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핀, 무언가를 알고 있나? 그렇다면 어서 말해주게!”
레온나토스가 핀을 채근했지만, 그 행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웨인이 레온나토스를 막아세웠기 때문이다.
“잠깐. 그 내용은 레온, 너 혼자만 들어라.”
“…가웨인 형님?”
테오드릭 또한 가웨인의 의견에 가세했다.
“그래, 그게 좋을 거다. 내가 말하는 것도 멋쩍지만, 혹시 누군가 먼저 새치기할지도 모르니. 만에 하나라도 대비하는 게 낫겠지.”
“테오드릭 형님까지…”
두 황자가 입을 모아 말하니, 레온나토스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레온나토스만 먼저 듣고 판단한 후 알려주기로 하고, 가웨인과 테오드릭 두 황자는 물러갔다.
두 황자가 합심해 자신을 지지하는 상황이 여전히 어색하지만, 레온나토스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레온나토스와 아렌, 핀만 남은 황궁 내원의 정문 앞.
핀은 아렌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다.
“실은 아렌 나리도 알고 있지? 일전에 내가 보고했었잖아.”
“…보고?”
“그 왜, 황궁에 숨겨진 거의 모든 시설을 찾은 다음, 그 아래 파묻혀있는 지하수로를 발견했다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그 뒤 유적이 있었다고 했지.”
“나리한테 보고한 뒤에도 그 끝이 어디인지 찾아봤지만,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실은 나도 잘 몰라. 누가 드나든 흔적도 거의 없었고 말야.”
“거의’라면…?”
“그래. 적어도 수십년 사이에,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나 혼자만은 아니야. 그건 확실해. 아주 잦은 방문도 아니었겠지만.”
그제서야 아렌도 기억이 났다.
아렌이 낙일관을 세우고 매일 사람들을 받으며 테오드릭을 포섭하던 시기, 핀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의 아렌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때 아렌에게 필요했던 것은 황궁 안의 숨겨진 통로나 방의 위치였다. 그 아래 거대한 유적이 묻혀있다고 한들, 당장 아렌에게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 뒤로 교국으로의 유학, 황제의 시험이 이어져 아예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핀은 핀대로 자신의 업무가 황궁의 이면을 모두 밝히는 것이라 기계적으로 유적을 탐사했을 뿐, 본업이 도굴꾼이 아닌 다음에야 유적을 샅샅이 파악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옛 아티스 출신으로서 테오드릭에게 파견되었을 때, 핀으로선 오랜만에 할 일이 생겼다고 도리어 기뻐했을 정도.
‘제국의 황도는 제국 이전부터 대륙의 주요 거점이었지. 수많은 나라들이 이곳에 터를 세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으니.’
황궁의 터 아래, 유적 한둘 정도 묻혀있어도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레온나토스는 핀에게 물었다.
“그럼 핀, 자네는 황궁 지하의 유적에 라이안 황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저, 그런 확신은 없습니다. 그저 전, 황궁 지하에 그런 공간이 있음을 모르시는 것 같기에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았을 뿐입니다.”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 하지만 라이안 형님이 그 유적에 있을 가능성은 충분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핀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동안 규모조차 다 밝히지 못했을 만큼의 거대한 유적이라면 라이안 황자의 부하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죠. 핀조차도 황궁의 비밀시설을 모두 파악할 시점에서야 겨우 발견한 유적이니, 다른 곳에 알려졌을 리도 없고요.”
지금 이 자리에서 그곳이 맞다, 아니다를 따져봤자 의미는 없다.
아렌은 핀을 돌아봤다.
“핀. 그 유적이 어디인지 안내해줄 수 있어?”
“어어, 가능은 한데, 내가 갔던 경로로는 많은 병사들이 드나들지 못할 거야, 아렌 나리.”
“…왜지?”
“내가 유적을 찾은 경로는, 어디까지나 황궁 비밀통로에 접해있던 곳이니까. 길이 너무 좁고 구불구불해서, 이중 가장 마른 병사도 제대로 지나가긴 어려울걸?”
“그럼, 어떡하죠?”
“라이안 황자가 그 안으로 병사들을 보냈다면, 조금 더 지나가기 편한 길이 분명 있을 거야. 그걸 찾아야 해.”
결국은, 다시 유적 탐사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괜찮겠어? 유적 아래엔 라이안 황자의 부하들이 잔뜩 있을 거야. 잘못 맞닥뜨렸다간 도움조차 못 받고 목숨을 잃을 텐데.”
“흥, 그건 지금까지는 안 그랬나? 좁은 통로를 기어가다 몸이라도 끼면, 아무 도움도 못 받는 건 예전이랑 똑같다고. 라이안 황자의 병사를 만나면 적어도 펀하게는 가겠네.”
핀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황궁 복도를 지났다.
핀이 황궁에 오고 거의 5년간, 쉴 새 없이 했던 탐방이었다.
핀은 황궁 복도 중간의 융단을 들어 올려, 아래에 깔린 판석을 열었다.
그 아래에는 깡마른 사람 하나가 비집고 내려갈 만한 좁다란 틈새가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에서 핀이 할 일은 첫째, 그 안에 라이안이 있는지 확인할 것. 둘째, 병사들이 도착하기 쉬운 길을 찾을 것. 이 두 가지였다.
“핀, 부탁해.”
“맡겨달라고, 아렌 나리.”
아렌은 핀을 사지로 내모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핀은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틈새 사이로, 핀의 몸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우선 이곳 복도는 봉쇄하죠. 다행히 여기를 막아도 통행에는 별 지장 없으니 다행이군요.”
“그래. 이제 와서는, 핀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믿는 수밖에 없어.”
핀은 한번 탐사에 들어가면 며칠씩 연락이 끊기곤 했다.
핀이 언제 유적 탐사를 끝마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렌과 레온나토스가 복도를 봉쇄할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철수하려던 찰나였다.
-덜컥.
“…핀?”
방금 막 틈새 아래로 내려갔던 핀이, 융단 아래의 판석을 디밀고 밖으로 나왔다.
예상 밖의 상황에, 아렌과 레온나토스가 당황하려는 찰나.
“이 안이 맞습니다, 레온나토스 전하.”
“…이 안에 형님이 있다고? 확실한가? 어떻게 알았지?”
“이 안에, 연기가 있습니다.”
“연기?”
극히 일부 아래로 깔리는 연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연기는 위로 올라간다.
매몰된 유적이 얼마나 방대한 공간인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서 횃불이든 화로든 사양 않고 맘껏 피워댄 모양이었다.
그 연기는 유적의 천장 틈새를 넘어 제국의 지하에까지 스며들었고, 마침 그곳에 들어간 핀이 냄새를 맡았다.
핀으로선 매캐한 연기가 짙어지는 곳으로만 따라가면, 유적 가까이로 도달할 수 있다는 계산.
“어쨌건 전하. 연기를 따라가려면, 입을 막을 만한 뭔가가 필요합니다, 사이가 촘촘한 천과 솜, 숯가루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지요.”
“그래, 금방 준비하마.”
안개를 많이 들이마시면 이성을 잃은 망자가 되어버리는 곳의 주민이었던 핀이기에, 입으로 오는 공기를 정화하는 방법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레온나토스의 병사가 준비물, 특히 숯가루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 사이 아렌은 생각했다.
‘…그 안에서, 불을 피워?’
지하에서 연기를 피우면,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황제를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였을 때부터 라이안이 폭주한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이번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설령 라이안의 독단으로 내린 결정이라 해도,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나?’
라이안의 실수인지, 혹은 교묘하게 마련된 함정인지.
‘만약 함정이라면,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이겠지. 어차피 그럴 셈이었으니 우린 그저 어울려주면 돼. 실수라면, 덕분에 입구를 쉽게 찾겠지. 하지만 둘 다 아니라면?’
이것이 함정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라면, 라이안은 횃불의 연기 따위로 유적의 입구를 추적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는 뜻이다.
“…….”
연기는 물 만큼이나 날카로워서, 어떤 빈틈에도 침투할 수 있다.
병사가 천과 솜, 숯가루를 가져올때까지 아렌은 생각을 정리했다.
잠시 뒤.
핀은 아티스 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입을 가린 뒤 말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핀.”
“…아렌 나리?”
“지하 유적이, 수로 아래에 있었다고 했지?”
“그랬는데, 왜?”
“군데군데 물에 잠긴 곳이 있다면, 그 안쪽을 살펴봐 줄 수 있어?”
“…나더러, 잠수까지 하라고?”
“다행히도, 잠수가 특기였지?”
“…그야, 조금 자신은 있지만.”
핀은 만월강 동부 늪지대를 마른땅처럼 누비며, 국경 감시대 눈을 피해 만월강을 넘던 자였다.
수영과 잠수는 핀의 특기 중 특기였다.
핀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아렌의 말을 잘 따랐다.
핀이 다시 아래로 내려간 후.
“…아렌?”
“어쩌면, 라이안 황자가 지나간 유적의 통로는 물을 통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어째서지?”
“그들은 지하에서 태연하게 불을 피웠습니다. 연기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죠. 아마도, 그들이 지나간 통로로는 연기가 나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겁니다. 연기는 어떤 틈새로든 스며들 만큼 날카롭지만, 물의 틈새를 통과할 수는 없으니까요”
“…과연.”
“물론 가능성일 뿐입니다. 라이안 황자가 통로를 알려줄 목적으로 불을 피웠을 수도, 아무 생각 없었을 수도 있죠. 제 조언이 틀렸다면 핀으로선 괜히 헛수고만 더 하는 셈이고요.”
“그 말대로군. 그런데, 마치 남의 일 얘기하듯 하는군, 아렌?”
“실제로 고생하는 건 핀이잖아요?”
“…….”
레온나토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핀은 한참 올라오지 않았다. 레온나토스는 이곳 복도의 앞뒤를 지키라 명한 뒤, 자리를 비웠다.
다음날, 오후.
핀이 다시 복도의 판석을 밀고 올라왔다.
“아렌 나리의 말이 맞았어!”
“…통로가 물 뒤에 있었나?”
통로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지하수로의 물줄기 뒤쪽에 있었다.
얕게 흐르는 물줄기를 밟고 지나갔기에 흔적도 남지 않았고, 쉬지 않고 떨어지는 폭포가 벽처럼 연기를 빈틈없이 막았다고.
그 물줄기를 뚫고 들어가자 아래로 이어진 마른 복도가 나타났고, 그곳에는 최근에 수백 명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그걸 발견하자마자 핀은 곧바로 지상으로 올라왔다.
레온나토스가 핀을 치하했다.
“정말 수고 많았다, 핀. 나와 병사들이 그곳까지 다다를 수 있는 길이 있나?”
“네. 황궁보다, 황도에서 들어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지하 수도는 황도 전역의 지하에 있으니까요.”
“…좋아.”
레온나토스는 실행일을 내일로 잡기로 하고, 가웨인과 테오드릭에게도 연락했다.
지하 유적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도리어 소수가 다수를 잡아먹을 절호의 함정일수도 있었다.
늦은 밤. 아렌은 내일의 준비로 분주한 레온나토스의 방에 찾아갔다.
“뭔가, 아렌.”
“전하께서도 아래로 내려가십니까?”
“그야 당연하지. 가웨인 형님도, 테오드릭 형님도 모두 함께 가신다. 내가 물러설 수는 없지.”
“두 황자분들은 모두 무예에 일가견 있는 분들입니다. 신체적으로도 이미 장성하셨고요. 하지만 전하께선 아닙니다.”
“…지금 남말할 처지인가? 아렌 자네야말로 내일 동행할 이유가 전혀 없어.”
“…….”
실은 누구보다도 이유가 있다.
아렌의 언령이 잘못 적용되었다면 현재 라이안은 누구의 손에도 죽지 않는 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단, 같은 운명석 계약자인 아렌에게는 예외다.
최악의 경우, 궁지에 몬 라이안을 마지막에 처치하는 건 아렌의 몫이 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죠. 제가 가면 전하도 갑니다. 절 보내지 않으려면 전하께서도 가지 마시죠.”
“…아렌.”
“저와 같이 내려가면 손해볼 일은 없을 걸요? 이래뵈도 제가 행운의 부적 비스름하잖아요?”
“…….”
레온나토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옛 아티스 영토에서의 소동, 북방에서의 고생. 그리고 레온나토스가 동행하진 않았지만 교국과 도국연합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레온나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슬며시 눈을 뜨고 말했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적잖이 고생하겠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