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라이안의 몸 위에 올라탄 채, 아렌은 겨눈 칼을 물리지 않고 말했다.
“좋아. 심장에 칼을 꽂아주지. 네가 원하는 대로.”
어차피 아렌에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왼쪽 의안 안에는 독이 한가득 들어있다고 하니, 그의 눈을 부숴도 독에 의한 사망이 먼저일지, 운명석의 부서짐이 먼저인지는 미지수였다.
설령 운명석을 깨트려서 회귀의 고리를 끊어낸다고 해도, 그 삶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어진다면 아렌을 기다리는 건 주인을 잃은 라이안의 부하들의 증오와 복수심이다.
아렌의 대답을 들은 라이안은 별로 놀랄만한 대답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결과다 애초에 네놈에게 짐을 죽인다는 선택은 불가능했지.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고민할 시간을 아꼈을 텐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라이안.
아렌은 시선을 들어, 아직도 싸움이 한창 멀어지고 있는 지하 광장의 저편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두 황자도 이곳의 결과를 확인한 듯했다.
레온나토스의 죽음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가웨인과,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절규를 흘리는 테오드릭.
아렌은 말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날 죽이는 건 어린애 손목 비트는 것보다도 쉽겠지?”
“짐의 말을 제대로 안 들었나? 네놈이 있어야 수십 번이나 반복된 지긋지긋한 삶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겠나. 짐은 널 죽이지 않아. 물론, 네가 멋대로 죽어버린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죽이지 않는다니, 듣던 중 반가운 말이지만 반만 믿겠어. 다시 돌아가면, 난 황궁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 그대로 황궁을 나가겠어. 그 안에서 뭘 하든, 네놈 마음대로 하라고.”
“…황궁을 나간다고?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궁인 출신이라면, 바깥 삶이 팍팍해 궁으로 들어온 게 아닌가?”
“이 주변 꼴을 좀 봐.”
주변의 소란은 아주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지만, 그만큼 널브러진 시체들은 쌓여가고 있었다.
그 시체들 태반은 불길에 휩싸여 고약한 냄새를 풍겼으니, 지하 광장은 현세에 강림한 지옥과도 같았다.
“이제, 이런 건 사양이야.”
“…흠. 네놈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 마음대로 하도록. 어차피 네놈이 다른 마음을 품어도, 그것만으로 내 삶에 다른 변수를 줄 테니.”
“다음 생에선 부디 마주치지 말자, 이 미치광이 황자야.”
아렌은 황자의 심장에 검을 깊숙이 박아넣었다.
*****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황궁 조리실의 지하.
감자와 양파가 그득히 쌓인 시동들의 작업공간에 아렌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아렌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왜 일어서? 어디 가게?”
아렌 옆에 있던 시동이 깜짝 놀라 물었다. 작업 중에는 화장실도 허락을 받고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도망칠 거야. 시종장한텐 그렇게 일러둬.”
핀의 수년간의 조사를 통해, 황궁 안의 비밀통로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는 아렌이었다.
그런 비밀 시설들은 은밀함이 생명이기에, 굉장히 협소해 몸이 큰 사람들은 함부로 지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렌은 못 먹어 야윈 열 살의 꼬마다.
핀이 조사한 대부분의 통로는 아렌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날 밤, 황궁 궁인의 최말단인 시동 아이 하나가 황궁에서 모습을 감췄다.
*****
라이안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한 천장과 벽이 보였다.
브륀할트력 542년 도국 연합의 작은 도시국가 불가의 한 방에서, 자신의 의안에 대해 처음으로 자각한 시점이었다.
라이안은 아직 젊은 기색이 남아있는 참모에게 지시했다.
“아렌을 감시하도록.”
“…아렌이요?”
“아참, 그렇지.”
지금 시점의 아렌은, 모두가 아는 황궁의 유명인이 아니었다.
라이안은 자신의 명령을 수정했다.
“레온나토스의 가신 중, 아렌이라는 자가 있을 거다. 그 자에게 감시를 붙여두도록. 레온의 가신 중 아렌이라는 자가 없으면 허드렛일을 하는 궁인 중에서 찾아보도록. 이제 막 열 살이 된 애송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국에서 황제 다음의 권력을 쥐었다고 봐도 무방한 자가, 그 존재조차도 희미한 시동 하나를 지목한다는 것은 제법 어색한 일이다.
라이안으로서는 초창기부터 제법 눈에 띄는 행동을 해버린 셈이다.
참모가 이 명령을 마음에 담아두고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한다면, 라이안의 인생은 초장부터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터.
하지만 며칠 뒤, 황궁으로 날려보냈던 전서응이 도착했다.
서신을 확인한 참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아렌이란 궁인은, 황궁 안에 없다고 합니다.”
“뭐라고?”
“레온나토스 황자가 새로 궁인을 들였다고는 합니다만, 아렌이라는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부엌 허드렛일을 하는 시동 중 아렌이란 이름을 쓰는 열 살 꼬마가 있었다고 합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경비가 삼엄한 황궁 안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은 눈에 띄지만, 대부분의 궁인들은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간다.
황궁 안에서 일어난 실종은 대부분 어떤 음모에 휘말린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궁인이 사실은 암살시종이라 주인 대신 칼을 맞았거나, 봐선 안될 것을 봐버려 처리당했다거나.
다른 궁인들은 괜히 호기심을 가져 자신도 휘말릴까 봐 황궁 안의 사건 해결에는 극도로 소극적이었다.
“…한데, 전하께선 그런 미천한 시동의 이름을 어찌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참모는 실종된 시동에 라이안이 관여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아. 지나가다가 본 적 있었을 뿐이야. 제법 똘똘해 보여서, 레온나토스 말동무라도 시켜줄까 했었지. 없어졌다니, 아쉽군.”
“…레온나토스 황자를요?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탐탁지 않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참, 그랬군.”
회귀 초기에는 항상 조심해야만 했다.
지금 레온나토스는 제국 제일의 황권 후보도 아니고, 아렌 또한 이름있는 점술가가 아니다.
이제 참모는 노골적으로 미심쩍은 눈을 숨기지 않았다.
‘참모는, 좀 이른 시기에 죽여야겠군. 그런데 아렌은 정말 개입하지 않는 것을 택했나? 고작 한번 실패한 것만으로도?’
아렌을 죽이지 않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아렌이 알아줬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설령 마음이 바뀌었다 해도 도망친 아렌에 추격을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부하들 중 아렌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고, 라이안이 직접 상세하게 초상화를 그리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네놈이 택한 삶이라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라이안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아렌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이것저것 수작을 부려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라이안의 지긋지긋한 삶에 예측 못할 자극이 될 테니까.
‘지금은 아직 모르겠지. 같은 삶을 수십번 반복 하면, 결국 나처럼 생각하게 될 거다.’
다음번 회귀에서의 아렌의 태도를 기대하며, 라이안은 아렌에 대한 생각을 그만뒀다.
*****
“…후우!”
늦은 밤까지 책을 읽던 제국의 12황자, 레온나토스는 촛불을 끈 후 장정 세 사람은 거뜬히 누울 수 있는 침대에 폭 몸을 파묻었다.
늦은 밤 창밖으로 달빛이 레온나토스의 피부를 비췄다.
햇빛을 거의 보지 않는 피부에 앙상한 팔은, 레온나토스가 문밖 세상보다 책 속 세상에 더 깊이 빠져있음을 보여줬다.
“역시, 책 속 세상이 더 나아.”
얼마 전 또래의 시동 하나를 들였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같은 사치스러운 존재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자신의 생각과 강단이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새로 뽑은 시동은 그저 레온나토스의 앞에 바짝 엎드려 벌벌 떨기만 할 뿐, 레온나토스에게 다른 자극을 주지 못했다.
“형님들은 벌써부터 황권 경쟁에 돌입한 모양이지만, 난 그저 책만 읽을 수 있다면 족해.”
형제들 중 한 명이 차기 황제에 오르면, 다른 황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황도를 떠나야 할지도 몰랐지만 그때에도 지방의 어느 도서관에 취직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황권 경쟁이라니, 부질없는 짓이야.”
“-내 생각도 같아, 황자.”
레온나토스 혼자 있는 방에서, 누군가가 혼잣말에 대답했다.
레온나토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누, 누구냐!”
“해를 끼치려는 것은 아니야. 다른 이들은 부르지 말아줬으면 한다, 황자.”
원래라면 당장이라도 바깥의 위병을 불렀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를 해할 목적이었다면 한가로이 대답을 할 게 아니라, 방심한 순간에 단검을 박아넣어야 했다.
게다가 들려온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도 찾아오지 않은, 자신과 또래의 목소리.
다소 무책임한 행동임은 자각하면서도, 레온나토스는 호기심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래. 위병은 부르지 않겠다. 용건이 있다면 듣도록 하지.”
비로소 목소리의 주인은 벽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벽 사이가 문처럼 감쪽같이 열렸다가 닫혔고, 누가 설계했는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를 비밀공간을 본 레온나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곳이 있었나?!”
“그래. 나쁜 목적으로 설계된 곳은 아냐. 원래는 너의 암살 시종이 몸을 숨기는 곳이지. 그 암살 시종에는 이미 설명을 마쳤어. 지금도 방 어딘가에 숨어있겠지.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번 만남을 허락 받았어.”
목소리의 주인은 침대 앞으로 걸어나왔다.
달빛에 비친 모습은, 레온나토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열 살 꼬마의 모습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못 먹어 앙상했고, 옷은 잔뜩 헤져 있었다.
“몰골이 이래서 미안하군, 황자. 황궁의 구석구석에서 며칠이나 숨어 있었거든.”
“…네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내 앞에 섰는지, 왜 무엄하게 황족에 예를 갖추지 않는지. 내가 들어야 할 것이 많다.”
“물론이지. 나야말로 해줄 말이 많아. 물론, 어디까지 믿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렌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마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듯, 아렌의 이야기에 푹 빠진 레온나토스. 그 순간만큼은 이야기의 진위 따위도 중요치 않았다.
아렌이 두 번의 회귀, 세 번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마쳤을 때, 창밖의 하늘은 이미 푸른 색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제법 잘 꾸며낸 이야기군. 재미있었다. 잘 만든 이야기를 내게 선보이고 싶었던 건가?”
“물론, 아무 증거 없이 내 이야기를 믿으라는 건 아니야.”
“그럼?”
“황자, 너는 자신의 몸에 독이 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내 몸에 독?”
“그래? 지금 시점에는, 아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다. 황자 너도 포함해서.”
아니, 어쩌면 제13 황자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극적인 효과가 더욱 중요했다.
“황궁에서 토란은 거의 식재료로 올라오지 않지. 한번 토란을 구해서 아주 살짝 혀에 갖다 대봐. 많이는 말고. 그러면 내 말을 믿을 수 있을걸?”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렌은 다시 황궁의 벽 뒤로 사라졌다.
네 번째 삶, 세 번째 회귀에 이르자, 아렌은 황궁에 모습조차도 드러내지 않는, 진정한 흑막이 될 요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