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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26화 (에필로그) (226/227)

#에필로그 1

“…….”

아렌은 눈을 떴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로 눈에 익은 광경이었다.

황궁의 지하, 주방 창고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시동들의 모습이었다.

‘성공, 한 건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황자의 운명석을 깨트린 것은 분명 기억하지만, 몇 번이고 같은 삶을 살아온 아렌마저도 운명석을 깨트린 이후의 삶은 처음이었으니까.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로 돌아왔다고 아렌은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말에 ‘거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부터, 의혹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지금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지금이 꿈이든 아니든, 라이안의 기억이 남아있든 아니든 아렌에게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비록 꿈 속의 일들이라 해도, 그 꿈은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꿈이었다.

아렌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시동들 사이에서 돋보이고, 레온나토스의 가신으로 들어가고, 곧 그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점괘를 빙자해 그의 결정에 깊이 관여하고 황권 경쟁에 뛰어들게 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렌에게 죄책감은 없었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레온나토스는 황태자 후보로서는 최고의 재목이었다.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되면 제국과 백성, 이웃나라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물론, 그 배후에 있을 아렌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렌이 겪는 모든 일들이 한 번쯤은 이미 거쳐 간 것들이었지만, 이전과 다른 것도 있었다.

먼저, 더이상 아렌에게 언령이란 힘은 없었다.

아렌은 몇 번이고 점괘를 보냈고, 힘을 시험해보기 위해 터무니 없는 점괘도 내보았지만, 언령은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힘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꿈에서 깼으니 당연한 결과야.’

지금이 여전히 꿈이고, 아렌이 언령에 대해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아렌은 지금이 꿈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따금 자결해서 시간을 되돌리려는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모든 건, 라이안을 만나면 해결될 일이야.’

이상하리만치 도국에서 조용한 라이안을, 아렌은 황궁에서 기다렸다.

황궁 안에서 자신의 기반을 거침없이 닦아가면서.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도국 연합으로 나가 있던 라이안 황자가 황궁으로 도착하는 날.

아렌은 레온나토스와 함께 초조한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아렌의 오랜 의문이 이로써 확실해지는 날이었다.

“…레온나토스냐? 최근 제법 힘낸다고 들었다.”

“저야 항상 앞서가시는 형님들을 좇기에 바쁩니다.”

“-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쫓아오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이 앞길은 넘겨주지 않을 거다.”

레온나토스의 뒤에서, 아렌은 라이안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점술가로서의 아렌의 눈썰미는 그간의 회귀를 통해 더욱 연마되어있었다.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긴 한데…’

다른 것보다도, 세상일을 달관한 듯한 라이안 특유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었다.

라이안에게 꿈속의 기억이 없다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유일한 불안 요소가 사라졌군.’

레온나토스를 따라 고개를 숙인 채, 아렌은 슬그머니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을 지배하겠어.’

이제 다른 사람의 음모라면 지긋지긋했다.

황궁의 가장 높은 곳에서, 누구보다도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모든 것을 조종하겠다고 아렌은 조용히 다짐했다.

지금의 아렌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

셰오덴 제국의 열두 번째 황자 레온나토스가 황권 경쟁에 뛰어들겠다고 천명했을 때, 누구도 그의 도전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기질이 황제가 되기 합당한 것은 많은 이들이 알았지만, 그 이전까지 이뤄놓은 것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고작 10살 짜리 아이에게 이뤄놓은 업적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라이안과 가웨인을 필두로 한 황자들은 능력과 나이를 앞세워 이미 저 앞을 먼저 달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출발 시간에 차등이 있는 경주와 같았다.

라이안과 가웨인, 테오드릭 등등이 먼저 출발한 것과 달리 레온나토스는 한참이나 늦게 출발한 격이었다.

레온나토스가 택한 방법은, 선두 주자들을 하나씩 포섭한 것이었다.

우선 13황자 돌멘을 끌어들인 다음, 제5황자 고드프리와 태양교와 관련된 협상을 했고, 제9 황자 테오드릭의 무한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어째서인지 레온나토스와 같이 밀실에 들어간 황자는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협상에도 순순히 응하곤 했다.

아무도, 레온나토스와 함께 방 안에 있던 동년배의 시종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때의 회담에 동석했던 자들 중 몇몇은, 이따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텅 빈 눈이 되어 그때를 회생했다.

마치, 몇 번이고 되살아난 사람 같다고 중얼거리면서.

*****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더글라스? 더글라스!”

황궁에서 한 여인이 더글라스를 애타게 불렀다.

과거 황제의 근위기사였던 최강의 무사를 아무렇게나 부를 수 있는 건 황궁 안에서 몇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황녀 저하.”

“아렌은?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는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아렌의 호위면서? 거짓말 하는 것 아냐?”

“없어져도 찾지 말라고 들었습니다만… 저도 참 민망하군요.”

“아이, 참. 바쁘신 폐하 곁에서 보필 해도 모자랄 텐데, 왜 자꾸만 자리를 비우는 거야? 빠져 가지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금 아렌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은 진짜였다. 아렌의 행방을 모르는 지금, 호위인 더글라스는 불안해서 죽을 맛이었다.

‘폐하의 근위기사가 아니게 되었으니 마음 졸일 일은 적을 줄 알았는데…’

황권 경쟁에서 승리한 레온나토스는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제국에서 가장 과묵한 금면병이 있기에, 더글라스가 호위하는 대상은 자연히 황제의 최측근, 아렌으로 바뀌었다.

‘아렌, 이 자식. 어디를 갔든 찾지 말라고 하면 더 애탄단 말이지.’

황궁 곳곳에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아렌이, 어째서인지 그 대부분을 알고 있는 것도.

호위할 대상이 없어져 한가해진 더글라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늘로 세 번째네요.”

“-세 번째?”

세리엔의 목소리가 조금 날이 서 있었지만 더글라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네. 먼젓번에 온 건 머리카락이 곱슬인 시녀랑-”

“아라흐네, 그 여자네? 어째서인지 자꾸만 접근해서는.”

“…….”

어째서 황녀가 자신의 가신도 아닌 일개 시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더글라스는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아, 네. 지금 교국 사절의 선발 자격으로 황구에 머무르고 있는 교국의 주교도 아렌을 찾았습니다.”

“아르테? 쳇, 그 사람은 거북한데…”

세리엔은 초조한 듯 중얼거렸고, 더글라스는 그 모습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실은, 폐하께서 슬슬 아렌에게 가정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말하지 않는 게 낫겠지.’

더글라스도 몇 번 넌지시 말해봤지만, 어쩐지 결혼 생활을 피하는 기분도 받았다.

‘언제 결혼 생활에서 크게 데이기라도… 했을 리 없지. 미혼인 녀석에게 나도 참.’

오늘처럼 아렌이 황궁에서 사라진 건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몇 번이고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초조함과 무료함이 반반 섞인 지금 같은 상황이 쉽게 익숙해지는 건 아니다.

‘아렌 그 자식, 대체 어디 있는지 원.’

레온나토스, 현 황제라면 뭔가 알고 있을까.

더글라스는 내원 안쪽, 황제의 알현실을 곁눈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폐하.”

“…으.”

“폐하?”

“-무슨 일이지?”

황금 가면을 쓴 채 황좌에 앉은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말했다.

움직이는 순간 자신과 완전히 같은 복식을 한 두 호위가 무용지물이 되니, 가렵다고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황금 가면을 쓴 젊은 황제에게, 제국의 재상은 고했다.

“아트마 교국과 라두크 도국 연합에서 보내는 사절에 대해 고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랬지. 비록 제국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대하다고 하나, 이런 때일수록 주변국을 불안하게 해선 안 되겠지. 제국의 친구로서 극진히 대접하도록.”

황금 가면을 쓴 젊은 황제의 말에 재상은 고개를 숙였다.

“말씀 받들겠습니다, 폐하.”

“…….”

황금 가면을 쓴 황제는 침묵했다.

하지만, 재상은 망설임 없이 바로 다음 안건을 가져왔다.

“그러면, 다음 안건입니다. 실은, 이 건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노여워하실 것 가져오기 망설여졌습니다만-”

“어서 말해보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크흠!”

한번 목을 가다듬은 후, 재상은 고했다.

“최근 황궁 안 밖으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합니다.”

“-흉흉한 소문?”

“네. 전하께서 아끼시는 비서관, 아렌공이 실은 황궁의 실세이며 주어진 것 이상의 권세를 누리고 다닌다는 내용인데-”

“과연. 흥미롭구나.”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무관심으로 대했던 황제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본래 이런 소문은 시작이 중요한 법. 아무리 약간의 의혹도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가곤 합니다.”

“그러지. 앞으로 아렌을 멀리-, 아니지. 멀리 귀양이라도 보내면 되겠나?”

“-네?”

전혀 뜻밖의 말인 듯 재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미, 황궁에 그런 허튼 소문을 내는 자들을 엄히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습니다. 먼저 조치한 후 후에 보고하는 격이오나, 워낙 터무니없는 헛소문인지라.”

“…아아, 그렇군. 자네의 생각이 맞네. 다만, 소문을 퍼트린 자는 그냥 황궁에서 내보내게.”

“네. 죄의 경중을 생각하여 양발의 힘줄을 잘라서 내보내겠습니다.”

“…아니,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상태로, 제 발로 내보내게.”

“알겠습니다, 폐하.”

재상은 대답했지만, 황제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황제는 첨언 했다.

“말도 할 수 있어야 하네.”

“말씀 받들겠습니다.”

“양손도 매듭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해야 하고.”

“과연,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겠습니다, 폐하.”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생각도 이전처럼 또렷해야 하네. 피부에 흉이 져서도 아니되고 고통을 느끼지도 않아야 해.”

여기서, 제국의 나이 든 재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뢰기 황송하오나, 무슨 수수께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하오면 세치 혀로 전하와 아렌 공을 능멸한 무도한 자를 어찌 벌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짐의 말은, 벌하지 말고 그냥 보내라는 말이었다.”

“오오! 과연!”

재상은 크게 놀라 앞으로 절하며 말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그런 극악한 악인도 필시 감격할 것입니다!”

“…아닐세. 모두 짐이 부덕한 탓인 것을.”

황금 가면을 쓴 황제는 재상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금면병에 둘러싸여 황금 가면을 쓴 남자는, 황제의 비서관이자 일개 가신에 불과한, 아렌이었다.

아렌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진짜 황제, 레온나토스를 향해 속으로 투덜거렸다.

‘레온나토스, 이 자식이. 감히 날 대신 앉혀?’

누군가는 한 번 앉아보는 것이 소원인 황좌는 아렌에게 그저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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