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은 황도의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단상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중앙 광장과 사방으로 뻗어나간 각각의 대로(大路)에서는 한해의 수확에 감사하는 수확제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라이안은 옆에 있는 아우,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꽤나 성대하게 열릴 것 같구나.”
“제국의 신민들이 풍족하게 지낸다는 증거이니, 기꺼운 일이지요.”
“물론이지. 그런데, 작년에는 내게 연설을 맡기셨는데 어째서인지 올해는 폐하께서 직접 연설하신다고 하는구나.”
“아, 그렇습니까?”
레온나토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금까지 레온나토스를 경쟁자라 생각해본 적 없는 라이안이지만, 레온나토스의 무반응에는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특히, 아렌과 어떤 접점이 있지는 않을까 의심되는 지금은 더더욱.
‘네가, 언제까지 계속 여유일지 볼까?’
“아마 폐하께선 이번 수확제에서 중대한 무언가를 선포하실 모양이더군.”
“…그렇군요.”
황태자로 책봉될만한 황자는 현재 라이안과 가웨인, 레온나토스 총 세 명이지만, 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은 이미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사실 지금 당장 라이안이 황태자로 책봉되어도, 전혀 어색한 그림이 아니다.
라이안은 레온나토스의 반응을 신중하게 살피며 말했다.
“그동안 레온나토스 너도, 꽤나 노력했더구나. 자신의 세력을 견실하게 쌓았어.”
“말씀 감사합니다, 형님.”
“하지만, 그게 네 한계이기도 하니 얄궂은 일이지.”
“그럴지도 모르죠.”
라이안보다 훨씬 어리고, 출발도 늦게한 레온나토스는 얼마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라이안의 뒤를 맹추격했다.
물론, 레온나토스의 급성장을 보고 지레 황권경쟁을 포기한 테오드릭과, 중간에 생각이 많아져 예전만큼 황권에 집중하지 않는 가웨인의 빈자리가 있기에 가능한 성장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레온나토스의 성장은 거기까지였다.
레온나토스는 직접적으로 라이안에게 대적하려 하지 않았고, 라이안의 세력이 공고한 이상 레온나토스가 올라갈 한계점도 명확했다.
라이안을 넘기 위해선, 그에게 직접 칼을 겨눠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레온나토스는 말했다.
“하지만 형님, 전 제가 굳이 황제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형제들에게 경쟁을 시키는 것은 모두, 가장 제국을 잘 다스릴 자를 뽑기 위함입니다. 가장 뛰어난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이 꼭 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요.”
“…네 포부는 고작 그 정도였나? 네가 그리는 제국의 모습이 있을텐데. 적어도 내가 황제가 된다면, 너와 형제들이 좋은 꼴은 못 볼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폐하께서는, 그것도 고려한 결정을 내리실 테니까요.”
레온나토스는 축제 준비가 한창인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설령, 페하께서 내리신 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에 반기를 들어선 안 되겠지요.”
“…….”
라이안은 침묵했다.
방금 레온나토스의 말은, 마치 이전 삶에서 황제에게 반기를 든 라이안을 겨냥한 말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지나친 기우겠지.’
라이안이 아는 한, 그간 레온나토스가 외부인과 접촉한 일은 없었다. 아렌이 황궁 안의 비밀통로를 통해 레온나토스와 접촉한다면, 라이안의 감시망에 걸려들었을 터.
만약 레온나토스가 아렌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곳곳에서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분명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려는 찰나였다.
-후둑.
-후두둑.
쾌청하던 하늘에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상과 광장 전체에 쏟아지듯 내리기 시작한 비.
빗방울은 거의 아기 손가락만큼의 굵기였고, 하늘 전체에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이 축제 동안은 계속 영향을 줄 것 같았다.
“…비? 이래서야 폐하의 연설은-”
“아마도 취소되겠지요.”
황제가 하려던 연설의 내용이 정말 황태자 책봉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갑작스레 내리는 폭우로 인해, 그 결정은 잠시 뒤로 미뤄진 것이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고?’
수확제의 개최를 알리는 연설이 취소될지언정, 한번 결정된 수확제자체가 취소되지는 않는다.
그런 만큼, 수확제의 날짜는 절대로 대충 잡지 않는다.
애초에 비가 내리는 것이 드문 시기이고, 천문학자가 하늘을 관측하고 면밀히 분석해 큰 비가 오지 않을 거라 예측한 주에 열리기 때문이다.
설령 도중에 한두 번의 소나기 정도는 내리더라도, 수확제를 개최하는 날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건 절대 정상적이지 않다.
‘…비 나그네를 부른 건가?’
이번 생에서, 라이안은 비나그네를 죽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굳이 그를 죽일 필요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놈이 다시 황도에 기어들어 왔다면, 다시 죽여줘야겠지.’
라이안은 폭우 속에서 천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뒤돌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헛! …뭐냐, 그 가면은?”
“최근 황도에서 유행한다는 동물 가면입니다. 귀엽지 않습니까?”
레온나토스는 어느새 품속에서 꺼낸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을 쓰는 것이, 최근 황도의 유행이라고?”
“네. 처음엔 저도 형님과 같은 반응이었지만, 보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유행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라이안은 단상 아래를 바라봤다.
갑자기 내린 폭우로 사람들은 저마다 발걸음을 빨리해 돌아갔지만, 개중에는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나는 사람의 가면을 억지로 모두 벗길 것이 아니라면, 얼굴로 비 나그네를 찾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이건, 대체.”
지금껏 이상한 것이 유행한 적은 몇 번 있었다.
튤립의 구근을 비싼 값에 거래한다던가, 목욕을 하지 않거나.
심지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유행도 있었다. 그때는 동물 가면은 아니었지만.
드물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일만 일어난다면.
하지만 두 가지 우연이 한 번에 겹쳤다면?
여기에는 누군가의 의도가 가미되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국, 아렌인가?’
라이안은 아렌이 그냥 물러났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렌을 찾기 위해 수색해 보았지만, 수도 근처만 깊이 살펴봤을 뿐 외곽일수록 감시의 눈도 약했다.
라이안이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면 아렌을 찾아냈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런 것을 다루는 자리가 아니었다.
‘…좋아. 아렌 네놈이 어떤 안배를 했는지,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겠군.’
그동안 이미 알고 있는 답대로 움직여온 라이안이었다. 드디어 답안지대로의 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라이안은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
닭의 가면을 쓴 아렌은 주점의 창문 밖으로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주점 안, 이따금 지나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좋아. 잘 퍼진 것 같군.’
황도 안에 동물 가면을 유행시킨 건, 역시 아렌이었다.
아렌이 최근 몸담았던 교국은, 여러 창구를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한다.
정보를 구하기 쉽다는 말은, 정보를 퍼트리기 쉽다는 말과도 같았다.
도국의 상인들은 수확제 몇 달 전부터 동물 가면을 아이들에게 유행시키기 위해 애썼다.
몇몇 아이들에게는 무료로 주고, 거의 이윤을 남기지 않는 저가로 아이들에게 가면을 뿌렸다.
아이들에게 유행한 건, 어른들에게도 금방 퍼지는 법.
유행은 아렌의 예상대로, 수확제 즈음해서는 황도를 집어삼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물이 조각된 앞면은 나무고, 정수리부터 뒤통수까지는 커다란 천이 달려 있었다
가면에 달린 천은 비가 올 때 머리가 젖지 않게 해줬고, 비가 오는 날 가면을 쓴 채 거리를 다니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수확제 당일 비가 올 걸 알았던 것처럼.
창 밖에선 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고인 물은 거리를 지나 배수로에 모였고, 축제 전 사람들이 뿌린 종이 꽃가루가 잔뜩 뭉쳐 배수로의 흐름을 막고 있었다.
‘역시 비 나그네야. 그저 그런 비와는 차원이 달라.’
아렌과 비 나그네가 이렇게 자유롭게 황도 곳곳을 누비는 것도, 모두 가면을 쓰는 유행이 생긴 덕분이었다.
아렌은 주점에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
기다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봐, 아렌.”
“뭐야, 아직 가면도 벗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 정도야 금방 알지.”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나?”
“아니. 그 반대야. 마음 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운명석 계약자라 여겼을 뿐이야.”
아르테는 익숙한 모습으로 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레온나토스에겐 우리 밀정을 통해 네 의사를 전달했어. 중간에 발각될 뻔도 했었지만…”
아르테는 아렌의 앞에 앉고, 아렌을 똑바로 주시했다.
아르테는 말했다.
“레온나토스 황자는 아직도 너를 자신의 가신처럼 여기더군. 실제로는 수년 전 며칠 본 것이 전부인데 말이다.”
“그런 고지식함이 레온나토스 황자의 장점이지.”
“그런데 황자는 왜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의 말을 믿은 거지?”
“글쎄. 내가 신뢰가 가게 생겼나 보지.”
“…방금 농담한 것 아닌데?”
“나도 아냐.”
처음에는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아렌의 예언이 전부 들어맞으니 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에도 한계가 있는 법.
“내가 황궁을 나올 때, 레온나토스에게 주문했어. 제1 황자, 라이안을 주시하라고. 그가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일말의 의심이라도 든다면, 내 말을 믿어달라고.”
“결국 레온나토스도 라이안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거야?”
“그래. 어차피 자세한 건 직접 만나보면 알지 않겠어? 서로 만달 계획이 있지?”
레온나토스는 감시당하고 있다. 아르테는 운명석 계약자임이 알려져 황궁에 발을 내딛는 순간 라이안에게 죽임당할 것이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다면 비가 오는 인적 뜸한 거리에서 잠깐 만나보고 곧바로 헤어질 수 있었다.
‘만나보자마자 레온나토스의 진심을 알게 되겠지.’
“아렌, 같이 갈래? 너도 황자를 본지 오래된 것 아냐?”
“됐어. 만나봤자 할 얘기도 없어.”
“매정하긴.”
간단한 연락 소식통을 주고받은 뒤, 아르테는 자리에 일어섰다.
가게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아르테는 뒤돌아서서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닭 가면이야?”
“꼭 이유가 필요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다 썼을 수도 있잖아?”
“그런 거야?”
“…….”
아렌은 대답했다.
“닭이 울면 해가 뜨니까. 그게 이유야.”
“…농담이 아니라?”
“예전 삶에서, 내 별명은 보통이 아니었거든.”
해를 떨어뜨리는 점술가. 그게 아렌이 받았던 별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긴 밤도 언젠가는 끝나고 새벽이 밝아온다.
아렌은 자신이 라이안의 긴 밤을 끝내고, 새벽에서 다시 시작하게 할 인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