르도나와 헬데움, 레데의 시장이 자네를 꼭 보고 싶다고 하더군.”
아렌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짧은 휴가였군요.”
“3개월이나 무단으로 휴가를 가도 별 말 안 하는 직장이 또 어디 있겠나?”
“그리고, 마음대로 그만두지도 못하죠.”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날 황제로 만든 건 아렌 자네가 아닌가? 나도 내 의무를 다할 테니 자네도 그만한 책임을 지게.”
“…노력하죠.”
천막의 어둠 아래서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어떤가. 이것도 기회인데 여기서 한번 점을 봐주겠나?”
“이까짓 점, 황궁에서도 실컷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장소가 다르면 분위기도, 결과도 다를 수 있지.”
“…그야 상관 없습니다만. 무엇을 물으시겠습니까.”
“아까 질문부터 마저 끝내지. 이 제국은, 앞으로 어찌 될 것 같나.”
아렌은 카드 한 장도 뒤집지 않고 즉답했다.
“그거야, 볼 것도 없죠. 흉입니다.”
“흉? 그거참, 아쉽군. 그렇다면 다른 질문, 이 나라의 황제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것도 흉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군요.”
“…진지하게 좀 봐 주게.”
“저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합니다만.”
차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던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어느 순간 씩, 하고 웃었다.
“진지하다니, 황실의 모든 점괘가 흉으로 끝나는 게 말인가?”
“물론입니다. 본래 점이란 건 빗나가길 바라고, 또 빗나가야 좋은 법이라 생각하니까요.”
“어째서지?”
“계속 들어맞으면, 자꾸만 점에 의지할 것 아닙니까.”
“…….”
“자, 밤이 늦었습니다. 그만 일어서시지요. 황도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그러지. 천막 밖 사람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허름한 옷을 입은 제국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아렌이 천막 밖으로 나왔을 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던 줄은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천막을 앞뒤로 에워싼 강철 같은 병사들.
“원, 이 사람들. 사람들이 놀랄 테니 나오지 말라 했는데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천막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황제를 향해 절하기 시작했다.
레온나토스의 뒤에 있던 아렌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다시 천막 아래의 어둠 속으로 숨었다.
그건, 아렌이 좋아하는 어둠이었다.
<완결>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