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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19화 (219/227)

#219화

아렌이 대륙의 서쪽 끝, 레데 섬까지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국 아렌은 허락을 받아내고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배에는 미켈 랜돌프도 함께였다.

“…참 나, 아렌 네 요구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토록 직접적으로 물어올 줄이야.”

“너무 성급했나? 하지만 결국 얻어냈으니까 상관없어. 들어줄 거란 확신은 있었으니까.”

아렌은 뛰어난 점술가였지만, 그 이상으로 이상한 부분에서 기묘한 확신을 할 때가 있었다.

아렌이 벌써 세 번째 같은 시간선을 지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아렌의 태도에 소름이 돋는 미켈이었다.

“…아렌. 레데가 전쟁을 일으키면 결국 내가 죽는다는 게, 정말이야?”

“글쎄, 모르지. 기를 쓰고 막는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레데가 일으킨 두 번의 전쟁에서, 넌 두 번 다 죽었어.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갔고, 둘 다 네 형님이 쏜 화살에 맞았지.”

“…내 죽음을, 기를 쓰고 막지는 않았다는 말이네?”

“말했잖아? 레데를 도와주는 건, 너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담겨 있다고.”

“속죄라. 그렇게 말해봤자-”

정작 그 속죄의 대상인 미켈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미켈에게 이전 삶의 기억은 없고, 아렌에 의해 죽임당한 것 역시 라이안의 회귀에 덮어씌워져 이제는 사라진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렌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 거래로 모든게 잘 풀릴 거라면, 그런 것도 아니잖아? 알고 있겠지만.”

레데는 오직 아렌의 말만 믿고,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에 적대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계획이 실패한다면 라이안, 제국의 차기 황제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그쯤은 알고 있어. 어차피 네 제안을 받지 않았다면, 레데는 금방이라도 나머지 전 도국에 선전포고를 할 만큼 몰려 있었어. 어차피 레데의 선택지 따윈 없었던 셈이지. 문제는, 다른 두 도시는 왜 네 말에 따르냐는 점인데.”

아렌의 답은 간단했다.

“그야, 경쟁자가 나머지 모두이기 보다는, 곁에 두고 감시할 수 있는 소수가 훨씬 나으니까.”

레데가 붕괴하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중소 도국들이 경쟁하게 된다.

안정되었던 도국 연합의 정세가 급격히 흔들리게 되고, 급격한 변화는 이미 기득권인 카르도나와 헬데움에 그리 달갑지 않은 결과다.

두 도국은 누가 위에 설지 모를 혼돈의 경주를 초조하게 지켜보는 것보다, 레데 하나만을 경계하며 나머지 후발주자들의 발을 묶어두는 것을 택했다.

미켈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모두 다 수지타산이란 말인가?”

“레데도 마찬가지잖아? 주판을 튕겨본 다음, 전쟁이 더 이득이라 계산한 거지.”

“그리고, 전쟁보다도 네 제안이 더 가치있다고 여긴 거고?”

“…일단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뱃머리 너머로 희끄무레하게 육지가 보였다.

돛을 접은 배들이 늘어선 부두와 화물을 잔뜩 싣고 출발하는 상선의 선단들도.

이 세상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와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라두크 도국 연합의 중심, 헬데움이다.

레데에 도착할 때보다는 능숙하게, 아렌은 부두에 내렸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어. 이번 수확제에 황도에 오는 것 맞지?”

“…….”

부두에 내린 아렌을 바라보는 미켈은 여전히 배 위에 올라탄 채였다.

배와 부두를 연결하는 다리 하나만 위태롭게 걸린 채, 둘은 마주 봤다.

“아렌.”

“왜?”

“네가 라이안을 죽이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미켈이 말한 질문은 잘못됐다.

라이안을 죽이면, 그가 수없이 반복했던 것처럼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뿐.

이 회귀를 모두 끝내기 위해선 그의 운명석을 파괴해야 한다.

“운명석을 깨는 것 말이지? 글쎄, 그것까지는 아무도 몰라.”

“…….”

“시간을 되돌아가 과거에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혹은 운명석을 깬 그 시점에서 계속 이어질 수도 있지. 닥쳐보기 전까진 모른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야.”

실은 이미 대강의 답을 내려놓은 뒤였지만, 그것까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미켈, 이것만은 말해두지. 설령 과거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레데와의 우정은 결코 잊지 않고 보답하겠다고.”

“그럼, 기억이 없어진 난 네 의미 모를 호의에 당황하는 건가?”

그야말로 공수표다.

이전 삶에서 아렌은 상대에게 줄 것과 가져올 것을 자세하게 따졌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아렌은 순전히 호의와 믿음만으로 그들의 지원을 끌어내고 있었다.

회귀하기 전, 아렌이 오직 눈치와 사탕발림만으로 제국의 황실을 휘어잡을 때처럼.

*****

5년 전, 아렌은 얼어붙은 산맥을 넘어 설원으로 향했다.

교국의 아르테에게 아트마 교의 사제복을 받았지만, 차마 제국의 북부에서 아트마 사제복을 입을 수는 없었다.

아렌에 의해 온건해지기 전의 태양교가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제국의 외진 곳을 전전하며 떠돌이 점술가로 활동했지만,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도 벅찼다. 떠돌이 점술가는 결코 이름을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명성이란 재방문하는 손님이 늘고 입소문을 타야 비로소 만들어진다. 아렌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한 곳에서 점을 치지도 않는데 명성이 생길 리 없다.

하지만, 이미 네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아렌의 눈치와 담력은 전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숙소에 쓸 돈까지 아껴가며 잔뜩 식량을 사들인 아렌은, 곧바로 현지인이 아니면 소문조차 나지 않은 협곡 가도로 향했다.

지쳤고, 또 아직 어렸기에 아렌은 꼬박 4일 만에 설원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가져온 곳은 크고 단단한 막대기 두 개와 커다란 천 하나, 그리고 식량이 잔뜩 든 배낭이 전부였다.

아렌은 기둥과 천을 최소한으로 쓴, 거의 눈으로 보강하고 세운 숙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지냈다.

소식이 온 건, 아렌이 설원에 머무르고 2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넌, 누구야? 산맥 너머의 고상한 귀족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도망쳐온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우연인지 아렌 앞에 선 건 회색 이빨 부족의 차기 족장, 사야였다.

“뭐야, 이제야 온 거야? 2주 가까이 기다렸는데?”

“우리를, 기다렸다고? 왜지?”

“그야 널 아니까. 회색이빨 부족의 차기 족장, 사야. 맞지?”

“…날 알아?”

사야는 한 발 뒤로 물러섰고, 그녀를 호위하는 유랑족 전사들이 작살을 닮은 창을 겨눴다.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야는 이어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머무는 사람은 없는데.”

“그렇겠지. 하지만 난 구면이야.”

“…영문을 모르겠어. 혹시 날 놀리는 거야?”

“놀라는 것도 당연해. 네겐 이번 삶이 처음이겠지만, 난 벌써 네 번째거든.”

“…?”

“긴말할 것 없고, 날 주술사 할멈에게 데려다주겠어?”

아렌은 마을에서 산 천장갑을 벗고, 장갑 아래에 낀 운명석 반지를 보이며 말했다.

“이러면, 좀 이야기가 통하려나?”

그때부터 이야기는 빨랐다.

산맥 남쪽에서 일부러 찾아온, 운명석 계약자.

보통은 뜻 모를 소리를 하는 녀석이면 이상히 여길 만도 하지만, 운명석 계약자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렌은 곧바로 회색 이빨 부족의 마을로 안내되어, 주술사 노파를 만났다.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한 아렌.

주술사 노파는 곧바로 아렌의 말을 이해했다.

물론, 전과 같은 추임새도 함께였다.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

“그 이야기, 전에도 벌써 들었어. 운명석은 현재에밖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거지? 하지만 실제로 현상은 일어나고 있어. 난 이제 세 번째 회귀지만, 의도적으로 같은 삶을 70번이나 살아온 녀석도 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뭔가 착각한 건 아닌가?”

노파는 여전히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저만큼이나 확고하게 생각하자, 어쩌면 노파의 판단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황자가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그렇다 치고, 자넨 왜 여기 왔지? 내게 도움이라도 구할 건가?”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미 전에도 거의 비슷한 의논을 했어. 특별한 결론은 없었지만.”

“그럼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전과 같은 결론이 나오겠군.”

“사실 나도 큰 기대 하고 온 건 아니니까.”

아렌이 이곳에 온 이유는, 라이안의 회귀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 위해.

그중에는 쓰일지 안 쓰일지도 장담할 수 없는 정말 사소해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설령 라이안의 회귀를 막는데 쓰이지 않은 요소라 해도, 다시 돌아갔을 때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큰 기대는 없다라. 그러면 자네는 왜 이곳에 온 거지?”

“내가 달라졌으니까. 혹시나 전과는 다른 답을 낼 지도 모르잖아?”

피식, 노파는 웃었다.

“아쉬워서 온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그럼, 라이안이라는 자는 그렇다치고, 네가 회귀하는 건 네 능력인가?”

“…모르겠어. 처음엔 삶을 한번 다시 시작하는 게 내가 받은 능력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라이안의 능력에 묶여있었던 모양이야. 지난 두 번의 회귀는 그 놈이 자결해서 일어났으니.”

“그럼, 최초의 회귀는?”

“그때는…”

아렌은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목이 잘렸어. 누명을 썼지. 눈떠보니 20년 전의 꼬마가 되어 있었고.”

“즉, 회귀는 네가 죽어도 발동하는 건가?”

“…그럴지도.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렌의 능력은 회귀가 아니라 언령이었다.

적어도 아렌이 형식을 갖춰 한 말이 실제로 이뤄지는 건 수도 없이 겪어왔던 일이다.

노파는 아렌의 능력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언령이라.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고, 언령이라는 힘도 따로 주어진다라.”

“…….”

“내가 자네라면, 자네에게 일어나는 일을 좀 더 간단하게 정리해볼 걸세. 자신에게 복잡한 능력 이것저것이 붙어있다 여기기보다는, 한가지로 인해 여러 가지가 촉발되었다고 말이야.”

“예를 들면?”

“나야 모르지.”

아렌은 눈을 흘겼지만 노파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게 간단한 답이었다면 이전 삶의 내가 답해줬겠지. 하지만 자네가 이전에 본 나와, 지금 앞에 있는 나는 본질적으로 같은 인물이야. 달라진 건 자네뿐이지.”

“달라진 건, 나?”

“내가 아는 바론, 운명석의 힘으로 과거로 가는 건 할 수 없다, 그렇게만 알아두게.”

과거론 갈 수 없다. 하지만 아렌과 라이안과 아렌은 과거로 되돌아왔다.

아니, 노파의 말대로라면 과거로 되돌아왔다고 ‘믿고 있다’.

“…그렇군.”

“뭔가 실마리를 잡은 건가?”

“어쩌면.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좀 허무해지는데?”

“자네가 깨달은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

노파의 말에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아렌은 노파에게 굳이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건 말하기 힘든 법이다.

당신이, 사실 실제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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