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아렌에 흘려보낸 물은 점점 거세게 경사로를 흘러갔다.
별로 신경 쓸 것 없는 작업같았지만, 어째서인지 아렌은 손에 작은 모래시계를 쥐고 있었다.
“…지금쯤인가?”
아렌은 아래를 향해 쏟아지듯 내려가는 물줄기에, 레데에서 공수한 바다 용암을 풀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물에 검붉은 막이 생겨났고, 아렌은 가져온 항아리를 다 부을 때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한 병을 부을 때쯤.
아렌은 옆에 있는 병사의 횃불을 뺏어 아래로 던졌다.
화르륵, 불붙은 바다 용암은 뱀의 혓바닥처럼 경사로 곳곳을 핥으며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이게 아렌 네 목적이었나? 형님을 지하에서 산채로 삶아 죽이는 것이?”
“비슷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말했잖아? 안쪽의 배수 시설은 완벽하다고.”
아렌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다음 번 차례였다.
이번에 아렌이 가져온 건, 도국의 가면 장수들이 몰래 들여온 금속 가면.
주석으로 만들어진 가면은 입과 눈 부분이 모두 막혀있어, 중앙이 오목한 배 형상이라 물에도 띄울 수 있었다.
아렌은 천천히, 속도를 유지한 채 아래로 가면을 흘려보냈다.
여기서부터는 하는 일 없이, 아렌의 관찰자가 된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왜 가면을 흘려보내는 거지? 가면으로 배수로를 막을 생각인가?”
“그게 목적이냐면, 맞아. 하지만 그냥 가면을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이런 가면으로 배수로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잠시 생각한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가면 정도 크기의 물건으로 막힐 만한 시설이었다면, 수백 년간 지하에 있던 시설은 이미 수몰되고 없었을 테니까.
“그래, 불가능하더군. 웬만한 장애물 따위론 아래 배수 시설을 막을 수 없어. 흘려보낼 수 있는 물의 양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니, 불의 힘을 빌려야 하지.”
“…?”
아렌이 준비한, 몇 상자나 되는 가면들이 전부 아래로 떠내려갔다. 그 중 몇몇은 뒤집혀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그럼에도 물의 흐름이 있어 아래까지는 순조롭게 닿을 것 같았다.
아렌은 다시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이게 막 하는 작업같지만, 의외로 신중해야 하거든?”
그 말대로, 레온나토스가 보기에도 아렌은 면밀히 시간을 재가며 순서대로 바다 용암과 주석을 넣고 있었다.
‘…시간계산을 하고 있다, 는 건 알겠어. 그런데 대체 뭘 계산하는 거지?’
내부의 사정을 완벽히 아는 것이 아닌 한 어떤 모의실험도 실전 앞에선 무의미했다.
아렌이 흘린 마지막 가면이 물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생각이 깊어진 레온나토스의 시선은 경사로 안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렌이 물었다.
“시선이 여기서 떠나질 않네. 왜, 안이 어떤 상태일지 궁금해?”
“…그야, 조금?”
“하지만 안됐네. 지금 당장 내려갈 순 없을 거야.”
“지금 당장 안된다면, 언제쯤?”
곧 아렌이 대답했다. 생각보다도 긴 시간에 레온나토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글쎄, 한 사흘 쯤?”
*****
통로에서 솟구친 물이 지하유적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뒤 차례대로 바다 용암도 섞여들어 왔고, 곧 거센 화염이 물길 위를 가득 채웠다.
“전하, 불입니다.”
“내 눈에도 보인다. 그래봤자 무슨 상관이냐. 유적의 배수 시설은 완벽한데. 아무리 애를 써도 지하유적은 수몰시킬 수 없어. 불길도 물 위에만 얌전히 모여있을 뿐이겠지.”
라이안의 말대로였다.
불어난 물은 그대로 배수로를 통해, 지하의 수로를 통과했다. 물의 위에 떠 있는 바다 용암은 그대로 남았지만, 수로가 범람하지 않는 한 바다 용암 역시 배수로 위에만 모여있을 뿐이었다.
“아렌 짓이겠지? 설마 이 다음엔 무언가 부유물이라도 흘려 보낼 셈인가?”
라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에서 떠내려온 무언가가 수로 위의 화염과 섞였다.
라이안은 실소했다.
“허, 이게 아렌 네 놈의 최선이라면, 실망이 큰데.”
물 위로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의 부피는 한정되어 있다. 오랜 세월동안 수몰되지 않았던 공간의 배수시설이, 그렇게 쉽게 막힐 리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그 부유물이 무엇인지는 확인해야 했다.
자신의 몸이 화염에 휩싸일 위험을 무릅쓰고, 단심병 하나가 화염 가까이 접근해 부유물의 정체를 보고했다.
“떠내려온 건, 가면입니다. 금속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금속?”
자신이 황도에서 모습을 감추기 전, 라이안 또한 장수로부터 가면을 구입했다. 가면은 여느 가면과 마찬가지로 색을 입힌 나무 재질이었다.
‘…왜 하필 금속이지?’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보통은 찾아보기 힘든 금속제 가면을 대량으로 떠내려 보낸다니, 임기응변으로 갑작스레 시도할 방법은 아니다.
분명, 아렌은 특정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라이안으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평소라면 자신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지금을 순수하게 즐겼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즐겨지지 않았다.
라이안이 홀로 고민하는 동안에도 주석으로 만든 가면은 물 위를 떠내려왔다.
가면은 그대로 흘러 내려와, 배수로 위에 모여있는 바다 용암 사이에 멈췄다.
바다 용암의 열을 충분히 받은 주석 가면은 어느새 녹았고, 배의 형태를 잃은 주석 용액은 물의 흐름에 따라 배수로 아래로 흘러갔다.
하지만, 불에 달궈져 녹았던 주석은, 끓는 점 아래의 물 아래로 푹 잠기자 급속도로 다시 굳었다.
주석 용액은 지하 배수로의 벽 이곳저곳에 달라붙은 채 그대로 굳어, 거센 물줄기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위에 다시 녹은 주석이 엉겨 붙었고, 굳기를 반복했다.
지하 유적의 배수 시설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그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전하. 물이.”
흑사자 기사단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지하 공간에 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불에 녹은 주석이 아래로 잠길 수록 수위는 점차 올라갔고, 이제 물 위를 떠다니던 바다 용암이 점차 배수로 바깥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모두 배수로에서 떨어져라. 최대한 고지로 올라와.”
라이안이 내릴 수 있는 명령은 그것이 고작.
그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었다.
이미 올라가는 길은 화염을 머금은 물이 막아섰고, 배수로는 이미 범람해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지하 광장의 외곽지역부터 서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의 고리, 그 위를 떠다니는 불의 고리가 서서히 라이안 황자와 그 병사들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병사들과 기사들은 더더욱 라이안을 중심으로 뭉쳤지만, 외곽에 있는 병사는 이미 위태로웠다.
이윽고, 단심병 하나가 불길에 휘말렸다.
-펑!
고열을 이기지 못하고 단심병의 도자기병이 깨졌다. 그가 가지고 있던 바다 용암은 삽시간에 폭발해 꺼지지 않는 불꽃을 자신의 살점과 함께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 이후는, 폭발의 연쇄나 다름없었다.
펑, 퍼펑!
축제날의 폭죽놀이처럼, 지하 광장의 사방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완벽히 세뇌된 단심병은 그런 와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지만, 정신력이 강철과도 같은 흑사자 기사단조차 지금 상황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물은 지금도 점점 차오르며, 불과 함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무리겠군.”
물 위에 얇게 펴진 불은 바로 아래의 물을 끓였다.
불이 가까워질수록 습기 찬 열기가 안을 가득 메웠다. 지하 유적 안은 서서히 거대한 찜통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뜨겁군.”
자신의 몸에 칼은 닿지 않지만, 증기로 인한 뜨거움은 느껴졌다.
하나둘, 비명소리와 함께 흑사자 기사단이 삼켜졌다.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을 자각하자, 라이안은 처음으로 그들이 부러웠다.
“…젠장, 죽을 수 있어 좋겠군.”
라이안은 아렌이 내린 언령으로 인해, 축제기간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안은 자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불꽃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의 용기 때문이 아니었다.
라이안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절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
3일이 흘렀다.
수확제의 마지막 날, 이미 지상은 하늘이 맑게 개어 해가 비치고 있었다.
어제부터 아렌은 비 나그네를 다른 지역으로 돌려보냈고, 아래로 흘려보내던 물도 그만둔 상태.
아렌은 여전히 지하수로 아래에서 아래쪽의 수위와 불길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음, 이쯤이면 되었을까? 한번 내려가 보자.”
“…그러지.”
태연하게 말한 아렌과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한 레온나토스는 자신의 호위들과 함께 그슬린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물을 따라 곳곳을 할퀸 바다 용암은 유적의 곳곳을 그슬리고, 녹였다. 다만 유적이 석재구조물이라 구조가 약해지지 않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보는 불의 흔적은, 꽤나 으스스하군.”
“확실히. 하지만,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레온나토스. 이 안쪽은 더 처참하니까.”
아렌의 말대로였다.
다다른 유적의 최하층, 광장 부분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불에 탄 수많은 시체들 중 대부분은 원래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300명이나 되는 단심병 대부분은 지니고 있던 바다 용암의 폭발로 인해 몸이 사방으로 비산되었으니까.
그나마 남은 살이 완전히 타올라 탄화되었다면 차라리 괜찮은 편이었다.
열기에 피어오른 수증기에 살이 쪄지듯 익은 뒤, 그대로 습기와 고온 속에 방치된 유해들의 대부분은 이곳저곳에 곤죽이나 다름없이 걸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흘러들어오던 물이 줄어들자 수위는 완전히 내려갔고 그제야 바닥이 보였다.
“…이곳 어딘가에, 형님이 살아계신 건가?”
절대로 이 광장을 수색하고 싶지 않았다. 레온나토스의 호위라면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예이지만, 누구도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보고 구토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건 레온나토스도 마찬가지였다.
위엄을 갖춰야 하는 황자가 병사들 앞에서 속을 게워냈지만, 아무도 황자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니까.
“…….”
다만, 아렌만이 가져온 지팡이로 유해들을 들추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고… 뭘 멍하니 있는 거야? 일단 사지가 멀쩡한 녀석들부터 들춰서 살펴봐. 이들 사이에 라이안이 있을 테니까.”
내려올 때 레온나토스가 아렌에게 가졌던 의혹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레온나토스는 병사들을 광장 사방으로 퍼트렸다. 병사들은 참을 수 없어 하면서도 삶아진 시체의 뻘밭을 지나갔다.
아렌과 레온나토스 주변이 한산해졌다.
“…아렌?”
레온나토스의 부름에 아렌이 뒤돌았다.
“뭐지?”
레온나토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솔직하게 답해다오. 지금 넌, 몇 번이나 회귀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