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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17화 (217/227)

#217화

와구와구.

“…….”

수도원에서 빌려준 또래용 사제복을 빌려입은 아렌은, 식당에서 특별히 차려준 음식을 목이 미어터져라 쑤셔 넣었다.

으깬 감자와 옥수수죽, 말린 산새고기 두어 점.

그리 진미는 아니었으나,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아렌은 거의 흡입하듯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먹어 없애고 있었다.

그런 아렌을 바라보는 아르테의 표정은, 잔뜩 질려 있었다.

“…그 꼴로 다니는 건 위장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어? 정말 며칠 굶은 것처럼 먹네?”

“정말 며칠 굶었으니까.”

“…돈은 있었다며?”

“그게 위장이니까. 누가 봐도 며칠 굶은 것 같은 꼬마를 누가 털어먹으려 하겠어? 그리고 그렇게 보이려면, 실제로 굶는 게 제일이지.”

“흐음.”

아렌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던 아르테는 이내 포기했다.

아렌에게는 자신이 운명석으로 받은 능력, 독심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후, 그래도 씻으니 한결 보기 낫네. 그러고 있으니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게 느껴져.”

“그런 게 보인다고? 다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지금 나는 정말 황궁 허드렛일만 한 애송이일 뿐인데.”

“글쎄, 그런 것 치곤 게걸스레 먹어도 식기 사용은 완벽한걸? 흘리지도 않고. 애초에 열 살짜리의 언동도 아니고 말야.”

“음, 그런가?”

그러고보면, 처음 회귀한 직후에도 고급 복식을 입는 순서를 완벽하게 기억해서 도와주던 시녀가 놀랐던 기억이 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보면, 티가 난다는 건가? 위장할 일이 있으면 기억해둬야겠어.’

아렌도 어느 정도 배를 채워서 식기를 움직이는 손이 조금 느려졌다.

그 틈을 타 아르테가 물었다.

“…그러면, 방금까지 했던 말들은 모두 사실인 거야?”

“왜,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라도 있어?”

“그도 그럴 게, 이상하잖아? 네가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제 막 만난 너를 덜컥 믿고 비밀까지 모두 털어놓는다고? 내가 그렇게까지 경솔한 사람이었나?”

“이상할 것 없어. 처음엔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식기를 완벽히 사용한다는 말에 조금 심통이 났는지, 옥수수 죽을 그릇째 들어 후루룩 마신 아렌이 그릇을 내려놓고 말했다.

“하지만 먼저 협력관계를 제안한 건 네가 맞아. 라이안 황자 또한 운명석 계약자인 걸 안 뒤부터 나와 손을 잡은 것도 맞고.”

“하지만, 너와 라이안 황자, 둘 다 운명석 계약자라면 나는 라이안과 손을 잡는 게 더 유리한 것 아냐?”

“모르지. 라이안과 달리 난 더 어리기에 조종하기 쉬워 보였을지도.”

“흐음…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아르테는 고민했다.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눈앞에 있는 아르테는 아렌이 알고 있던 때보다 훨씬 더 어렸고, 비원궁에 들어가 온갖 음모를 몸소 겪기도 전이었다.

행동양식이나 생각,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궁금한 게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큰 정보가 아니야. 그런데 왜 이리 쉽게 털어놓은 거지? 협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교섭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정보로 어떻게 교섭을 해? 일단 믿음을 쌓는 게 먼저고, 믿게 하려면 충분히 털어놓는 게 먼저지.”

“…네가 겪은 일이 정말이라면, 내가 장차 주교 자리에 오른다고?”

“하기에 따라선 대주교 자리에도 올라. 그것도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하지만 이미 그때와는 너무 다른 선택을 해버려서, 다시 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아르테는 고민했다.

아렌이 누구도 모르는 운명석에 대해 말한 것은 사실이고, 아렌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사실만으로 아렌이 하는 모든 말의 진위를 담보할 수는 없었다.

아르테는 물었다.

“…그런데 아직 네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너도 운명석 계약자라면, 네가 가진 능력은 뭐지?”

자신의 능력만 공개된 건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은, 아렌의 능력을 아르테가 알아야 비로소 신뢰가 생길 것 같았다.

아르테 나름의 시험이었지만, 아렌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답했다.

“내가 한 말은 그대로 이뤄져. 특정 조건을 갖춰야 하지만. 이걸 고대 문헌에서는 ‘언령’이라 부르더군.”

“…말한 대로 이뤄진다고? 그게 뭐야, 완전히 사기잖아! 그런 좋은 능력이 있다면 왜 지금 쓰지 않는 거야!”

“왜 쓰지 않냐고?”

언령의 힘은 아렌도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의 떡이었다.

“언령을 쓰고 나면 그 후유증이 얼마나 크고 계속될지 아무도 몰라. 일주일은 기본이고, 전에 라이안 황자에게 걸었던 언령의 후유증은 한달은 족히 혼수상태였어.”

“…하지만 결국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괜찮은 것 아냐? 네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곧바로 언령을 쓰면 해결되는 것 아닌가?”

“첫 번째. 내 언령은 말을 듣는 대상이 바로 앞에 있어야 해. 이 자리에서 라이안 황자에게 언령을 적용해도, 이뤄지진 않을 거야.”

아렌의 언령은 점괘의 형식을 빌어야 했기 때문이다. 점술은 앞에 대상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두 번째, 당시 난 레온나토스 황자의 최측근이었어. 어떤 경우에라도 쓰러졌을 경우 극진한 간호와 경호를 받았지. 하지만 지금은?”

“과연. 한번 사용하는데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건가? …잠깐. 라이안에게 언령을 쓸 수 있었다고? 그럼 혹시, 나한테도 쓸 수 있는 거야?”

아르테는 운명석 계약자인 아렌의 마음을 엿보지 못한다. 하지만 아렌은 운명석 계약자인 라이안에게 언령을 걸 수 있었다고 하니, 아르테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그것도 저번 삶에서 한번 시험해봤어. 너한테는 적용되지 않더군.”

“…그런데, 라이안에겐 통한다고?”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해.”

아렌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지만, 궁색한 변명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르테의 눈이 조금 매서워졌다.

“…그 언령이라는 거, 정말 실존하는 능력 맞아?”

“뭐야, 확인해줘?”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밖에서는 불가능했겠지만, 이곳은 사방이 가로막힌 수도원 안이다.

아렌은 죽그릇 속에 있는, 그나마 성한 옥수수 알갱이들을 하나씩 골라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래뵈도 난, 꽤 날렸던 점술가거든? 이번 생에서는 거의 써본 적 없지만.”

점술에는 그럴듯한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전혀 영험해 보이지 않는 거렁뱅이 꼬마가 점을 쳐준다고, 거기에 돈을 줄 사람은 없다. 적선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적선이라면 다른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그래도, 점술이면 수정구슬이나 카드 같은 걸 쓰지 않아?”

“가장 일반적이지. 하지만 번듯한 카드뭉치는 꽤나 고급품이야. 일부러 넝마로만 둘렀는데 카드뭉치를 가지고 다닐리 없잖아?”

아렌은 숟가락 위에 고이 올린 옥수수 알갱이를, 탁자 위에 흩뿌렸다.

“점술의 방법은 실로 다양해. 동물의 뼈를 구워 금 간 모양을 살피거나, 모래나 밀알을 흩뿌려 그 형태를 보기도 하지. 익힌 옥수수 알갱이로 얼마나 잘 될진 모르지만, 해보면 알겠지.”

물론 아렌에게 점의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말을 점괘의 범주 안으로 넣기 위한 하나의 의식일 뿐.

아렌은 점괘의 형식을 빌려 언령을 뱉었다.

“흠, 곧 턴데일 수도원장이 문을 열고 들어올 거야.”

“…그게 끝이야?”

“그리고, 들어올 때 신발 끈이 양쪽 다 끊어지겠지.”

“-뭐?”

그 직후.

벌컥, 식당의 문이 열렸다.

“…원장님?”

열린 식당 문밖에는 몰래 안쪽의 동향을 살피던 수사 여럿과 수사들더러 물러가라고 손짓하는 턴데일 수도원장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찾아온 손님께 제대로 대접도 하지 못하고-”

“원장님. 지금 신발은 어때요?”

아르테가 다짜고짜 물었다. 턴데일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아르테의 말에 고분고분 답했다.

“신발? 신발이 뭐가- 끊어졌잖아? 그것도 양쪽 다.”

원래라면 수도원장의 발목을 단단하게 잡아줄 신발 끈이, 양쪽 다 끊어져 있었다.

아르테는 생경한 눈으로 아렌을 바라봤고.

“거봐. 내 말 맞지?”

그 말을 끝으로 아렌은 퍽, 으깬 감자가 담긴 접시에 얼굴을 박았다.

*****

아렌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아니꼬운 얼굴을 한 아르테가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며칠이나 누워있었어?”

“걱정 마. 이틀 정도밖에 안 되니까.”

“거봐, 이제 내 말을 믿겠어?”

“깨어나서 처음 하는 말이, 고작 그거야?”

아르테는 어이없어했지만, 이번의 일을 통해 아렌의 말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아렌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언령을 사용했고, 완전히 모르는 장소와 모르는 사람 앞이었다면 그렇게 순순히 무방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네 능력이 뭔지는 잘 알았어. 능력이 확실하다는 것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도. 그럼, 네 제안을 믿고 따르면 대주교가 될 수 있어?”

“확답은 못 해주겠지만, 레온나토스 황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해준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야.”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 아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널 믿고, 손을 잡겠어. 그림 이제 난 뭘 하면 되지?”

아렌은 말했다.

“아무 것도 하지마.”

“…응?”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열심히 노력해 비원궁에 들어가. 최연소 주교가 되고, 레온나토스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내 이름을 대고 협력을 구해. 필요한 시기가 되면 연락할 테니까.”

아렌이 알고 있는 아르테는, 이미 비원궁의 주교가 된 후의 모습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협력을 구하기 위해선, 그녀가 최대한 아렌이 알고 있는 지위에 오르는 편이 나았다.

‘나나 라이안의 개입 없이도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오를 수 있겠지.’

“참, 라이안이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르니 조심해.”

“…나한테? 왜?!”

“라이안은 네가 운명석 계약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표면적 이유로는 제국의 위협이 된다는 게 이유지만, 사실은 단순히 자신을 위협할만한 사람이니, 그저 배제하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지.”

아르테가 더 안전해지기 위해선, 빨리 이름을 떨쳐서 비원궁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뿐이었다.

아르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 이제 넌 어떡할 거야?”

“다시 나가야지. 해야 할 일이 많아.”

“해야 할 일?”

“이래 봬도 이전에 이곳저곳 많이도 다녔거든?”

라이안을 완벽한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선, 그들의 도움을 모두 구해야 했다.

라이안은 아렌을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둔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모질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 날 닮은 수배서를 본 적은 없으니, 어느 정도 손을 좋은 건 맞을 거야.’

그건, 아렌이 영원에 가까운 회귀를 포기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기도 했다.

라이안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네 노리개가 되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라이안.’

누명을 쓰고 목이 잘린 후, 아렌이 한 다짐이었다.

차라리 모든 일의 흑막이 될지언정, 다른 이의 장기말이 되지는 않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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