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지하의 광장을 세 방향에서 포위한 황자들.
서로의 병사들은 예고도 없이 맞붙었고, 지하는 곧바로 고함과 피가 난무하는 곳이 되었다.
라이안과 그의 부하, 단심병은 포위되었음에도 당장은 잘 버텨내고 있었다.
물론 더는 물러날 곳이 없으면 필사적으로 싸울 테지만, 사기는 급락한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병사들의 사기는 승패를 가를 만큼 중요한 요소다.
포위된 채 싸우는 병사들 중, 마지막까지 최후의 1인까지 맞서 싸우는 경우는 손에 꼽으니까.
하지만, 라이안의 병사들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세 방향에서 몰려든 병사들을 묵묵히, 담담히 막아내고 있었다.
‘…저 병사들은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건가?’
라이안을 향한 충성심이 지나칠 만큼 높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병사들이 보여주는 담력은 단순한 충성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곳곳에서 단심병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을 포위한 세 황자들의 병력 또한 제국 최정예의 기사들, 혹은 그에 버금갈만한 정예병이었기 때문이다.
무위와 숫자, 진형 모두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아무리 철의 심장을 가진 단심병으로서도 중과부적이었다.
낮안개 기사는 앞을 가로막은 단심병의 칼을 쳐내고, 그의 옆구리를 길게 갈랐다.
푹, 앞으로 고꾸라진 단심병.
그만한 중상이면 칼을 들 힘조차도 없다.
낮안개 기사는 쓰러진 병사를 무시하고 다음 상대에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펑!
쓰러졌던 단심병의 몸은 폭발하듯 활활 타올랐다.
횃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밝은 광원에 일순 병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오직 단심병들만 무심하게 앞의 적들만 응시할 뿐.
“-자폭?”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펑!
-퍼펑!
밝은 섬광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쓰러졌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었던 단심병에게서 발생했다.
불은 기세 좋게 타올랐고, 사방으로 액체 섞인 불똥을 흩뿌렸다.
그 기세에 가까이 있던 낮안개 기사 한 명이 휘말려 들었다.
기사는 급하게 불을 끄기 위해 손으로 두드렸지만, 불은 손에도 엉겨 붙을 뿐이었다.
불꽃은 삽시간에 갑옷 전체를 휘감았고, 기사는 뒤늦게 갑옷을 벗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크아아아악!”
기사는 고통을 오래 끓여 졸여낸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이 오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주변의 동료들이 달려와 불을 끄기 위해 발로 밟고, 수통의 물을 부었지만 소용없었다. 도리어 불은 물을 타고 주변으로 더욱 번져갔다.
아렌은 저것과 비슷한 것을 전에 본 적 있었다.
“…바다 용암?!”
과거 도국 연합의 수장국 중 하나였던 레데의 비전인, 바다 위를 떠다니는 액체 인화병기의 이름이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웬만해서는 끌 수 없고, 물 위에 떠서 주변으로 번지는 특성이 있기에 한번 배에 불이 옮겨붙으면 그 배를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바다가 아닌 만큼 바다 용암의 불길을 피하기 쉬웠지만, 모든 기사들이 불이 한번 붙으면 꺼지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사기를 잃을 만큼은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놈들! 죽으면 자폭한다!”
“목과 머리를 노려! 숨을 끊기 전까지 절대 방심하지 마!”
곳곳에서 기사들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전까지는 세 황자의 연합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런 전장에서야말로 기세만큼 판세에 영향을 주는 것이 없다.
단심병들의 자폭은 사방에 불길을 흩뿌리며 연합군의 전진을 막았다.
전선을 따라서 긴 원형의 바다 용암 불꽃이 점점이 그려졌다.
‘바다 용암은 분명 레데의 극비였을 텐데.’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의외는 아니었다.
‘레데의 전쟁 배후에는, 라이안이 있었던 건가?’
[시작은, 네놈들이 먼저 한 것이지 않나.]
레데 함대의 제독이었던 카슬 랜돌프가 마지막에 한 말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라이안이 수많은 삶을 반복하는 동안 어느 한 삶에서는 레데의 비전 조합법을 습득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설령 그 습득 과정에 자신과 주변의 파멸이 예정되어있다 해도, 라이안으로서는 한번 죽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바다 용암을 품에 지닐 수 있게 된 단심병들의 목숨은 아직 붙어있고, 더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할 때 품속의 병을 깨트리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아무리 충직한 병사라도 죽음 앞에서는 판단이 무뎌진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세뇌된 단신병에게는 그러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사들은 불길을 피해 가며, 단심병을 단칼에 죽이기 위해 머리와 목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그런 만큼 기사들의 허점도 늘었다. 실력에서는 명백히 우위를 점하지만, 불리한 상황들이 맞물리며 점점 공격을 허용하는 기사들도 늘고 있었다.
거기에, 단심병 사이사이에서 번뜩이는 흑사자 기사단의 칼날까지.
레온나토스 진영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시작은 더글라스였다.
“내가 전면에 서겠다! 최대한 앞 열을 지켜!”
더글라스의 외침 후, 레온나토스 진영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전에는 무리하게 급소를 노리느라 다소 허점을 노출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사들은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오로지 단심병의 검을 받아내는데만 집중했다.
낮안개 기사단과 단심병 사이의 대치가 길어질 무렵, 낮안개 기사단의 뒤에서 뻗어 나온 검이 빠르게 단심병의 목을 찌르고 사라졌다.
단심병은 병을 깨트릴 힘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사들이 앞에서 벽처럼 버텨주고, 뒤의 더글라스가 공격을 도맡는 작전은 예전 엔지 황자와의 모의전에서도 써먹었던 방법이었다.
다수가 방패로 버텨주면, 소수의 빠르고 날카로운 검이 뒤에서 공격하는 전법.
그 와중에도 버티지 못하고 단심병의 칼에 맞은 기사도 있었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펑, 펑!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음은, 이전보다도 더 다급하게 들렸다.
죽음에 처한 상황이 아님에도 동귀어진을 위해 바다 용암을 터트리는 단심병이 점점 늘었지만, 이제는 기사들도 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불꽃이 된 단심병은 무시하고, 아직 자폭하지 않은 병사는 단칼에 목숨을 끊으면서, 기사들은 시체가 된 단심병을 짓밟고 천천히 전진했다.
단심병의 안쪽, 라이안의 주변으로는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흑사자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지만, 오히려 자폭의 위험이 없는 이상 단심병보다도 상대하기는 쉬운 상대였다.
어느덧 상대적으로 후방에 있던 흑사자 기사단조차 칼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전황은 혼잡해졌다.
충직한 흑사자 기사단 몇몇이 외쳤다.
“전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막는 동안 이곳에서 벗어나 후일을 도모하고 일단 지금은 후퇴를!”
“…도망? 어디로? 위로 향하는 통로라면 저기 친애하는 아우들이 막아서고 있는데. 게다가, 저기에 내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도망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라이안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아렌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투의 소음이 만연한 전장에서도, 라이안이 한 말은 아렌에게까지 어렴풋이 들려왔다.
현재 라이안은 사고로 죽을 수도, 살해당할 수도 없다. 아렌의 언령이 광범위하게 적용돼, 자신의 죽음을 야기하는 행동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라이안이 이곳에 스스로 왔다는 것부터, 이곳에서 그가 죽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 이곳에서 그를 죽일 가능성이 있는 건 운명석 계약자인 아렌 뿐.
그리고 라이안은 죽어야만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라이안은 아렌을 발견하고 그쪽을 향해 곧장 직선으로 달려왔다.
라이안을 호위하는 흑사자 기사단이 호위를 위해 쩔쩔매며 따라붙었지만, 자신을 향한 칼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라이안을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서걱.
지나가며, 나무의 가지라도 치듯 무심히 낮안개 기사단의 목을 벤 라이안 황자.
가웨인과 테오드릭을 제외하면 황자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강한 검술을 가진 그였다.
“라이안 황자가 여기 있다!”
어느 기사의 외침에 라이안 역시 맞받아 외쳤다.
“하! 짐을 죽일 텐가? 어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가 누구냐!”
황자가 물러서지 않자 오히려 기사들은 망설인다.
아렌이 외쳤다.
“라이안 황자의 수배는 생사 불문이다! 손속에 여유를 두지 마라!”
다급한 상황이라 평소처럼 높임말도 쓰지 못했지만, 덕분에 아렌의 말은 레온나토의 외침처럼 들렸다.
그 한마디로 기사들의 망설임은 사라지고, 여전히 전황은 혼란스레 흘러갔다.
라이안 황자의 앞을 달려온 단심병 하나가 옷 안에 단단히 결속한 병을 깨트렸고, 한번 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흑사자 기사단도, 낮안개 기사단도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때, 라이안은 화염 옆을 거의 스치다시피 뚫고 달려왔다.
바다 용암은 분수처럼 불똥을 흩뿌렸지만, 바로 옆을 달린 황자의 몸에는 불똥 한톨조차 붙지 않았다.
‘…언령!’
라이안은 지금 순간도 언령의 효과를 두둑하게 받고 있는 듯했다.
레온나토스와 아렌만을 향하는 라이안을 막기 위해 낮안개 기사들이 앞을 막아 세웠지만.
라이안에게 동시에 겨눠졌던 칼날은,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기사들의 각오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기사들 또한, 언령의 영향으로 라이안에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심병과 흑사자 기사단으로부터 단단히 보호받고 있던 라이안 황자는, 사실 그들의 보호가 필요없을 만큼 가장 강력한 힘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낮안개 기사단을 흑사자 기사단이 유린했다.
단심병을 베어 넘기며 전선을 앞으로 힘겹게 가져왔지만, 라이안은 바로 그 혼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안개 기사단의 전열이 무너지고, 이제 라이안은 레온나토스와 아렌 바로 앞에 다다랐다.
“전하! 아렌! 위험합니다!”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명의 단심병이 발커스를 상대했지만, 단심병이 두 명 정도 더 가세하지 않는 한 둘의 검은 발커스의 몸에 닿지 않는다.
더글라스만 없었다면 발커스가 레온나토스 진영의 최고수다.
“과연, 불꽃의 기사인가. 그 명성이 결코 허언이 아니로군.”
하지만 발커스의 분전에도 태연히 전진하는 라이안.
“어딜!”
발커스의 검이 라이안의 앞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발커스의 검은 그의 앞에서 멎었다.
그와 동시에
-쨍강.
단심병이 허리띠 안쪽에 묶어놨던 유리병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그들의 몸이 화르륵 타올랐다.
“발커스 경!”
발커스가 아무리 고수라 한들, 화염을 검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발커스의 몸은 곧바로 화염에 휩싸였다.
하지만, 발커스는 몸에 불이 붙었음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 불꽃에 휩싸여본 적 있어서일까.
몸이 심지처럼 타들어 가고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발커스는 두 명의 단심병을 더 베어넘겼다.
발커스의 팔은 이내 더는 검을 들지 못했고, 발커스는 마지막 기력을 다해 나머지 한 명과 포옹했다.
마지막 적이 완전히 화염에 휩싸였을 무렵, 발커스의 몸은 완전히 탄화되어 거의 바스러질 지경이었다.
“…….”
아렌은 두 번째 삶에서 설원의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 제이드를 쓰러뜨린 직후에 나눴던 말을 떠올렸다.
[축하해요, 불꽃의 기사.]
[…불꽃의 기사? 뭡니까, 그 촌스러운 별명은]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곧 그렇게 불리게 될 테니까.]
‘…아니, 아니야. 저건 점괘의 형식을 빌린 말이 아니었어. 언령이 아니었다고.’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렌의 첫 번째 회귀에서, 발커스를 불꽃의 기사라 이명을 붙인 건 아렌이 아니었다. 이번 삶에서 불꽃의 기사를 가장 먼저 언급한 인물이 아렌인 것 또한 사실.
“-아렌! 뭘 멍하니 있는 거야!”
더글라스가 성난 코뿔소처럼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의 앞을 막아서는 건 이제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라이안 혼자 뿐.
더글라스는 달려오던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그대로 관성을 실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더글라스의 검은 자신의 체중과 관성조차 무시하고 라이안의 코앞에서 멈췄다.
라이안이 조소했다.
“제국 최강의 기사가 내지른 일격마저도 멈추게 하다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아렌. 자네의 능력이니까.”
-푸욱.
제국 제1 황자의 검이, 평민출신 근위병이자 유력한 검성 후보인 더글라스의 심장을 도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