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핀이 제시한 지하수로에 들어가는 입구는, 예전 엔지 황자와 모의전을 했던 그 광장의 지하에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광장이라 평소라면 보는 눈을 피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마침 지금 황도의 분위기는 마치 계엄 상황과도 유사했다.
다행이라고 하기엔 다소 멋쩍은 상황이지만, 덕분에 병사들은 사람을 물린 광장에서 수월하게 지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수로는 덩치가 큰 병사가 조금 숙여야 할 정도로 빠듯한 크기였지만, 곧 어디선가 흘러온 물이 폭포처럼 떨어지는 구간에 도착했다.
핀은 그 물줄기 안쪽을 가리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안쪽에 통로가 있습니다. 횃불이 젖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핀의 말대로 물 안쪽을 지나자, 곧바로 사람이 다닐 것을 상정한 널찍한 복도가 나타났다.
공기 역시 방금 전까지는 습하고 텁텁했지만, 지금은 쾌적했다. 지하 깊은 곳임에도 어디선가 통풍이 잘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여기가 지하가 아니라, 지상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해도 믿겠군.”
레온나토스는 횃불을 높이 들어 올렸지만, 복도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환기시설까지도 고려해서 지어진 건가?”
“아마, 그건 아니겠죠.”
레온나토스가 가볍게 던진 의문에 아렌이 부정했다.
“오기 전, 잠시 레밍에게 들렀습니다. 제국 이전의 황도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봤죠. 제국 이전에도 이곳에 몇몇 왕국이 서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곳의 유적인 줄 알았지만, 기록을 보면 제국은 먼저 서 있던 건물들을 철저히 부쉈다고 하더군요.”
“이런 깊은 지하에 있었으니, 몰랐던 것 아닌가?”
“…그리고, 이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던 때부터, 이곳에는 두텁고 단단한 화산재로 뒤덮인 땅이었다더군요. 제국 이전의 왕국들도 그 화산재 위에 건물을 세웠고요.”
“그럼-”
“지하수로 아래에 있는 유적은, 기록조차 남지 않은 고대에 묻혀버린 건물일지도 모릅니다.”
“…….”
레온나토스는 걷고 있던 복도의 벽을 살폈다.
깊은 지하이고, 통로 바로 앞에 물이 흐르고 있음에도 공기는 습하지 않았으며 벽도 단단했다.
이끼나 곰팡이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아렌 네 주장도 그럴듯하군.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곳은 이천 년은 족히 된 유적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지상용으로 설계된 건물이 땅속 깊이 묻혔고.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적 아닌가?”
“그렇습니다. 기이한 일이죠.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뭐?”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건물이,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비원궁!”
“네. 이 유적 역시 운명석으로 보호되고 있다면 가능하죠.”
고대 유적에 접어들고 나서도 병사들은 한참을 더 걸어갔다.
유적의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서, 황궁을 넘어 어쩌면 황도 전역까지 뻗어나가 있을지도 몰랐다.
‘…벽과 천장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지? 이래서야 건물 전체가 도시 규모나 마찬가지잖아.’
아렌의 머릿속에 ‘미궁’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복도는 완만하게 아래를 향했고, 병사들은 다 태운 횃불을 교체해가며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복도의 분기가 나타나자 가웨인과 테오드릭은 갈림길에서 각각 나뉘었다.
각각이 라이안과 대적하기 부족함이 없었고,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수적 우위를 살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뭉쳐서 서로에게 방해가 되느니, 라이안이라도 빨리 찾아내는 것이 답일 수도 있었다.
“…….”
빛이라곤 없는 복도를 하염없이 내려가면서, 아렌은 기시감을 느꼈다.
태양교의 칠흑같은 대사원 내부를 탐험할 때도 지금처럼 막막한 앞을 더듬어가며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내가 되돌아오고 했던 모든 행동이 운명석, 고대유적과 연관된 것 같은데.’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인도하는 대로 놀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저 기분 탓으로 여기고 싶었지만, 실제로 아렌은 목이 잘리기 전까지는 운명석이니 고대인이니 하는 것을 전혀 모르며 살아왔다.
하지만 한번 과거로 되돌아오고 나니, 지금까지 지나쳤던 것들마저 한꺼번에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라이안은 이제 나도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라이안에게 다시 회귀를 허용하면 그대로 끝이라 생각하는 게 맞겠지.’
지하에 숨어있는 라이안을 쫓아, 세 명의 황자가 호기롭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전하,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다수가 힘을 내기 쉽지 않은 지형이고, 라이안 형님의 본진과 마찬가지이니. 하지만 우리 역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들어왔으니, 라이안 형님이 아무리 대비했다 한들 아무리 못 쳐줘도 호각은 되겠지.”
아무리 미심쩍은 공간이라도, 레온나토스로서는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대자보가 나붙을수록 황도와 황궁의 사기는 실시간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안쪽을 포위한 채 봉쇄한다 해서 라이안이 얌전히 안에서 굶어죽으란 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안이 어느 뒷구멍으로 빠져나와 영영 도주할지 모르는 상황.
이곳의 존재를 알아낸 이상, 직접 들어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레온나토스의 말이 맞아. 라이안이 아무리 대비를 잘해놨다 한들 이쪽 역시 꿀릴 건 없어. 최악의 상황이라도 양측의 균형은 호각이겠지.’
그럼에도, 이곳으로 유인되었다는 께름칙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기분 나쁜 어둠이군. 마치 살갗에 달라붙는 듯한 기분이야.”
“네. 아마 상상도 못할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햇빛을 받지 못한 곳일 테니까요.”
아렌도 수긍했지만, 레온나토스보다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러는 아렌 너는 꽤나 익숙한 것 같은데?”
“네. 실은 태양교의 대사원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어둠을 겪었었죠.”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예전부터 아렌 자네에게 고생을 많이 시켰군. 내가 황제가 되면 이제 그런 고생은 시키지 않겠네.”
“오, 이제 황제 자리가 가까워지니까 공수표도 남발하십니까? 벌써부터 정치에 익숙해지신 것 같아 불초 아렌, 감개무량합니다.”
“시끄러, 아렌. 고생이 좋으면 계속 시켜주지.”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무겁게 가라앉은 어둠을 몰아낼 목적으로 약간의 농담을 섞은 둘은, 이내 미약한 탄내를 맡았다.
“…연기 냄새다.”
이 안에 들어와서 가장 명징하게 확인한 인기척이었다.
선두에 선 기사들의 경계태세부터 달라졌다. 병사들은 오감을 곤두세운 채 임전 태세로 복도를 지났다.
-저벅.
-저벅.
병사들이 규칙적으로 발을 내딛는 단조로운 소리만이 한동안 계속 반복됐다.
이윽고, 병사들은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완만하게 아래로 이어진 복도 끝에는, 마치 광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천장의 끝은 보이지 않고, 점점이 거목처럼 솟아오른 기둥들이 보였다.
황제의 모든 신료를 수용할 수 있는 대회견장과도 흡사한 구조였다.
그리고 그 안을, 점점이 박힌 수십 개의 횃불이 밝히고 있었다.
횃불 아래로 보이는 건, 미동조차 하지 않는 병사들의 얼굴.
자신을 원형으로 두텁게 둘러싼 병사들 중앙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라이안.’
지하 광장의 가장 중심에는 라이안이 있었다.
언제나 황궁의 가장 밝은 곳에 있었던, 어두운 그늘과 연이 없을 것 같았던 제1 황자 라이안은, 지금 어둠을 부하로 거느린 밤의 왕처럼 그곳에 군림했다.
“아, 왔나?”
썩 크게 낸 목소리가 아님에도 라이안의 목소리는 광장 안 곳곳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광장과 이어진 또 다른 통로에서 각각 가웨인, 테오드릭이 도착했다.
광장 중앙에 모인 라이안의 부하들을, 세 황자가 포위한 듯한 형상.
하지만 300명 정도 되어 보이는 횃불 아래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포위되었음에도 오히려 결연했다.
‘-결연해? 아니, 그렇다기보다…’
마치, 감정이 뿌리채 거세된 듯한 모습이었다.
‘…라이안이 기이할 만큼 충직한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
레온나토스의 반대편 복도에서 나타난 가웨인은, 중앙의 라이안에게 외쳤다.
“형님! 이게 형님의 최후입니까! 제국의 황제에 가장 가까웠다는 사람의 말로로는 너무 추하지 않습니까!”
가웨인의 비아냥을, 라이안은 태연하게 맞받았다.
“가웨인! 그리고 테오드릭까지! 테도를 보아하니, 날 먼저 처치해 점수를 딸 생각은 전혀 없구나! 너희들이 언제부터 레온나토스와 그리 사이가 좋았더냐!”
레온나토스가 앞으로 나섰다.
우선은, 경계했던 다른 함정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안 형님! 이대로 물러서시지요. 이대로라면 형님이 황제가 되더라도 그 결과가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대로 병사를 물려 피해를 최소화해주신다면, 형님의 선처를 폐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분명 폐하께서도 제 제안에 응하실 겁니다!”
“-하. 아직도 황권 타령이냐? 어떨 때는 한없이 유능하더니, 이런 일에는 너무도 느리구나, 이 우둔한 동생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긴, 지금은 황권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죠. 형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위해 계속 돌아가는 것입니까.”
“몇 번이고 밝혔다만, 그게 모두를 위한 삶이지.”
공간의 대부분이 텅 비어있는 지하 광장에서, 작은 목소리도 크게 증폭되었다.
스케일이 크고 신비롭지만, 어딘가 공허한.
이 공간은 마치 라이안과 같다고 아렌은 느꼈다.
라이안의 병사들이 주변을 겹겹이 둘러쌌기에 멀리서, 어렴풋한 횃불을 들은 아렌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각 정보로 라이안의 속내를 읽을 순 없었지만, 굳이 유추할 필요 없이 라이안의 속내는 대강 짐작이 갔다.
“-모두에게 최선의 삶을 찾아주고 싶다고 했지만, 실은 모두를 위해 착한 의도로 벌인 일은 아니겠죠.”
“…아렌?”
보통 이런 경우,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뒤에 숨어서 조금씩 거드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처럼 대치 중인 황자에게 직접 말 거는 건, 이제는 당당하게 전면에 나서겠다는 확신과도 같았다.
“라이안 황자는 그저, 자신이 몰랐던 세상의 이면이 재미있을 뿐입니다. 개미의 집이 궁금해 개미집을 파헤치며, 그 와중에 몇이 죽어도 개의치 않는 것과도 같죠.”
“허, 완전히 악담을 하는군. 내게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제가 다른 할 말이 있습니까?”
“왜, 날 죽이러 왔다거나, 각오하라거나-”
“아뇨. 전 당신을 죽이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끝내러 왔지.”
다른 이에게는, 라이안과 아렌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죽이러 온 것은 아니지만, 끝내러 왔다. 아렌의 최우선 목표는 라이안의 운명석을 부숴, 일흔 번이나 반복된 삶을 다시 흐르게 하는 것.
하지만 라이안과 아렌이 말하는 동안에도 횃불을 든, 무표정한 병사들은 지하에 그대로 조각상처럼 도열해있을 뿐이었다.
“…날 끝내러 왔다? 그것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이 짓을 몇 번이고 반복했더니 슬슬 신물이 나서 말이야.”
“걱정 마시죠. 제가 곧 끝내드릴 테니.”
“자신만만한데, 괜찮겠어? 지금은 레온나토스가 아니라 네가 황자같은데!”
“어진 황제에는 유능한 가신이 뒤따르는 법이죠.”
“그렇겠지. 공교롭게도 네게 불만을 가질만한 황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
더는 말이 필요치 않았다.
라이안을 포위한 세 황자는 세 방향에서 병사들을 슬그머니 전진시켰다.
라이안의 단심병은 여전히 그대로 있을 뿐.
그리고 잠시 후.
칼날의 폭풍이 지하 광장 안을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