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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18화 (218/227)

#218화

라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황궁에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라이안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로 다시 돌아오고, 라이안이 도국에 가 있는 동안 아렌은 사라지고 없고, 그럭저럭 7년의 시간이 흘렀다.

“전하. 생각이 많아 보이십니다.”

“어라? 아직 살아 있었나?”

라이안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참모를 바라봤다.

다시 돌아오고 7년, 이번 생에서는 제법 오래 살아있었다.

“하하, 짓궂으십니다, 전하.”

“음, 역시 그렇지?”

‘…아니, 그게 아니야.’

지난 두 번의 삶에서 6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죽였을 뿐, 대부분의 경우 참모는 훨씬 오래 살아있었다.

그럼에도 참모가 평소보다 오래 살아있다고 착각한 이유는, 그만큼 이전 두 번의 삶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는 뜻일 것이다.

라이안은 원래 훨씬 오래 삶을 영위한다.

자신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자연스레 노년기에 접어들자, 권태로움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적도 꽤 되었으니 고작 5, 6년의 삶은 확실히 짧다.

‘저번 두 번의 삶은, 재미있었어. 일부러 아렌 녀석을 살려뒀으니 이번 삶도 마찬가지일 줄 알았는데.’

아렌은 다시 돌아오자마자 자취를 감췄다. 황도를 넘어 제국 전역에 알음알음 조사를 시켰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따금 용하다는 젊은 점쟁이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지만, 그 중 한 명은 여동생 세리엔의 옛 시녀 출신이었고, 확인한 다른 자들도 아렌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아예 도망간 건가? 그런 겁쟁이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처음엔 도망감 척하며 레온나토스에게 붙어있는 줄 알았다.

레온나토스가, 마치 지난 두 번의 삶과 유사한 선택을 해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황태자 경쟁에 뛰어들지 않나, 위병 더글라스와 맹인 사서 레밍을 받아들인 것 또한 이전 삶과 비슷했다.

끝내는, 과거 낮안개 기사단이라 불렸던 제8 기사단까지 얻게 되면서, 레온나토스는 이전 삶에서 가졌던 힘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라이안은 아렌이 은밀히 지나갈만한 곳곳에 감시망을 펼쳐뒀지만, 아렌은 끝까지 걸려들지 않았다.

아렌이 레온나토스에게 붙는다면, 그건 라이안에게 기꺼운 일이었다.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변수로서 행동해줄 테니까.

하지만, 아렌은 너무도 조용했다.

‘레온나토스의 입지가 급부상한 건, 단지 우연인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지.’

레온나토스는 지난 두 번의 삶에서 유력한 황권 후보였다.

그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는 라이안은, 저도 모르게 이전 두 번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레온나토스의 입지는 어느덧 라이안과 가웨인 바로 아랫급으로 성장해, 황권 경쟁은 어느덧 3파전으로 접어들었다.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우수한 제1 황자 라이안. 신이 내린 검술 재능과 함께 부하들을 자연스레 휘어잡는 위압감을 가진 제4 황자 가웨인, 그리고 뒤늦게 두각을 드러냈지만 우수한 가신들로 인해 더욱 그 이름이 빛나는 제12 황자 레온나토스까지.

‘저기에, 점술가 아렌까지 있었다면 그 위상이 나조차도 능가했겠는데?’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아오는 두 황자는 결코 쉽지 않은 상대이지만, 그것뿐이다.

어차피 황권 경쟁의 승자는 라이안이 차지할 게 뻔하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확률로 동생들이 황태자가 되어도, 다시 시간을 되돌리면 그만.

운명석으로 얻은 능력조차 잃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는 긴박함을, 라이안은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아렌.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

그때쯤, 아렌은 풍랑에 잔뜩 시달려 초췌해진 몰골로 배에서 내렸다.

“…죽을 뻔했어. 아니, 정말 죽었나?”

“하하, 놀랐나, 아렌? 레데 앞바다는 원래부터 풍랑이 거센 편이라, 바다에 익숙한 선원도 애먹긴 하지.”

배에서 뒤따라 내린 레데의 유력가문 후계자, 미켈 랜돌프는 웃으며 아렌의 등을 때렸다.

금방이라도 속에서 내용물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자신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기에 아렌은 가까스로 참았다.

항구에서 미켈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 프리드먼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그런데 옆에 이 자는-”

“아아. 전에 얘기했었지? 오래 전에 사귀었던 벗, 아렌일세. 전에 학교에서 만나 의기투합했지. 들여보내 주게.”

“이 분이 바로 그… 알겠습니다. 극진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렌을 새삼스레 달리 본 프리드먼이 공손히 답했다.

‘…도국에서는 나름대로 은밀히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프리드먼쯤 되면 다른 건가?’

도국 연합은 상업과 과학이 발달한 만큼, 다른 나라보다도 미신에는 더 박했다.

하지만 아렌은 카르도나 국제학교의 직원으로 흘러 들어간 뒤, 그 곳에서 점괘로 유력 인물들의 환심을 샀다.

먼저 세밀 메렌치를 홀린 후 듀란 우피치와 미켈 랜돌프에게도 줄을 댄 아렌이었다.

저번 삶에선 세밀과 듀란에게 신세를 많이 졌지만, 사실 이번 생의 목적은 저 둘 보다는 미켈 랜돌프에게 있었다.

“어떤가, 아렌. 이곳이 문명화된 지역 안에선 가장 서쪽이라 불리지. 태양이 가장 늦게까지 떠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과연. 이곳에서 더 서쪽으로 가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바다가 달리 보이는데?”

부두의 선원들은 모두 활기에 차 있었다.

저마다 밧줄을 묶고, 그물을 정비하며 부두와 배의 수리에 여념이 없었다.

단 하나, 다른 도국의 항구에 비해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배에 짐을 싣는 선원의 수였다.

카르도나와 헬데움, 레데가 도시국가 연합의 세 주축이었다. 하지만 두 도국이 부를 쓸어 담는 것에 비해, 서쪽 바다 밖에 동떨어진 섬국가 레데는 다른 두 도국 만큼 무역으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하긴, 바다가 항상 저렇게 거칠다면 방어엔 유리하겠지만, 무역에 도움될 건 없겠지.’

그렇기에 도국 연합 어느 곳에서든 다소 떨어진 위치를 이용해, 모든 지역을 적절히 견제하며 스스로 도국 연합의 경찰 역할을 했었던 레데였다.

하지만, 점점 앞서가는 헬데움과 카르도나에 현재 가진 위치마저 잃어버릴 것을 우려한 레데는 점점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촉발한 것이 레데의 내전이었다.

“…아렌 네가 미리 일러주지 않았다면 레데는 전쟁을 일으켰겠지. 계획대로 되었든 되지 않든, 수많은 피가 흘렀을 거야.”

‘…그리고, 그 피 중엔 네 피도 있었겠지.’

레데가 가진 불만은 언젠가 터져 나올 것이었다.

아렌의 중재로 레데의 선단은 가까스로 출항을 멈췄다.

마찰 없이 무역에만 집중하고 싶은 카르도나와 헬데움 역시 그 중재에 응했다.

사실상 주축인 세 도국이 더욱 강하게 결속하고, 나머지 도국이 상대적인 피해를 보는 구조가 되었지만 아렌은 개의치 않았다.

후에 레데가 일으킨 것보다 더 큰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아렌에게 필요한 건 미래의 언젠가 보다는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아렌 네 덕분에 전쟁은 멈췄다. 무고한 피가 흐르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대로라면 레데의 쇠퇴는 피할 수 없을 거야. 헬데움과 카르도나의 중재로 다른 도국에서 보호비를 거두고 있지만, 허울 좋은 조공이지. 다른 모든 도국이 뭉친다면 세 유력 도국과도 대등하게 겨뤄볼 수 있을 거야.”

전쟁은 멈췄지만 레데가 점점 쇠퇴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다. 지금은 무적의 함대를 갖추고 있지만, 험한 바다를 누비는 레데의 함대에는 막대한 유지보수 비용이 들어간다.

더는 함대의 유지보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온다면, 그때가 레데의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내가 온 거고.”

“…가능하겠어?”

“제국의 12황자 레온나토스는 우수하지만, 저평가된 말이야. 라이안과 가웨인은 누가 봐도 손색없는 우승마이기에 온갖 사람들이 거기에 걸었지. 원래 열세인 순간 받는 지원이 더욱 고마운 법이지.”

지금까지는 잠재적인 적국이었던 제국과 도국연합의 세 주축국이 서로 손을 잡는다면?

도국 연합의 나머지 도국을 제물로 삼아, 세 주축 도국과 제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수 있다.

“레데가 건국된 이래 가장 유효한 투자였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후회하지 않을 거야.”

“…혹은, 도국연합의 세 주축국이 최악의 사기를 당했거나.”

“불안한 것도 이해해. 그보다, 비나그네는?”

“벌써 내륙 안쪽으로 보냈어. 마차에 태운 채 매일 이동 중이라, 의심을 사지는 않을 거야.”

“잘했어. 단, 감시는 확실히 해야 해. 비나그네가 도망쳐 황도로 향한다면, 라이안은 분명 그를 죽일 테니까.”

이전 생에서 라이안은 수확제 동안 황도에 머물렀던 비나그네를 죽였다.

이미 레데에게서 도망친 뒤라 수배중인 몸이었지만, 라이안은 기회가 될 때마다 운명석 계약자를 죽였다.

그건 달리 말하면, 비나그네가 굳이 황도로 향하지 않으면 비나그네가 죽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비나그네를 죽이는 건, 라이안이 수도 없이 반복한 미래는 아니었을 거야. 수확제 중인 황도에 폭우가 내린 건, 회귀하기 전에는 일어난 적 없었으니까. 내가 개입해서 생긴 우발적인 사건에 가까워.’

“그런데 아렌, 그동안은 대체 어딜 다녔던 거지? 널 처음 만나고 이래저래 3년이 흘렀는데.”

“그야, 미리 수를 써뒀어야 할 곳은 여기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현재 아렌은 제국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라이안이 현재 아렌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도국의 정보망을 통해 아렌의 귀에 들어갔고, 레온나토스는 이미 처음에 알려줬던 정보만으로도 스스로의 힘으로 유력한 황권 주자로 발돋움했다.

지금까지는 굳이 제국 내부로 들어가 라이안에게 빌미를 줄 필요 없었다.

“이제 곧 수확제야.”

“아, 제국에는 그런 행사가 있었지. 도국 사람들도 간혹 참가하곤 해. 그때 움직일 생각인가?”

“그때가 가장 적기일 테니까.”

미켈은, 조금 망설이면서도 물었다.

“…아렌. 하나 물어도 되겠나?”

“두개 물어도 되는데.”

“넌 왜, 우리 레데를 도와준거지? 레온나토스의 가신인가 싶었지만, 거의 접점은 없다시피 하고. 굳이 레데를 돕지 않고 카르도나나 헬데움에 독점으로 점괘를 제공했어도 전혀 상관 없었을 텐데. 굳이 위험부담까지 짊어지면서까지 왜 레데의 옆에 선 거냐.”

“…별것 아냐. 그저 빚을 갚았을 뿐이니까.”

“빚?”

“그래. 이래 봬도 난, 이전 삶에서 당신을 두 번이나 죽였거든.”

“…….”

“한번은 실수였지만, 다른 한 번은 죽을 줄 알면서도 내버려 뒀지. 그때는 현재를 최대한 이전 삶과 닮게 할 필요가 있었거든.”

“…….”

“꽤나 놀랐을 텐데, 별 말 안해?”

“…물론 허황된 말이긴 하지만, 이미 네 점괘로 꽤나 덕을 봤으니까.”

기본적으로 도국 사람들은 점괘를 신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레데의 사람들은 달랐다.

항상 거친 파도가 사방을 둘러싼 도시이기에, 뱃사람들에게는 위안이 필요했다.

‘도국에서도 세밀 메렌치, 듀란 우피치와 미켈 랜돌프 정도만 나에 대해 알고 있어. 라이안이 도국 안에 이런저런 연줄이 많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지금까지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소수에게만 점괘를 선보였다. 그럴수록 아렌의 점괘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고, 아렌을 원하는 단위도 더욱 커졌다.

애초에 황궁의 점술가일 때부터 지위 높은 자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데는 도사였다.

‘…7년이라. 이토록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준비는 길었던 만큼 확실했다.

이곳에서 필요한 물품만 받으면 곧바로 수확제가 열리는 수도로 향할 예정이었다.

“미켈. ‘물건’은 준비된 거겠지?”

“…목소리 낮춰. 원래라면 외부인에게 절대 줘선 안되는 물건이니까.”

심기가 레데 앞바다처럼 다소 거칠어진 미켈에게, 아렌은 느물느물 웃으며 말했다.

“알아. 그래서 보내달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직접 받으러 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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