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더없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거리에서, 레온나토스는 호위와 함께 길을 걸었다.
레온나토스가 쓴 가면과 특징적인 우의로 인해 그가 지체 높은 황궁의 사람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고, 지나는 사람마다 길을 좌우로 터줬다.
레온나토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뜸한 틈을 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으슥한 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건물 앞을 지나간 짐마차가 그 사이를 가렸다.
그리고 짐마차가 지나갔을 때, 건물 틈에서 나온 사람은 전혀 다른 가면과 우의를 쓰고 있었다.
고양이 가면을 썼던 레온나토스는 원숭이 가면으로 바뀌어 있었고, 금색과 붉은 색으로 치장된 우의도 칙칙한 검은 색 우의로 변했다.
그건, 레온나토스를 수행하던 호위들도 마찬가지.
자신에게 붙었을지 아닐지 모를 미행조차 원천 차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거리는 평소 수확제처럼 모든 거리를 메울 만큼의 인파는 아니었지만, 가면과 얼굴 전체를 덮는 머리 두건 덕분인지 비를 맞으면서도 거리를 지나며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화창한 날씨에만 열리는 여느 수확제와 달리, 폭우 속에서 맞는 색다른 수확제가 그들에게는 색다른 즐거움인 듯했다.
레온나토스는 방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황도 안을 잠시 거닐었다.
잠시 뒤.
“…레온나토스 전하.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어느새 레온나토스와 나란히 걷는, 토끼 가면을 쓴 여자가 말했다.
레온나토스 주변의 호위들은 잔뜩 긴장했지만, 다가온 자를 막아서지는 않았다.
다만 토끼 가면이 언제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그를 막아설 수 있도록 행동을 예의 주시할 뿐.
토끼 가면의 등장에 긴장한 건 레온나토스도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아르테 주교인가?”
“네. 그동안 자주 연락을 드렸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 뵙는 건 처음이군요.”
“그래. 교국의 사절과 자네의 밀정이라면 몇 번 만나봤지만 말야.”
“황송합니다. 아무래도 라이안 황자가, 일면식도 없는 저를 노린다기에 황궁으로 직접 가는 것은 조심스러웠던 지라.”
“-라이안 형님인가. 항상 그 형님이 문제로군.”
“네. 물론, 아렌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지만요.”
아르테의 말에 레온나토스의 눈이 반짝였다.
아렌. 아르테와 레온나토스를 연결하는 이름이었다.
“…아르테 자네에 대해서는 아렌에게 대강 들었었네. 그것도 7년이나 전의 일이지만. 자네도 운명석 계약자라고?”
“그렇습니다. 송구합니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전하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을 수 있죠. 네. 전하께서 생각하신 숫자는 3이 맞습니다.”
마음속으로 아르테를 시험해봤던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자네의 실력은 확실한 것 같군. 혹시 내 마음속에 나조차 눈치 못 챈 불쾌한 생각을 보일까 봐, 조금 걱정된다만.”
“걱정 마시지요. 그런 건 보이지 않으니 안심하시길.”
실은 그건 아르테의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레온나토스와 교류한 건 아르테의 밀정일 뿐, 아르테가 직접 레온나토스의 속내를 살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은 레온나토스가 이미 라이안의 수족과 다름없고, 이번 만남이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아르테가 살펴본 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안심과 동시에 또 다른 의문도 생겼다.
아르테는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고작 몇 년 전 며칠 본 게 전부인 아렌을 그토록 신용하실 수 있습니까?”
“하하하.”
레온나토스는 웃었다. 그러자 아르테가 반문했다.
“왜 웃으십니까?”
“그러는 자네도 오랫동안 아렌을 신용해온 것 아닌가? 어떤 담보도 보증도 없는 자를 말이다.”
“…확실히 전하 말씀 대로군요.”
레온나토스에게나 아르테에게나, 아렌이 하는 말은 허황된 것이었다.
설령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라이안의 무한 회귀를 막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라이안이 강자라면 그에게 협력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자결해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마찬가지. 남겨진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라이안이 아닌 아렌을 택했다.
아렌의 말에는 어쩐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불가사의한 설득력이 있었기 떄문이다.
“…어쩐지 홀린 듯 아렌을 지지하게 되더군. 하긴,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우리를 몇 번이고 만난 셈이니까. 어떤 말을 해야 우리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는 우리보다도 잘 알겠지.”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라이안 황자가 훨씬 더 유리하겠죠. 하나 전하께서는 라이안 황자에게는 그리 감화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그렇더군. 형님께선 아무래도 사람보다 사건에 훨씬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으니 말이야. 아니, 정확히는 사람에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 분 눈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어.”
“아, 그래서-”
아렌은 7년 전 헤어질 때, 레온나토스에게 라이안의 회귀한 자인 증거를 찾으면 협력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증거가 있을 리 없었다. 레온나토스는 회귀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대신, 다른 것을 찾았다.
라이안은 언제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기에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단지,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무정물로 취급했을 뿐.
레온나토스가 라이안을 차기 황제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였다.
“…원래는, 폐하께서도 오늘 발표하실 예정이었다. 라이안 황자를 폐위하고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박탈하겠다고. 폐하께도 나와 같은 의구심이 있었던 거야. 조금 간언했을 뿐인데, 곧바로 내 말을 받아들이셨으니까.”
“네. 그리고 거기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교국의 주교인 제가 등장하는 거죠.”
수확제 동안 라이안을 축출하는 계획에는 아르테의 역할도 있었다.
“제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몇 번의 시험으로 금방 증명될 테죠. 제 입으로 말하긴 멋쩍지만, 이건 다른 이를 모함하기에는 최적의 능력입니다.”
비록 라이안의 마음은 읽을 수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르테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녀의 말을 믿어줄 사람 역시 그녀와 한패이므로.
황제가 공표하고 레온나토스가 뒷받침하며, 이웃 나라의 검증된 독심술사가 증언한다면 아무리 라이안이라 해도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하지만, 연설은 이 비로 취소되었군요.”
“그래. 전하께서 공표한 직후 연단에서 라이안 형님을 잡아들였다면 일이 쉬웠을 텐데, 이제는 어렵게 되었어.”
공교롭게도 황제의 연설을 막은 건, 아렌이 데려온 비 나그네였다.
당초 아렌이 세운 계획은 별문제 없어 보였지만, 정작 아렌이 데려온 비 나그네에 의해 그 계획에 약간의 균열이 간 것처럼 보였다.
물론, 광장에서의 연설 없이도 계획은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계획에 비 나그네와 가면은 왜 필요한 거지?”
*****
“읍, 읍!”
황궁 안의 비밀시설을 황제보다도 잘 아는 건 이미 70번도 넘게 회귀한 제1 황자, 라이안이었다.
라이안은 황궁 벽 안쪽 깊숙히 숨겨진 석실에서, 레온나토스와 황제 사이를 오가던 밀정을 붙잡아 결박해두었다.
입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려두었고, 앞으로 뻗은 채 고정된 오른손은 손등이 완전히 절개되어, 안쪽의 뼈가 전부 드러나 있었다.
손목에서 손가락 끝으로 뻗어나가는 다섯 갈래의 뼈가 선홍빛 피부밑에 도드라져 보였다.
밀정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유지했다.
밀정의 의지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라이안이 유도했을 뿐이다.
“어떤가. 고통스럽나?”
“으으읍! 으읍!”
“괜히 물었군. 당연히 그렇겠지. 사람을 다루는 경험이 점차 붙으니, 이런 기술만 늘어나더군. 그 와중 알게 된 것도 있어. 무엇인지 아나?”
-뚝.
라이안은 뼈가 드러난 손등 중심의 힘줄을 툭, 끊어냈다.
밀정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발광했다.
“바로, 고통을 이기는 의지 따위는 없다는 점이야. 고통을 가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했다면, 그건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거나 방향이 잘못되었을 뿐이지.”
밀정의 고개가 격렬히 앞뒤로 끄덕여졌다.
“아아,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하지만 아직은 안되네. 지금 입을 풀어줘도 아마 사실을 듣겠지만,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짐에게 아렌이나, 교국의 주교같은 재주는 없으니 신중할 수밖에.”
라이안은 모든 살이 벗겨진 밀정의 오른손을 물끄러미 보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오른손은 할 만큼 한 것 같군. 이제 왼손 차례인가?”
“으읍! 으읍! 으으읍!”
밀정은 고정된 오른손이 상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뒤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라이안은 비릿하게 웃었다.
“…신중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지금이 반환점일지, 결승선일지 정해질 테니까.”
라이안은 밀정의 입을 막았던 재갈을 풀었다.
드디어, 밀정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앵무새처럼 조잘조잘 토해냈다.
최대한 라이안의 궁금증을 만족시켜서, 더 이상의 고통을 받지 않도록.
차라리 고통 없이 단번에 죽여준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레온나토스 황자는, 아렌이라는 야인과 내통했습니다. 예정되었던 황제 폐하의 연설 내용은 실은 전하의 폐위였습니다. 교국의 아르테 주교가 증언할 예정이었습니다. 제 품 안에, 절대 빼앗기면 안되는, 수취인 없는 서신이 있습니다.”
밀정이 지껄인 말은 라이안의 흥미를 끄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 마지막의 말에 라이안이 반응했다.
“…수취인 없는 서신?”
밀정의 옷 품속, 이중으로 되어 숨겨진 주머니 속에서 단단히 밀봉된 단단한 서신 봉투가 나왔다.
라이안은 곧장 밀봉을 뜯었다.
알록달록한 문양이 그려진 빳빳한 종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초대장이나 주술에 쓰는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라이안은 반사적으로 서신에 적힌 내용을 읽고 말았다.
[셰오덴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 브륀할트는, 제국의 수확제 기간 동안 죽을 수 없다.]
“…점괘?”
모든 점술의 결과를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점괘의 결과를 적은 뒤, 나중에 보게 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하지만-
‘언령이라면서. 직접 입으로 말해야 효력이 생기는 것 아니었나?’
라이안은 곧바로 익숙한 단도를 집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밀정의 손등을 헤집어놓은 단도를 자신의 심장에 겨냥한 후, 빠르고 간결하게 힘을 줬다.
단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하.”
피로 얼룩진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라이안은 날카롭게 웃었다.
직접 말을 통하지 않았음에도 아렌의 언령이 적용되었다.
예상 밖의 사태였지만, 오히려 라이안은 반겼다.
“그래, 지금껏 기다리게 했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렌.”
라이안은 곧바로 석실에서 일어섰다.
묶여있는 밀정이 차라리 죽여달라는 시선으로 황자를 바라봤지만, 이미 라이안은 그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밀정을 남겨두고, 라이안은 석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