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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16화 (216/227)

#216화

제12 황자 레온나토스는 어느날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며 쓰러졌다.

궁의들이 여럿 와 진단을 내렸지만, 모두 시원한 답 하나 내리지 못했다.

어차피 평소에도 그리 건강하지는 않았으니, 궁의들에게 레온나토스의 질환은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국 전역에서도 내로라하는 궁의들이 연거푸 정답에 이르지 못할수록 레온나토스는 충격을 받았다.

고작, 토란을 아주 조금 베어 물었을 뿐인데 궁의들은 진실의 언저리에도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궁의들은 아무도 모르더군.”

며칠이 지나 레온나토스의 증상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이전만큼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도 침상 위에 앓아누운 레온나토스의 앞에, 아렌은 다시 나타났다.

“토란이 내게 독이라는 사실을 넌 어떻게 알았지?”

비밀 통로에서 며칠을 더 묵은 아렌은 마치 시궁쥐같은 몰골이었지만,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그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이미 말해줬는데 말야.”

“그럼, 내게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오랜 세월을 수없이 많이 반복하며, 모두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제1 황자 라이안과, 그것에 휘말려버린 아렌.

아렌을 하인으로 거느려본 기억이 없는 레온나토스에게, 아렌의 말은 쉬이 믿기 힘은 것들이었다.

“선뜻 믿어줄 거라곤 애초부터 생각지 않았어. 내가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레온나토스 네게 협력을 구하고 싶어서.”

“다른 질문도 많지만, 우선 이것부터 물어야겠군. 왜 나지?”

“그야, 넌 날 모르겠지만 난 널 알거든. 내가 틀린 길로 가지 않는 한 넌 날 배신하지 않을 거고, 날 도와줄 힘도 가질 수 있으니까.”

‘가질 수 있다’라는 말은, 지금은 가지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다.

“…도와달라라. 물론 라이안 형님을 막아달라는 말이겠지. 하지만 무슨 명목으로? 형님이 무엇을 잘못했지?”

토란의 후유증으로 기력이 쇠한 와중에도, 레온나토스의 눈은 생기를 잃지 않았다.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70번이나 같은 삶을 반복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훌륭한 삶 아닌가?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최적의 미래라니, 훌륭한 목표가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아. 라이안에게 삶을 되돌리는 건, 사명감이 아니라 그저 여흥일 뿐이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겠지만, 놈은 개의치 않아. 어차피 원래대로 돌아가면 모두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형님이, 설마-”

“모두 직접 봤던 일이야. 내 감각으론 열여섯 살의 레온나토스가 라이안의 부하에 휘말려 산채로 불타 죽은 게 불과 몇 주 전이야.”

“…….”

“아무리 원래대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전에 이곳에서 겪은 고통과 절망은 모두 진짜야. 라이안은 단지 즐거울 것 같다는 이유로, 어차피 삶을 되돌릴 수 있다는 이유로 어떤 짓이든 행하고 있어. 마음만 막는다면 황궁을 송두리째 불태울 수도 있을걸?”

아렌은 누구도 몰랐던 토란의 위험성을 알린 것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레온나토스로선 라이안의 폭군 기질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자신에게 라이안은 가웨인 정도만이 겨우 대적할 만큼 완벽한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결정을 내리라는 건 아니야. 계속 라이안을 관찰하다가 내 말이 맞을 것 같을 때 비로소 힘을 빌려줘도 돼. 물론 그때를 대비해 미리부터 힘을 쌓아둬야겠지.”

“…아렌, 이라고 했나? 네 말에 선뜻 답하기는 어렵군. 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좋아. 그럼 협력하겠군. 그도 그럴 게, 내 말은 모두 사실이니까. 너도 조금만 관찰해보면 내 말이 사실임을 알 거야.”

침대에 누운 채 어둠 속에 서 있는 아렌을 비스듬히 올려다 본 레온나토스는 문득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전에 날 섬겼다고 하던데, 왜 말을 낮추지?”

“뭐야, 마음에 안 드나?”

“아니, 꼭 말을 높이라는 건 아니지만…”

미천한 출신인 게 뻔한 또래가, 주눅 든 기색도 없이 자신의 처소에서 말을 낮춰 막 대하는 지금 상황은 레온나토스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당황스럽고 그 진위가 궁금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또 아니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다만 이제 난 궁인도 아니고, 제국에 충성할 생각도 없으니 제국인도 아니야. 단지, 라이안의 끝없는 유흥을 끝내고 싶을 뿐이지. 널 섬기지 않으니 말을 높일 필요도 없지.”

“…흥, 제법 무엄한 말을 하는군. 황궁 한복판, 그것도 내 처소 앞에서 말이다.”

레온나토스의 말에는, 이제 약간의 웃음기까지 스며 있었다.

“좋다, 이 무엄한 놈아. 네 말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면,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더이상 한가하게 책만 읽지 말고, 진지하게 황권주자로 나서줘. 말에 오르고 검을 휘두르기를 게을리하지 말고, 가신들을 영입해 가장 유력한 황권 경쟁 후보가 되어주었으면 해.”

“…노력은 해보겠다만, 내가 노력한다고 다다를 영역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안돼? 내가 아는 것만 두 번이나 라이안을 능가한 후보가 되었는데.”

레온나토스는 확신했다. 그건 아마, 눈앞에 거지꼴을 한 아렌의 힘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지금 자신의 능력과 상상력으론, 아렌이 말하는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앞으로 대강 어떻게 할 것인지, 또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등용할지를 적어줄 거야. 괜찮은 인재들이니, 이들과 네 능력이라면 가능할 거야.”

“…잠깐만, 적어준다고? 계속 내 곁에 있는 게 아니었나?”

“나도 그럴 수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라이안을 확실히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거대한 함정이 필요했다. 언제든 자결할 수 있는 자였고, 자결한 순간 그의 승리다. 전처럼 언령으로 그의 행동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령이 어떤 식으로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밖에서도 준비를 해야 해. 가끔은 들르겠지만, 그 전까지는 혼자 힘써줘.”

“…그렇다면 아쉽군. 넌 제법 재밌는 녀석 같았는데.”

“하지만 내가 준 숙제도 만만찮게 재밌지? 지금껏 책만 읽은 건, 현실이 책보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 아닌가? 내가 준 숙제를 차근차근 이뤄가는 것도, 분명 책을 읽는 것만큼 재밌을 거야.”

레온나토스의 정곡을 찌른 아렌은, 그대로 벽 뒤로 사라졌다.

벽 뒤에서 아렌이 말했다.

“그리고 레온나토스의 암살시종. 황자를 지켜. 무슨 수를 쓰더라도.”

“…….”

아렌과 마찬가지로 방 어딘가에 숨어있던 암살시종 멜로익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처음엔 어디선가 나타나 암살시종 운운할 때는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했는데, 아렌의 실력도 그리 호락호락한 편이 아니기에 힘들었다.

그리고 원래부터 점괘 등을 곧잘 믿었던 멜로익이기에, 낯선 아렌의 말 역시 금방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족관계 등, 다른 이가 절대 모를 정보를 말하는 것만으로 금방이었다.

-며칠 뒤.

병석에서 쾌차한 레온나토스는, 황궁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마주치는 모든 궁인들이 레온나토스에게 예를 갖췄지만, 그건 레온나토스가 황제의 핏줄을 가지고 있어서일 뿐, 레온나토스 본인의 능력을 향한 예는 결코 아니었다.

‘…이걸로도 나쁘지 않지만. 아렌이라는 녀석이 더 위를 향하라고 했으니.’

서신에 적힌 대로 레온나토스는 황궁의 중문에 찾아간다.

그곳은, 위병조장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유명해진 주정뱅이 위병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으… 딸꾹. 어라, 황자 나리?”

‘…이 자가, 정말 가웨인 형님에 버금가는 고수라고?’

선뜻 이해 가지 않았지만, 만약 더글라스가 그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더는 아렌의 말대로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레온나토스는 만취한 채, 혀까지 꼬인 더글라스에게 말했다.

“그만 네 인생을 술독에 바치는 걸 그만하고, 네 재능을 나를 위해 써주면 어떠하겠나?”

“…전하. 말씀은 감사하오나-”

“자네, 뭔가 잃어버린 물건이 있지 않나?”

“저, 전하! 그걸 어찌!”

“-물론 다 아는 수가 있네. 황궁에 매일같이 출입하면서 어찌 비밀을 가질 생각을 했나.”

겉으로는 태연해보였지만, 놀란 건 레온나토스도 마찬가지다.

‘…역시, 아렌 말은 전부 사실인 건가?’

*****

아렌은 황궁의 비밀통로를 지나, 시가지까지 연결된 지하수로로 내려와 황궁을 빠져나왔다.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던 대로, 라이안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교국과 도국연합, 각지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더글라스를 포섭하고 있겠군.”

더글라스. 아렌이 주도해 레온나토스가 아렌 다음으로 받아들인 가신이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경로로 등용하게 되겠지만, 더글라스라면 레온나토스를 성심성의껏 보살피겠지.

아렌은 무릎까지 잠기는 구정물을 뚫고 배수구로 나왔다. 몸에서 악취가 풍겼지만, 원래도 거지꼴이나 다름없었기에 별 상관없었다.

해도 달도 뜨지 않은 심야. 이따금 취객이 비틀거리며 돌아다녔고, 부모도 없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아렌과 비슷한 몰골로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었다.

“-우선, 이 모습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레온나토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하수도를 지나야 했기에 옷을 바꿔입는 건 의미가 없었다. 큰돈을 받아봤자 힘이 없으면 빼앗기기만 할 뿐.

허름한 옷에 5일 치 노잣돈이 아렌이 가진 전부였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많았지만, 아렌은 가장 먼저 남쪽으로 향했다.

지금이 아니면, 만나기 쉽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아트마 교국, 아이기스 수도원.

콩콩, 콩콩.

누군가 수도원의 정문을 힘없이 두드렸다.

문 옆에 달린 가느다란 창을 연 수사는, 곧 눈을 찌푸렸다.

문을 두드린 아이는 몇 일이나 씻지 않은 것인지 온몸에 파리가 꼬였고, 옷은 거의 넝마나 다름없었다.

아트마 교의 교리로는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지만, 아렌의 행색은 사람의 근본적인 혐오감을 부추겼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남은 음식이라면, 식사시간이 아직입니다만.”

“사람을 찾아 왔습니다.”

“사람? 수도원 안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네. 여기 아르테라는 수사가 있습니까?”

“…당신은 그녀와 무슨 관계입니까?”

“그녀와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죠. 아마 지금 당장은 제 이름을 대로 모를 겁니다. 그렇게만 전해주세요.”

“…아르테 수사와 비슷한 처지라고요? 당신이?”

“일단 저를 보면 바로 알 거예요?”

“…….”

모르는 사이인데, 직접 보면 안다니. 알쏭달쏭한 말이다.

문을 지키던 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물러갔다.

‘다행이야. 이 시기에는 아직 수도원에 있었던 모양이군.’

아르테는 이른 시기에 비원궁으로 가, 파격적인 나이에 주교 자리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지금쯤 아르테의 나이는 고작 십대 중반. 지금 이 수도원에 있을 만한 나이였다.

잠시 후.

“…누구시죠? 저를 보자고 한 사람이?”

아렌의 기억보다도 다소 어린 기운이 남아있는 여수사가 가느다란 창을 열었다.

아르테를 확인한 이상, 많은 말이 필요하진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지는 아시겠죠?”

“…….”

곧 아렌을 보는 아르테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람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아르테였지만,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처음 만나봤을 테니까.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들여보내 주시죠. 기왕이면, 밥도 먹여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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