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황도 전역에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원래 수확제 개회 연설을 제외하곤, 황가가 딱히 관여하는 것은 없다. 예전, 레온나토스와 엔지가 했던 모의전이 아주 특별한 경우였을 뿐.
레온나토스는 황궁으로 복귀했다.
마침, 라이안이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출궁하려던 참이었다.
“아, 형님?”
“레온나토스인가.”
“어디… 가십니까?”
“네가 일러줬지 않나. 시민들이 가면을 쓰고 축제를 즐긴다고. 거기에 나도 끼고 싶어서 말이다.”
“…지금 말씀입니까?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요. 곧 폐하께서 황자들을 부르실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혹시 모르니 궁에 대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릴 부르셔도 곧바로는 아니겠지.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미리 일러주셨을 테고. 더 어두워지면 오늘의 축제는 즐기지 못해. 마침 오늘이 개회식 아니냐. 금방 돌아오마.”
“형님. 하지만-”
“아니면 뭐냐. 너는 실컷 즐기다 돌아와 놓고, 나는 궁에 틀어박혀 있으라는 말이냐? 폐하께서 부르시면 다녀온 뒤 찾아뵈면 될 일이다.”
“…….”
“그것도 아니면, 혹시 날 궁에 잡아둬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냐? 네 호위들이 잔뜩 긴장했구나.”
레온나토스의 호위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현재 차기 황권 주자로서 서열 3위인 만큼 레온나토스의 호위 수준이 낮을 리 없지만, 라이안의 주변에 있는 건 제국 제일이라는 흑사자 기사단이다.
만약 두 황자가 무력으로 충돌한다면 레온나토스 측에 승산은 없었다.
“…물론, 형님께서 황궁을 떠나시는 것은 자유지요. 누가 감히 형님을 막겠습니다. 단지, 너무 늦지 않게 오셨으면 하는 것이지요.”
“네가 언제부터 날 그렇게 생각해줬는지는 모르겠다만, 마음은 감사하게 받으마. 그럼.”
라이안은 레온나토스와 교대하듯 황궁을 빠져나갔고, 레온나토스는 라이안의 뒤로 늘어선 흑사자 기사단의 긴 대열을 바라봤다.
“…비 나그네를 찾으려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라이안이라 하더라도 지나가는 비 나그네들의 가면을 하나하나 벗기지는 못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짚단 속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
“문제없겠지, 그 정도는.”
레온나토스의 머릿속에 약간의 걱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다.
레온나토스는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도 다시 환궁할 라이안을 기다렸다.
라이안은,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도 황궁에 돌아오지 않았다.
*****
수확제가 열리고 사흘.
레온나토스는 아렌과 아르테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원래라면 라이안의 서슬 퍼런 감시에 황궁에는 발도 들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라이안이, 사라졌다고?”
“그래. 형님이 벌써 이틀째 돌아오지 않았을뿐더러, 어디에 있다는 기별조차 없어. 황도의 관문을 통과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즉, 라이안은 황궁을 빠져나간 뒤 황도 시가지 안에서 완전히 증발해버렸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기사, 병사들과 함께.
아렌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황궁 안을 감회가 남다른 표정으로 둘러봤다.
레온나토스와는 7년 전 만난 적이 있지만, 그 옆의 더글라스는 아렌을 지금 처음 본다.
“…전하, 이 자가 아렌이라는 자입니까?”
“내가 아렌이야. 만나서 반가워, 더글라스.”
더글라스가 황자에게 하는 말에 알아서 대답한 아렌.
더글라스에게 아렌은 초면일 뿐이지만, 아렌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그 온도 차에 더글라스는 두 눈만 끔뻑끔뻑 떴다.
레온나토스가 물었다.
“아렌. 만약 형님이 황도 어딘가로 숨어들었다면-”
“물론 황도의 아래, 지하유적에 있겠지.”
“…지하유적이라. 전에 어렴풋이 말을 듣긴 했었지. 내 나름대로 비밀리에 황도 지하를 조사해보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어.”
“그야 당연하겠지. 라이안은 70번이 넘는 회귀를 통해 알아낸 거고, 레온나토스 너에겐 핀이 없었으니까.”
“핀?”
“있어. 만월강 동부의 도적 출신이. 좁은 곳을 탐사하는 데는 그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여하튼.”
아렌은 자신과 같이 불려온 다른 한 사람, 아르테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우리 둘을 부른 건, 역시 더는 눈치 볼 것 없는 건가? 황제에게 우리를 데려갈 거지?”
아렌의 말에도 아르테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이미 라이안의 마음을 읽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말 대로다. 마음을 읽는 건 아르테라고 들었지만, 사실은 너일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폐하 앞에서도 그런 말투를 쓸 거냐?”
“설마.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가 있는데.”
“…보통은 나이 차 이전에 신분 차를 먼저 고려한다만.”
따지고 보면 방금 만난 더글라스도 아렌보다 훨씬 연상에, 지위도 높았다.
레온나토스는 걱정하며 아렌과 아르테를 황제에게 데려갔다.
황궁 내원의 삼엄한 경비를 통과한 뒤, 안에서 몇이 죽어도 밖에는 절대 새어나가지 않을 것 같은 정원을 지나, 황제의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암살 기도조차 없었기에 아직 기력이 정정한, 서슬 퍼런 위엄을 보이는 브륀할트 8세가 자신의 금면병들과 함께 서 있었다.
아르테와 아렌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황금 가면을 쓴 호위 두 사람 사이에서 황제는 말했다.
“만나서 반갑군, 교국의 주교, 아르테.”
“폐하를 만나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아트마께서도 오늘의 만남을 기꺼워하시겠지요.”
아르테의 말에도 황금 가면을 쓴 세 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긴, 경호를 위해 누가 황제고 누가 경호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끔 설계했는데 괜한 행동을 해서는 기껏 해놓은 안배가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주교 옆에 있는 네놈이 레온나토스의 귀에 이상한 말을 불어넣은 놈이냐? 뻔뻔스럽게 내 앞까지 기어 왔구나.”
황제라면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사람 한 명쯤은 파리 목숨보다 쉽게 끊어놓을 수 있다.
하물며 그 장소가 황궁의 내원이라면. 아렌은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네. 죄송합니다. 날 때부터 제 낯짝이 좀 두꺼웠던 지라, 염치를 모르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요.”
아렌은 황제의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대꾸했다.
아렌을 앞까지 안내한 레온나토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오히려 황금 가면을 쓴 황제의 목소리는 그들의 행동이 기꺼운 듯 조금 들떠 있었다.
“흠. 어린 사기꾼 치고 담력은 있는 것 같군. 물론, 일국의 황제 앞에서 보일 만한 담력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의 옆에 있는 금면병의 기색이 흉흉해졌다.
미동도 하지 않고, 표정마저 가면으로 가렸기에 아렌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변화였지만, 아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폐하. 그러니, 옆에 있는 금면병들에게 살기를 누그러뜨리라 일러주시겠습니까? 셋 중 누가 폐하인지 드러나고 맙니다.”
아렌은 나란히 선 세 명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황제에게 말했다.
이제 황제는 아렌을 더 시험하지 않았다.
“…레온나토스에게 대강의 설명은 들었다. 같은 삶을 몇 번이고 살았다고 했었지. 그럼 나와도 접점이 있나?”
“많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회귀하기 전, 제 목을 자르라 직접 명하신 것이 폐하시긴 합니다만.”
“허, 내가? 하긴, 지금 네 녀석의 말재간이라면 그러고도 남았겠지.”
농담은 거기까지. 황제는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네놈이 이 비를 끌고 온 것이라고 들었다. 왜 그런 짓을 했지? 연단에서 라이안을 바로 잡아들이면 모두 끝날 일이었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제 언령은, 그때쯤 아마 라이안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단에서 황자를 잡아들인다 한들, 그가 자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설명하라.”
황제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아렌은 대신 레온나토스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레온나토스 황자. 당신이 데리고 있는 밀정들은, 모두 무사한가?”
“…어제부터 한 명과 연락이 닿지 않고 있어. 하지만 워낙 은밀히 다루는 자이기에 연락이 없는 것이 그리 특별한 상황은 아니야.”
“만약 그자가 라이안 황자에게 잡혔다면?”
“그때는-, 모든 작전이 드러나겠지. 아렌 자네가 지니게 한 서신도 형님의 손에 들어가겠고.”
“아마 그렇게 됐을 거야. 라이안 황자는, 수확제 동안 비가 오는 것으로 자신이 아는 역사에 많은 개입이 있었음을 확신했을 테니까. 특히 황제 폐하와 레온나토스 황자 사이의 밀정을 사로잡는데 집중했겠지.”
그리고, 아렌은 아르테를 통해 레온나토스가 가장 은밀히 다루는 밀정 세 명에게 각각 맡길 서신을 전달했다.
그 서신은, 아렌이 점괘의 형식을 가지고 종이에 쓴 것이었다.
아렌은 다시 황제에게 고했다.
“라이안 황자가 읽어본 것은, 제가 힘을 담아 적은 언령입니다. 언령의 내용은, 라이안 황자는 수확제 기간 동안은 죽을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적어도 나흘간은 라이안 황자는 자결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무리이지요.”
“…네 입으로 언령(言霊)이라 하지 않았나?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글귀로 적어도 적용되나?”
“네. 이미 실험을 마쳤습니다.”
쉽게 말했지만, 아렌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국 카르도나에 머물면서 실험한 결과 아렌이 점괘의 형식으로 종이에 적은 것은 그 대상이 읽어야만 곧바로 적용되었지만, 아렌의 몸에 무리가 오는 건 종이를 적은 직후였다.
아렌은 같은 서신 세 장을 적는데 거의 1년을 병상에서 누워 보내야 했다.
“…과연. 비를 내리게 한 것은 라이안이 네 언령을 읽게끔 한 미끼이기도 한 것이구나.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라이안이 자취를 감춘 것은 네게도 뜻밖의 일 아니냐?”
“라이안이 앞으로 할 일을 모두 예측한 것은 아니지만, 황도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상한 범주 안입니다. 비록 그는 현재 자결할 수 없지만, 죽을 수 없는 그는 무적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생에서, 그는 자신이 죽을 수 없는 불사임을 이용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습니다. 덫은 최대한 신중한 편이 좋습니다.”
“넌, 방금 덫이 신중한 편이 좋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대안도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대답한 후, 아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생각대로 잘 된다면 말이지만.’
*****
황도 아래의 지하수도는 계속된 폭우로 수위가 한결 더 불어나 있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곧바로 탁한 급류에 휩쓸릴 것 같았기에, 레온나토스는 수로 바로 옆에 가느다랗게 난 인도 위에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정말 형님은 이런 길을 건넌 건가? 자신의 수백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래. 자신밖에 모르는 숨겨진 장소란 이런 때에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렌, 네 말에는 어폐가 있다. 네가 이 장소를 안다는 것을 형님이 알고 있지 않나?”
“물론이지. 그리고, 이전 싸움에서 라이안은 나머지 세 황자의 연합군과도 맞서 싸워 이겼어.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지.”
그때 라이안의 눈을 찌르는 수를 썼더라면 그의 회귀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자들과 아렌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해야 했다.
아렌은 라이안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경우의 수를 택하기 위해 라이안의 눈이 아닌 심장에 박아넣었다.
아렌은 말했다.
“라이안의 약점은, 자기 자신은 결코 적극적으로 미래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결과에서, 약간의 변수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하니까.”
아렌은 물이 훨씬 불어나, 마치 거센 폭포를 연상케하는 지하 유적의 입구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황자는, 이 안에 있어. 하지만 우린 들어가지 않을 거야.”
“뭐? 형님을 쫓지 않을 건가?”
“물론이지. 내가 왜 그 오랫동안 도국에 있었겠어?”
“…언령을 준비하는 동안 지원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그것도 있지만.”
아렌은 수로 안에 마음껏 불어난 물을 보면서 말했다.
“라이안은 죽지 않지만, 그 추종자들은 다르겠지. 내가 느꼈던 감정을, 녀석도 느껴보라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