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라이안은 어둠 속에 있었다.
지하 유적의 넓은 광장에 아직 횃불은 밝혀두지 않았고, 돌을 따라 울리는 지표면과 수로의 물소리가 은은하게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손길도 없이 오랜 세월 지하에 존재했던 지하 유적은 지상에 비가 내린다고 해도 끄떡 없을 것이다.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온 라이안이 검증, 또 검증한 부분이니 믿을만했다.
“…전하, 이곳은 대체?”
하지만 라이안의 참모는 처음 온 장소이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놀라지 마라. 짐이 몰래 알아둔 장소다.”
“미리 알고 계셨다니, 대체 언제 말씀입니까. 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전하.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다르신 듯합니다.”
“또 그 소리인가?”
“…또, 라니요?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라이안이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져, 임기응변을 보이자 참모는 어김없이 전과 같이 반응했다.
그럴 수밖에. 참모에게 라이안은 항상 정확한 판단만을 내리며, 그 결정에 어떠한 사적 감정도 반영하지 않는 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가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선택을 연거푸 저질렀다.
물론, 참모가 알 리 없었다.
사실 이번 삶에서 라이안이 진정한 의미의 선택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 목적은 자신의 예측에서 완전히 빗나간 삶을 기쁜 마음으로 관측하는 것임을.
“…밖에는 지금도 기이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체 모를 지하시설에 오래 머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이곳의 배수 시설은 완벽해. 저 따위 비로 이곳이 곤궁에 처하지는 않을 거다.”
“…그건 또 언제 시험해 보셨습니까?”
“직접 겪어보고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
참모는 고개를 저었다. 단지 수확제 기간 동안 비가 내렸을 뿐인데, 자신이 알던 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전하! 숨기고 계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허,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네?”
푹, 다시 황자의 칼이 참모의 몸을 꿰뚫었다.
전혀 예상 밖의 공격에 참모는 약간의 신음만 흘릴 뿐, 날카로운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바닥에 허물어졌다.
“자네가 날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네. 아마 자네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지. 자네가 하는 모든 말은 이미 들어본 적 있고, 기억하고 있어.”
“…….”
바닥에 쓰러진 참모에게서 더이상의 대꾸는 없었다.
그 대신, 라이안의 시선은 지하 유적의 광장에 목석처럼 서 있는 병사들을 향했다.
그 병사들에게 반문 따위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명령만을 이행하는 최강의 병사, 단심병이었다.
“조언은 필요없다. 이미 내가 알아야 하는 것과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알고 있어.”
지상의 거센 폭우 때문인지 지하 공간에도 약간의 습기가 차올랐다.
수분을 머금은 서늘한 바닥에 방치된 참모는 내버려둔 채 라이안은 외쳤다.
“횃불을 밝혀라! 다시금 연기로 놈들을 아래로 끌어내는 거다.”
물론, 그들이 순순히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실패했는데, 같은 수를 쓰지는 않겠지.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다. 네놈이 내게 준 유예지. 아렌.’
라이안의 불사가 유지되는 기간은 수확제인 단 7일 뿐.
지하에서 며칠만 더 기다린다면 라이안은 다시 죽어서 회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아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과연, 어떤 식으로 나올지.’
자신이 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아렌이 어떤 식으로 대응해올지 몹시 기다려지는 라이안이었다.
*****
아트마 교국의 주교, 아르테는 레온나토스가 붙여준 시녀, 몰디나의 안내를 받아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저 한가한 황궁 구경은 아니었다. 아르테는 황궁 곳곳을 누비며, 이따금 사람들을 지목해냈다.
“이자, 그리고 이자입니다.”
“이 사람도 잡아가세요.”
아르테가 지목한 사람은 뒤따르는 근위병이 압송해갔다. 지목당한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근위병에게 끌려갔다.
“…이래도 되나 몰라?”
황제의 부탁으로 진행하는 일이긴 하지만, 막상 부탁받은 일을 하는 아르테는 영 이상한 기분이었다.
제국과 아트마 교국은 이웃국이긴 하지만, 빈말로도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다.
그런데 교국의 수뇌부인 아르테가, 제국의 황궁 한가운데에서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추려내고 있다니.
아르테가 추려내는 사람들은, 모두 실각한 황자, 라이안과 조금의 연이라도 남아있는 자들이었다.
몰디나가 물었다.
“저 자들이, 모두 라이안 황자의 간자들입니까?”
“아뇨, 모두는 아니에요. 그 중에는 라이안 황자에게 조금이라도 호의를 남겨둔 자들도 포함시켰죠. 간자, 라고 할 만큼 중요한 정보를 가진 자들은 없었어요.”
“그렇군요.”
“방금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라고 생각했죠?”
“-송구스럽습니다. 속마음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몰디나는 고개를 숙였다. 원래는 황녀 세리엔의 시녀였지만, 아렌이 그녀의 점술 실력을 높이 사 레온나토스에게 천거한 자였다.
황궁에서 그녀는 아렌만큼의 위상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그 점술로 레온나토스에게 길을 제공했다.
그런 만큼 교국의 수뇌부 앞에서도 당당할 만큼의 담력이 그녀에겐 있었다.
“아뇨. 물론 이해합니다. 어차피 제가 어떻게 말하든, 제국으로선 제 말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닌가요?”
몰디나는 속마음이 훤히 드러난 것을 알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폐하께서는, 어쩌자고 이 요물의 도움을 받고 계시는지.’
“그야, 이 황궁에 저보다 더 큰 요물이 있었으니까요. 제 도움을 구할 만큼요.”
“…방금 제 속내는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말을 주의해주시지요. 비록 이렇게 되었으나. 실각당하신 분은 제국의 가장 큰 황자셨습니다.”
“네. 지금은 황제 폐하께서 친히 숙청하길 원하는 자이지요. 그가 제 상전이었던 적도 없고요.”
‘…교국의 여우가- 앗, 죄송합니다.’
“뭘요. 소리 내어 못하는 말은 속으로라도 삭여야 하는 처지를 이해하는걸요.”
“…….”
두 여인 사이의 기싸움은 불꽃이 튈 듯 뜨거웠다.
그때, 그녀들의 앞을 제5 황자 고드프리가 지나갔다.
“…수고들 하시는군.”
고드프리는 얼굴을 굳히고 냉랭한 표정으로 둘의 앞을 지나갔다.
태양교에 귀의한 그이기에, 아트마 교의 사제인 아르테 앞을 지날 때는 거친 심사를 숨기지 않았다.
“전혀요. 제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니, 이런 영광이 또 없는 걸요.”
하지만 아르테에게 아무리 선명한 적의를 부딛쳐봤자, 그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아르테에겐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 뒤로도 황궁 곳곳을 둘러본 뒤, 몰디나는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이만하면 대강의 장소를 다 돌아본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제 마음이 실시간으로 읽힌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걱정이 많으시군요. 제게 들켜서 나쁜 생각은 별로 하지도 않으셨으면서요.”
“…….”
아르테는 몰디나의 속마음을 읽고 말했다.
“그리고, 절 너무 고까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번 수확제에서, 제가 한 일은 별것 아니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르테는 말했다.
“이번 수확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황궁 밖에서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요.”
*****
불어난 물에 의해 지하 유적으로 향하는 입구의 수량은 폭포처럼 불어나 있었다.
그 물을 맞으며 안으로 진입하는 것도 부담인데, 그 앞에 선 아렌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밑으로, 안 내려간다고?”
레온나토스의 반문에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려가봤자 좋을 것 하나 없어. 세 황자가 연합해서도 무리였는데, 괜한 짓 할 필요 없지.”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당장 아렌 네가 그렇게 언령을 걸어두지 않았나.”
“물론이지. 애초에 내가 왜 도국까지 갔겠어?”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이 비를 부르고 싶었던 것 아닌가? 아니면, 형님에게 언령을 걸 서신을 써야 했다거나?”
그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도시국가 레데의 비전, 바다 용암.
바다 용암의 조합법은 라이안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의 병사들이 무장하고 있었다.
아렌은 그 사실을 방문한 레데에 흘렸고, 레데의 밀정은 집중적으로 라이안을 살폈다고 한다.
결과는, 진실.
라이안이 한 번도 그런 불꽃을 사용한 적은 없지만, 라이안이 비밀리에 기르는 병사가 항상 용도를 모를 항아리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레데의 밀정은 목숨을 걸고 단심병의 막사에 숨어들어, 그들이 찬 항아리의 성분을 알아냈다.
원래 바다 용암은 외부인에게 빌려주지조차 않는 비전 중의 비전이었다.
천에 하나, 억에 하나 성분을 역분석해 조합법을 알아낼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레데는, 역분석의 위험성보다 이미 조합법을 알고 있는 라이안을 죽이는 것을 택했다.
바다 용암을 빌려주면 이쪽에서 라이안을 죽여주겠다는 아렌의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미켈 랜돌프의 보증과 도국 고위층 사이에 암암리에 퍼진 아렌의 명성이 합쳐져, 아렌은 제국 안으로 대량의 바다 용암을 들여올 수 있었다.
아렌은 말했다.
“내가 회귀한 역사에서, 비 나그네가 레데의 손에서 벗어나 제국의 수확제에 참가한 일이 있었지. 그때는 가면을 쓰는 유행이 없었어. 라이안은 곧바로 비 나그네를 잡아들이고, 황궁에서 목을 잘라 죽이지. 비 나그네를 살려두려면 멋대로 황도로 보내면 안되었고, 황도로 보내도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었지.”
혹여나 비 나그네가 도망치지 않도록 그에 대한 처우를 달리 하게 한 것도 주효했다.
사실상 하는 일은 다를 바 없었지만, 감시와 보호는 받아들이는 느낌부터 다르다. 비 나그네는 훨씬 안정감을 느꼈다.
“황도에 폭우를 내리게 해서 지하에 물이 들어차게 한다면? 그러면 지하 유적으로 물을 흘려넣기도 좋겠지.”
“그렇게 해서, 모두를 수장시키겠다? 라이안 형님은 죽지 않을테니 나중에 형님만 건져오면 되고?”
“-설마. 오랜 세월동안 물에 잠기지 않은 지하 유적이야. 배수는 완벽하겠지.”
“…그러면?”
“우선은, 아래로 내려가서 정말 이곳에 라이안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어. 난 그사이 준비를 할 테니까.”
“준비?”
레온나토스의 명령에 척후병 셋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 사이 아렌은 지상으로부터 물건을 하나씩 들여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앞으로 전달하는 나무상자 안에는, 가면이 들어 있었다.
“이건, 가면?”
도국의 상인들이 황도에 유행시킨, 동물들의 가면이었다.
“보통 가면들은 나무로 만든 거야. 하지만, 재고 중에는 나무 재질이 아닌 것들도 섞어뒀지. 몰래 가져오기 좋도록.”
“…금속이로군. 철이나 구리는 아닌데-”
“주석이야. 흔히 쓰는 금속은 아니지. 그냥 쓰기엔 너무 물러서 보통은 다른 금속과 섞어 써.”
“그런데, 주석 가면을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
“그래. 다 이유가 있거든.”
그 사이 척후가 도착했다.
아래에서 올라온 연기를 거슬러 내려가 지하 광장과 라이안을 확인한 후였다.
그리고, 아렌은 가면을 담은 상자의 판자를 뜯어, 내려가는 입구를 막은 물길을 아래로 틀었다.
거의 아래로 흐르지 않던 물줄기가 점점 완만한 경사로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좋아. 제대로 만들면 더 많은 물을 흘려보낼 수 있겠군.”
“…방금 아렌 네 입으로 유적의 배수는 잘 되어 있을 거라 하지 않았나?”
“물론이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병사들은 계속 상자를 앞으로 고대로 건냈다.
주석 가면이 들어있던 상자 안 내용물은, 이제 속이 보이지 않는 도자기 병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건?”
“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는 도국의 비전, 바다 용암이라 불리는 물건이야.”
“설마-”
그제야 레온나토스는 아렌의 잔인한 계획을 깨닫고 몸서리쳤다.
하지만 아렌은 변명하듯 말했다.
“…대강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겠지만, 그렇게 잘 되는 건 아닐 거야. 안으로 바다 용암을 흘려보내도, 보통은 배수로를 따라 그대로 흘러 가버릴 테니까. 잘 될지 안 될지는, 어디까지나 반반이라고 봐.”
성공확률은 절반, 혹은 그 이하.
잘 될지는 모르지만, 안 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아렌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안되면, 라이안이 이기는 거지, 뭐. 그럼 다시 시간을 되돌리는 거고.’
자신도 모르게, 아렌은 라이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