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황자의 검이 더글라스의 심장부를 깊이 가를 때까지, 아무도 라이안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다.
더글라스는 검을 수족처럼 부리는 검사였고, 라이안의 행동을 막기 위해 사용한 것 역시 자신의 검이었다.
하지만, 라이안은 반격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고, 더글라스에게 회피와 방어, 둘 중 하나만을 강요했다.
설상가상 자신의 검마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움직임을 멈추자, 더글라스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검에 담뿍 묻은, 더글라스의 심장에서 흐른 선혈을 공중에 흩뿌리며 라이안은 감탄했다.
“설마하니, 짐 정도의 실력으로 차기 검성을 죽일 수 있다니. 아렌 네 능력도 제법이군.”
“…….”
“표정이 왜 그렇지, 아렌? 이건 명실상부 네 덕분인데. 어깨를 펴도 좋아.”
지하 광장에선 지금도 속속 단심병과 흑사자 기사단이 정리되고 있었다.
전황 전체적으로 보면 라이안의 세력은 착실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레온나토스 주변만은 달랐다.
레온나토스 주변에 힘을 집중시킨 라이안은, 다른 곳의 병사들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고 오직 레온나토스와 아렌만 노릴 뿐이었다.
이 주변에 자신의 병력을 집중시킨 것도 있지만, 진형의 첨단에 있는 라이안에게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것이 고전의 이유였다.
라이안을 죽일 수 없으니 산채로 붙잡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 정도 각오로 붙잡힐 만큼 라이안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비록 천재 가웨인과 천상 무골인 테오드릭만큼은 아니지만, 라이안도 황자들 중에서는 손에 꼽힐 만한 검술 고수였으니까.
‘이건, 실패다.’
아렌은 속으로 탄식했다.
지금 순간에도 횃불을 든 단심병들이 하나 둘 쓰러졌지만,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신체 전부를 휘감는 불길에 휩싸여 주변을 더욱 밝게 빛냈다.
지하 광장은 전투 전보다도 지금 더욱 밝아져 있었다.
밝은 빛은 검에 찔리고 불에 탄 시체를 더욱 환히 드러냈다.
그 시체들 중에는 아렌과 레온나토스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희생된, 가장 강한 기사들의 것들도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나, 아렌. 얼굴을 좀 피는 게 어떤가.”
“…….”
“이런 실패를 겪는 건 처음인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이것도 몇 번 겪으면 무덤덤해져. 어차피 다음이 있으니까.”
아렌과 가까운 곳에서 또다시 단심병이 폭발했다.
이제 단심병은 곧 목숨이 다할 때 뿐만 아니라, 아무 부상이 없음에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뜻 자폭을 단행하고 있었다.
가웨인과 테오드릭, 두 황자는 라이안의 부하들을 속속 정리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한결 수월한 이유는 라이안의 부하들이 대부분 레온나토스 쪽에 집결해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황자에게 뒤를 잡히더라도, 그 전에 레온나토스와 아렌을 확실히 처리하겠다는 집념까지 느껴졌다.
아렌은 검을 뽑았다.
‘…훨씬 전부터 이랬어야 했어.’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라이안에 걸려있는 언령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아렌이었다.
다른 이들이 라이안의 행동이라도 묶어주기를 바랐었지만, 지나친 기대임이 드러난 이상 아렌이 직접 나설 수밖에.
아렌을 마주한 라이안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호오, 검술이라.”
“이래봬도 검은 제법 잘 다루지. 물론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니, 별로 뜻밖은 아닌데. 짐도 마찬가지니까.”
“…하긴.”
아렌은 첫 번째 회귀를 겪은 후부터 계속 검을 수련했다.
아렌 자신에게도 검에 대한 재능은 있었고, 가르치는 선생이 검성 후보인 더글라스인지라 아렌의 검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맞은 두 번째 회귀. 아렌은, 첫 번째 회귀 때보다도 확연히 더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라이안도 마찬가지.
‘…회귀한 만큼 강해진 건, 나만이 아니라는 건가?’
아렌의 수련법은 라이안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아니, 라이안은 도합 70번이나 되는 회귀 경험이 있으니, 아렌보다도 수련의 기회는 아득히 많을 수밖에.
모든 분야에서 모자람이 없는 제1 황자 라이안은 팔방미인이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었지만, 다른 이에 비해 삶의 길이가 수십 배에 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한 번에 서른살까지만 살았다고 쳐도, 70번 회귀했으면 2000년이 넘는군.’
문득 생각하니 새삼 눈앞의 황자가 달리 보였다.
도리어, 그만큼의 세월을 살고도 고작 ‘팔방미인’ 정도의 평가밖에 받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만큼이나 살아온 것치고는,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나?”
“…딱히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데.”
“아쉽지만 짐에겐 저기 가웨인이나 더글라스같은 재능은 없었어. 수련을 할 수록 실력은 늘고 경험은 쌓여갔지만, 어느덧 정체기가 오면 특별한 계기 없이는 실력이 올라가지 않지. 마치 이 정도가 짐이 가진 잠재력의 한계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 정도로도 아렌을 제압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실력이다.
라이안은 마치 아렌이 맨손인 것처럼 접근해왔고, 아렌은 거리를 지키기 위해 검을 내질렀다.
-카가각!
그 검을, 라이안은 자신의 검으로 빗겨 막았다.
지금껏 라이안에 대한 수없이 많은 공격 시도가 있었지만, 라이안과 검을 맞댄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저런. 나도 모르게 막아버렸군. 기껏 네놈의 검은 내게 닿을 수 있는데 말야.”
“…그래. 나 혼자선 무리겠지.”
아렌의 뒤에서 낮안개 기사단들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자신들의 단장을 잃고 최고 고수인 더글라스까지 허망하게 죽었지만, 그렇기에 낮안개 기사단은 더욱 독하게 달려들었다.
비록 레온나토스 주변은 잠시동안 더 위험해지겠지만, 다른 기사들의 힘을 빌려서 라이안의 왼쪽 의안을 깨트리기만 하면 라이안 황자의 목숨을 두고 얼마든지 협상할 수 있다.
기사들이 라이안을 붙잡아두고, 아렌이 그의 몸에 칼을 겨눈다. 이게 원래 세웠던 계획이었다.
다른 기사들은 라이안을 죽일 수 없지만, 왼쪽 의안을 깨트리는 것 정도라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비록 왼쪽 의안에 대한 사실을 이곳에 모인 모든 연합에 알리지는 못했지만, 더글라스와 발커스, 그리고 낮안개 기사단 등 최측근에게는 이미 알린 뒤였다.
라이안은 한순간 기사들에게 둘러싸였지만, 흑사자 기사단과 단심병은 미리 지시를 받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의도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라이안만 붙잡으면, 이 싸움은 끝나!’
“흠, 짐의 왼쪽 눈을 노리는 건가?”
라이안도 어렵지 않게 기사들의 노림수를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기사들의 칼날이 날아들었음에도.
하지만, 라이안의 왼쪽 눈을 정교하게 노린 검들마저도 라이안에게 닿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움직임을 멈췄다.
“…….”
“놀랐나? 운명석을 유리로 감싼 의안 안쪽엔 독극물을 넣어뒀지. 내 의안이 깨지면 나도 죽어.”
라이안은 순간 멈칫한 기사들의 검을 수수깡처럼 쳐냈다.
그순간.
“-아렌! 형님의 눈을 쳐서 모든 것을 끝내!”
레온나토스의,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와 동시에 퍼펑,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빛이 아렌의 등 뒤를 밝혔다.
“…레온나토스?”
아렌은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돌아본 순간 라이안의 검이 자신의 목을 갈라놓을 것 같았다.
지금도 아렌은 다른 기사들과 합심해 힘겹게 라이안의 전진을 막아세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렌은 결국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다른 기사들이 조금 더 앞으로 나온 사이, 아렌은 폭음이 터져 나온 뒤쪽을 돌아볼 찰나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곳에, 황자는 없었다.
대신 단심병 대여섯이 한꺼번에 자폭한 듯한, 거대한 화염 덩이만 레온나토스가 있던 그 자리 위를 광범위하게 태우고 있을 뿐.
“싸우다 말고 어딜 보는 거냐, 아렌. 불구경이 즐겁나?”
“…….”
아렌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라이안.”
아렌이 고개를 돌린 찰나의 순간, 흑사자 기사단과 단심병이 움직였다.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지금 아렌과 라이안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라이안이라면 아렌의 저항 따위 금방 부수고 몸에 칼을 박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라이안은 아렌을 앞에 두고도 그저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뭐하는 거지? 날 죽이지 않을 건가?”
“죽여? 짐이 널? 왜 그래야 하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라이안의 말.
“짐이 널 죽이면, 짐은 자연사할 때까지 이 지루한 삶을 반복해야 하는데. 내가 왜.”
도리어, 라이안은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던졌다.
“자, 이제 널 지켜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낮안개 기사단장도, 근위기사 더글라스도, 레온나토스조차도 짐의 부하가 죽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현재 짐도 무방비 상태로군. 복수하고 싶겠지?”
“…이 자식이!”
아렌은 무방비한 라이안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넘어진 라이안의 몸 위에 올라탄 아렌은, 올라탄 자세 그대로 검을 라이안에게 겨눴다.
주변의 단심병도, 흑사자 기사단도 아렌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두 황자의 병사들이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서기까지 했다.
“저런, 짐의 위에 올라타다니, 무엄하구나.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자신을 노린 칼끝을 보고도 라이안은 침착하게 말했다.
“…….”
“칼끝이 흔들리는군. 생각이 복잡한가 보지?”
“닥쳐.”
“지금 짐의 왼쪽 눈을 찔러 모든 것을 끝낼지, 아니면 심장을 찔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지.”
“…….”
“미리 말해두겠지만, 네놈은 짐의 운명석을 깨트리지 못한다. 그 안에 독을 넣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한 지금의 삶을 되돌리고 싶기 때문에.”
아렌의 칼끝이 흔들렸다. 아렌은 사람을 태우는 불길로 일렁거리는 빛 속에 비치는 라이안의 표정을 읽었지만, 라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아렌의 표정을 읽어내는 기술은 재능과 더불어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능력이지만, 한쪽 눈이 의안인 2000살을 만나본 경험 따위, 아렌에겐 없었으니까.
“어쩌면, 이대로 내 왼쪽 의안을 깨트리면 능력을 잃은 내가 있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지. 혹은, 네가 저지른 무수한 실패가 남아있는 현재에 덩그러니 남게 되거나. 나는 죽겠지만, 너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아니 그 이전에.”
차가운 지하 광장의 바닥에 누운 채로 라이안은 단언했다.
“넌 분명 이번 생의 실패를 감내하고 싶지 않을 거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지만, 선택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아주 자유로워 보이는 선택조차도, 실은 백이면 백 같은 것을 고르기 마련이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한 선택을 수십번 본 짐이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
“…만약에, 내가 네놈의 심장을 찌른다면 회귀한 후 넌 날 죽이겠지?”
“여전히 뭘 모르는군.”
라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넌 앞으로 항상 같은 선택을 할 거다. 짐과 마찬가지로, 이 회귀를 끝내고 싶지 않겠지. 그런데 짐이 왜 네놈을 죽이겠나. 70번이나 반복한 지긋지긋한 인생에, 이제야 예측 못 할 변수가 끼어들었는데!”
마음을 읽는 게 쉽지 않은 라이안이지만, 방금은 아렌도 알 것 같았다.
방금 한 말은, 라이안의 100% 진심이었다.
“네놈이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삶도 조금은 재미있어지겠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포기한다면, 한정된 구간 속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사실상 영생이나 마찬가지지!”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반복해서 보는 것이 영생이라고?”
“무엇이 문제인가? 짐이 되돌아가면 다시 살아날 자들인데.”
아렌은 깨달았다.
인생을 70번이나 되풀이한 자는 인세에 다시 없을 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복되는 삶에 중독된 미치광이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