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내가 몇 번이나 회귀했냐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래. 얘기했었지. 그럼 질문을 바꿀까? 대체 넌, 이 광경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본 거냐.”
“-글쎄.”
아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우선은 네 형님부터 찾아볼까?”
“…….”
“걱정 마. 라이안을 찾으면 말해줄 테니. 실은 라이안에게도 말해주고 싶은데, 두 번 수고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 말에 레온나토스도 얌전히 흩어진 시체들 사이를 수색했다.
형체가 온전한 자들은 이미 그 수가 절반 이하. 그들 중 숨이 붙어있는 자를 찾는 작업이었다.
쳐다보기도 싫은 사체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곤란한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툭.
아렌의 지팡이에 무언가가 걸렸다.
형체를 온전히 유지한 몸이 아렌의 지팡이에 움찔, 몸을 떨었다.
“-죽은 척하는 거야? 아니면 대꾸할 기력도 없는 거야?”
“…으으.”
레온나토스의 병사들 100여 명이 함께한 수색인데도, 정작 라이안을 발견한 건 얄궂게도 아렌이었다.
그의 몸은 불에 그슬렸고, 증기를 너무 들이마셔 성대도 부어올라 있었다.
겉보기에는 주변에 널린 시체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라이안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몰살한 곳에서 그 홀로 살아있다는 사실부터, 아렌의 언령이 확실하게 작동했다는 증거였다.
“…형님?”
멀리서 달려온 레온나토스가 처참한 몰골의 라이안을 보고 숨을 삼켰다.
“어째서- 형님이 살아계신 이유는 알겠다. 네 언령 때문이겠지. 하지만 네 묘사대로라면 다치지도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언령에 의해 보호받는 형님은 어떤 고수도 상대할 수 없다고 한 건 바로 아렌 너다! 칼에는 찔리지 않아도 불에는 데인다는 말인가?!”
“레온나토스, 네 말이 맞아. 칼에는 맞지 않는데 불과 증기에는 데인다, 모순이지.”
그리고, 아렌은 그 모순을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 모순이 일어났어. 그 이유는, 라이안의 상상력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눈먼 칼이 자신을 찌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흔쾌히 상상할 수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부하들이 쪄 죽으면서 열기까지 느껴지는 상황에서, 자신만 무사할 거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었겠지.”
“…상상력? 그 이야기가 지금 왜 나오는 거지?”
“이야기해주지. 너도 궁금하지 않나, 라이안?”
여기까지 내려온 목적은 라이안은 이미 찾아냈다.
병사들 몇은 들것을 가지러 지상으로 올라갔고, 나머지는 흩어져 주위를 경계했다.
광장 주변에 남은 인원은 자연히 아렌과 레온나토스, 라이안 셋뿐이었다.
“…이제 말해주게, 아렌. 자넨 몇 번이나 회귀한 거지?”
“난 라이안처럼 병적으로 회귀하지는 않았어. 대략, 20번 정도일까?”
아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쓰러져있던 라이안이 대꾸했다.
“그건, 불가능하다. 네놈이 이곳에서 내 심장을 찌른 후, 바로 다음이 지금이란 말이다! 내가 기억 못하는 회귀가 그만큼 일어났을 리 없어!”
“글쎄, 그럴까? 사실은 네가 기억못하는 회귀가 존재하지 않나?”
“…?”
“가령, 너의 69번째 회귀를 기억하나? 네 모함에 빠져 목이 잘린 날, 그때 넌 어떻게 70번째 삶을 살 수 있었지?”
“그건-”
라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예전 라이안이 문득 떠올렸던 의문이었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라이안은 그 의문을 머릿속 한편에 치워뒀다.
“미리 답을 주지. 사실 넌,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던 것이 아니야. 단지 현실에 한없이 가까운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을 뿐이지.”
“…꿈? 꿈이라고? 이 고통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지만,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그래도 다행이지 않나? 네가 파리보다 하찮게 죽이던 자들이, 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아렌의 말은 라이안만 놀라게 한 것이 아니다.
아렌의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의 눈도 전에 비할 수 없이 크게 떠졌다.
레온나토스가 말했다.
“…그럼 나도 꿈속 인간이라는 말이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난 생각할 수 있고 자아도 있단 말이다!”
“물론 그렇겠지. 그것까지 완벽히 구현되어 있을 테니. 지금 라이안이 꾸는 꿈속은 실제로 일어날 일을 아주 잘 구현해놨을 테니까.”
운명석으로 빈 소원으로는,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유랑족 주술사가 아렌에게 한 말이었다. 아렌은 오랫동안 답을 찾았고, 이게 아렌이 내놓은 해답이었다.
“라이안이 운명석으로 빈 소원이 무엇인지는 몰라. 하지만 유추할 수는 있지. 제 입으로 최적의 미래를 찾겠다고 했으니까. 시간을 반복해 자신에게 가장 최적의 미래로 향하겠다면, 그건 굳이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환상을 보거나, 꿈을 꿔도 해결되는 일이니까.”
힌트는 곳곳에 있었다.
아렌의 언령은, 대상에게 직접 말해야만 통했다. 적어도 아렌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사경을 헤맬 때 아렌은 황제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도 언령으로 그를 살려냈다.
‘대상에게 직접 말해야만 적용된다’는 법칙을, 그때는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원래도 언령의 법칙은 없었다.
단지 아렌 스스로가 그것이 법칙이라 믿고 따랐을 뿐.
“이제는 언령을 상대에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돼. 단 라이안에게만은 직접 말해야만 통했지. 그 이유는, 라이안도 마찬가지로 이 꿈 세상 속의 유일한 인간이기 때문이야. 내 점괘가 적힌 종이를 보고 라이안은 불사를 얻었지만, 실은 반대지. ‘내 점괘가 실제로 이뤄진다’는 사실 그 자체가 녀석을 얽매고 있는 거야.”
사실은, 아렌에게 ‘말한 대로 이뤄지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신의 자각몽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아렌은 스스로 생각하게 된 자신의 룰 속에서 어렴풋이 꿈속 서사를 바꿔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안에게 그런 힘이 없었던 것은,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왔고 지금이 현실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유랑족 주술사의 말이 맞았던 거야.’
아렌은 라이안에게 물었다.
“라이안. 네 69번째 삶에서, 내 목을 잘랐을 때를 기억하나? 그 이후의 삶은 어땠지?”
“…69번째 삶?”
라이안이 변덕을 부려 아렌에게 누명을 씌워 목을 잘랐을 때였다.
그때라면 라이안도 전에 어렴풋이 기억이 있었다. 아렌의 목을 자른 뒤, 마치 가위로 자른 듯 기억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한때 그 사실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라이안은 결국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머리 한편에 밀어두었다.
“그 음모에 휘말려 목이 잘리기 전에는, 나도 네 꿈속 인물 중 하나에 불과했겠지. 하지만 그 순간 나도 네 꿈속 인물로 편입됬고, 내가 죽어도 회귀는 진행됐어. 그리고, 네 꿈의 불청객인 내 주도로 회귀했을 때는 네게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더군.”
라이안의 69번째 회귀에서 아렌의 목을 자른 후의 기억이 없는 것과 같았다. 라이안의 꿈을 정교한 각본이라 한다면, 아렌은 존재 자체가 즉흥 연기나 마찬가지.
즉흥 연기에 의한 회귀를 라이안의 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아렌의 말을 들은 라이안이 발밑에서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불에 익어버린 채 방치된 근육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래, 이게 꿈인 걸 알았으니, 좀 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나? 특히나 이건 네 꿈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겠지. 사람의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고, 통증보다 더한 실감은 없으니까.”
이미 아렌은 몇 번의 검증을 끝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라이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을 꿈이라 인식하지 못했다.
라이안을 지하 유적에 몰아넣은 뒤, 몇 번의 시도가 있었다.
때로는 아래의 배수를 막지 못해 수몰과 화공이 물거품이 되었고, 때로는 수로를 완전히 막아버려 물이 빠지지 않아 난감할 때도 있었다.
라이안 휘하의 부하들을 모두 전멸시킬 만큼 물을 불어나게 하면서, 나중에 물이 빠지게끔 배수로를 적당히만 막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꽤나 애먹었어. 라이안 너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렌은 단도로 황자의 눈을 도려냈다.
“으, 으가아아악!”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잖아? 네 꿈에 멋대로 들어와서 고생한 건 오히려 이쪽이라고?”
아렌은 피 묻은 단검을 거뒀다.
라이안의 왼쪽 눈에서 뽑아낸 안구는, 유리와 흑옥으로 정교하게 가공된 의안이었다.
그리고, 안쪽 깊숙이 담긴 흑옥이 바로 라이안에게 몇 번이고 꿈을 꾸게 한 운명석이었다.
“전에는 이 돌을 깨면 어떻게 되느냐도 의문이었지. 지금은, 나름의 답을 구했지만.”
회귀는 항상 특정한 시점으로만 되돌아갔다.
아렌은 10살 무렵, 황궁 최하층의 주방.
라이안은 그 무렵 있던 도국의 작은 방으로.
사실은 그때가, 라이안이 운명석과 계약한 시점이라면.
이 돌을 깨면 꿈에서 깨어나고,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
“아쉽게도, 운명석이 깨지면 그 능력도 잃지. 다시 돌아간 네 기억이 온전하다면 너도 잃은 건 없는 셈이지만… 과연 네 기억이 온전할까?”
라이안은 안간힘을 짜내 푹 익은 성대로 말했다.
“…넌, 마음에 들지 않았나? 권태로움만 극복하면, 이 꿈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데. 네놈에겐 그런 욕망도 없었나?”
“흠, 욕망이라.”
라이안은 아렌이 전혀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실은 그 질문이야말로 아렌에게 무의미했다.
“라이안.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이 꿈속으로 편입되었는지, 내가 나도 모르게 운명석에 빌었던 소원이 무엇인지 말야.”
목이 잘리던 순간 아렌이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되뇌었던 소원.
그것이 무엇인지, 아렌은 지금껏 줄곧 고민하고 있었다.
라이안을 궁지에 모는 과정에서 20번이나 연거푸 회귀하고 나서야, 아렌은 어렴풋이 답을 찾은 것 같았다.
“날 궁지에 몬 흑막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게 내가 빌었던 소원이야. 그런데, 내가 너와 공존하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겨우, 한번 목을 자른 것뿐으로? 네 말대로라면 어차피 꿈속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목이 잘린 것도, 이 꿈에 편입된 것도 결국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일에 휘말린 것 뿐이야. 이제 그런 일은 사양하겠어.”
아렌은 말했다. 바로 옆에 레온나토스가 있었지만, 아렌은 개의치 않았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내가 황궁의 흑막이 될 거다.”
“잠깐-”
아렌은 곧바로 의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 의안은 바닥에 엷게 퍼진 살점 위에 다소 둔탁하게 떨어졌고, 아렌은 스스럼없이 그 위에 발을 내디뎠다.
콰직, 하는 다소 기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라이안의 운명석은 파괴되었다.
“-아렌?”
놀라서 돌아보는 레온나토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눈을 감든 떴든 마찬가지였다.
아렌을 감싼 세상이 빙글빙글 회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