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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10화 (210/227)

#210화

“…이봐, 아렌.”

“왜죠, 더글라스?”

“이 거리 분위기가 원래 이랬나?”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전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지냈는데. 더글라스가 더 잘 알겠죠.”

아렌은 매정하게 답했지만, 더글라스가 한 물음이 단지 답을 듣기 위함이 아님은 알았다.

‘…확실히.’

아렌은 레온나토스와 병력들이 들어선 거리 양옆을 돌아봤다.

제국의 황도에 들어섰지만, 일찍이 알고 있던 거리의 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상가는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고, 행인들도 오가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무언가의 눈치를 보듯 잔뜩 얼어있는 분위기였으니까.

‘하긴 무리도 아니지.’

바로 얼마 전 황도 곳곳에 뒤숭숭한 내용의 벽보가 나붙었다.

제국의 가장 유력한 황자가, 돌연 사실상의 반란을 선언했기에 사람들은 그 불똥이 자신에게 번지지 않도록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달라진 거리의 분위기는 평민 출신인 더글라스가 아니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황권 경쟁으로 인해 제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레온나토스는 책임감을 느꼈다.

“…아렌. 라이안 형님이 정말 마음대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이 상황조차도 단순한 유흥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건가?”

“음, 글쎄요. 지금은 아니지 않을까요?”

“유흥이 아니라고?”

“전과 달리, 지금 라이안 황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으니까요. 전에는 언제든, 몇 번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현재 상황은 그로선 완전히 처음 겪는 일이겠죠.”

“…그럼, 형님의 이해 못할 행동은 일종의 공황상태에서 왔다는 건가?”

“공황이라기에는, 라이안 황자는 처음 겪는 지금 상황을 만끽하고 있을 겁니다. 저 역시 라이안 황자를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쨌건 즐기고 있을 거라는 말이군. 내 귀에는 여전히 유흥으로만 들리는데.”

레온나토스의 말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도전이기에 성공이 더욱 짜릿한 순간도 분명 있으므로.

하지만 여기서 백 번을 추측해봤자, 당사자에게 한번 직접 묻는 것보다 확실할 수는 없다.

“…자세한 건, 라이안 황자를 붙잡아 직접 물어보시죠.”

예전같지 않은 활기의 거리를 지나, 레온나토스와 아렌은 황궁의 정문을 지났다.

*****

“…….”

“…….”

황궁 안에 들어왔지만,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건 바깥 거리보다도 훨씬 시들해져있는 황궁 안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황궁 안 복도는 전과 마찬가지로 금색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지만, 무채색보다 더 삭막하게 느껴졌다.

궁인들은 걸을 때도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았고, 시선은 땅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황제가 시해 음모로 중상을 입은 것이 고작 몇 달 전이고, 최근엔 가장 유력한 황자라는 자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선언했다.

궁인들이 흔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그중에는 마음속으로 라이안 황자를 지지했던 자들도 있을 것이기에 황궁 안 분위기는 더욱 침체되어 있었다.

“…들어가자.”

레온나토스는 아렌만 대동한 후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원으로 향했다.

황제가 요양 중인 병상은 몇 겹이나 되는 호위로 철통같이 보호되고 있었다.

호위들은 라이안이 붙인 대자보로 인해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지만, 정작 병상위의 황제는 담담하게 레온나토스를 맞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레온나토스. 황도에 붙어있던 기이한 벽보의 소식은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이미 가웨인과 테오드릭도 황궁에 와 있다.”

“…….”

황제는 지팡이에 의지해 힘없이 병상 옆에 섰다.

제대로 회복조차 되지 않은 몸임에도 황제는 여전히 자신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짐이 내놓은 마지막 과제를, 가웨인은 거의 포기한 것 같더군. 하긴, 그 녀석의 재주는 일개 제국 황실에서 품기엔 너무 크고 날카로웠지. 테오드릭 또한 여전히 실마리를 못 찾은 것 같고. 아니, 그것뿐이라면 좋겠지만.”

황제는, 마련된 의자에도 앉지 않고 여전히 선 채로 레온나토스를 응시했다.

“최근 테오드릭의 태도가 영 이상하더군. 단순히 능력이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사실상 아렌 네게 종속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저에게 속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실은, 네가 아니었던 건가?”

순간 황제의 눈이 힐긋 아렌에게로 향했다.

줄곧 숙이고 있던 라이안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고, 아렌 또한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황제는 말했다.

“물론, 좋은 황제 곁에는 좋은 가신이 따르기 마련이지. 가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또한 군왕의 덕목 중 하나이고. 하지만, 가신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신에게 휘둘리는 것이 과연 황제의 덕목일까?”

“…만약 질문이시라면, 제게 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황제에 대한 자질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건, 오직 현 황제이신 폐하이시기 때문입니다.”

레온나토스의 대답은 아부처럼도 보였지만, 황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거기에 일말의 자부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제국의 제1 황자였던 라이안은, 벽보에 자신을 가장 적합한 황태자감이라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지. 하지만 그 생각부터가 이미 그릇됐어. 황태자를 선택하는 건 오직 현 황제인 짐 뿐이다. 그 외 모든 것들은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밑가지일 뿐이야. 타고난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짐이 인정하지 않으면 아닌 것이지.”

광오하기까지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한 자가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제국의 황제이니 누가 과하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후계자를 철저히 독단으로 결정한다는 건, 위험부담이 클 텐데. 황제의 결정에 불복하는 황자가 나타나면 매번 피로 강을 만들 테니.’

제국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나라를 통치할 후계자를, 단지 서열 순으로 뽑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 경우 통치에 적합하지 않은 자가 지도자가 되는 부작용도 있지만, 후계자들 사이의 불만은 현저히 줄어든다.

개인의 판단에 기댄 것이 아니라, 정해진 법도에 따라 기계적으로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불복하더라도, 그 명분이 부족하다.

물론, 이 사실들을 전 황제들이 몰랐을 리 없다.

의문이 깃든 시선을 눈치챈 황제가 아렌에게 물었다.

“뭔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통은, 황제가 황자의 일개 가신에게 직접 묻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옛적부터 아렌의 내숭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기탄없이 하도록.”

이미 아렌의 많은 비밀은 거의 다 밝혀진 상태.

아렌은 사양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라이안 황자가 탐탁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그놈은 매사에 진지하지 않았다. 진지한 척만 했을 뿐. 잘 짜인 극본을 연기하는 것처럼 한 번도 자신의 속을 보인 적 없었다. 라이안이 황제가 되고, 속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을 때 어떻게 돌변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

황제가 생각보다도 더 라이안의 본질을 잘 간파했기에, 아렌은 조금 놀랐다.

‘하긴, 황제 만큼 다른 이의 속을 간파해야 하는 자리는 없지.’

라이안은 ‘모두에게 가장 완벽한 현재’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과거로 되돌아가며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라이안이 승승장구했던 것 또한 수십번의 회귀를 통해 라이안이 도중까지의 가장 적합한 경로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생긴 가식과 권태가 도리어 황제에게 불신을 줬다니, 알궂은 일이었다.

“물론 다른 황자가 마지막까지 라이안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대로 라이안에게 황위를 주는 수밖에 없었지. 이제와서는 공허한 말이지만.”

고드프리, 엔지에 이어 라이안까지.

번번히 자신의 자식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려야했지만, 그것 또한 제국의 황제가 가진 숙명이었다.

황제 브륀할트 8세는 제국과 황실의 주인으로서 레온나토스에게 명했다.

“먼저 들른 다른 황자에게는 이미 같은 말을 전달했다. 이전에 짐이 내린 시험은 모두 잊도록. 누구든, 라이안을 먼저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한 자를 차기 황태자로서 뽑겠다. 물론, 목표인 라이안의 생사는 불문에 부치겠다.”

“…전하!”

“레온나토스, 너로선 불만이 많겠구나. 내가 준 과제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었는데. 하지만, 교국에 있던 라이안을 붙잡았다 놓친 것 또한 네 부하들 아닌가? 현재 누구보다 라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 어때, 뭔가 아는 것이라도 있나?”

“…….”

황제의 말에, 레온나토스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답했다.

“아뇨, 없습니다.”

아직 모든 기력을 되찾지는 못한 황제는, 힘없이 웃었다.

“황자, 네 거짓말은 서툴구나. 하지만 짐에게 거짓말을 하는 그 기백은 높이 사마.”

“…….”

황제는 더 이상 깊이 캐묻지 않았다.

“이제 물러가도 좋다.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지.”

*****

내원 밖으로 나온 레온나토스와 아렌을 기다리고 있던 건 가웨인, 그리고 테오드릭이었다.

“…형님들.”

“꽤나 고생이 많은 듯하더군. 정보의 보고에 있으니 그야말로 온 사방에 네 소식뿐이었다.”

한동안 서부 도국연합에 가 있던 가웨인의 분위기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이전에는 몸 전체에 날카로운 칼처럼 예리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면, 지금은 그 주위를 칼집으로 덮은 듯 안정감마저 있었다.

예전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황제로서 어울렸다. 황제의 욕심을 버리고 나니 비로소 황제의 자질이 드러난다니. 얄궂은 일이었다.

‘…포기한 게 아니라, 더 나은 길을 찾았다, 그런 표정이군.’

“레온나토스.”

“네, 가웨인 형님.”

“황제의 자리는, 네게 넘겨주지. 내가 라이안 형을 찾아도 말이다.”

뜻밖의 말에 레온나토스는 큰 눈을 끔뻑거렸다.

“…테오드릭 형님도 있는데, 굳이 제게요?”

“방금, 농담한 거냐? 네가 있는데 굳이 테오드릭 같은 모질이를 황제로 세워?”

“형님 의견엔 저도 동감입니다만,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주시면 안됩니까?”

테오드릭이 툴툴거렸지만, 가웨인은 가볍게 무시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왜 황제가 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더군.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인재라고, 천재라고 띄워줬더니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그게 내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아니었는데.”

“…….”

가웨인의 한탄도 이해는 갔다.

황제가 라이안이 어릴 적부터 그의 본모습을 간파했다면, 일찍부터 그에 대항하는 다른 말을 키우고 싶은 건 너무나도 당연하니까.

처음엔 엔지, 그다음엔 가웨인, 그리고 지금은 레온나토스.

어쩌면 이들은 모두 라이안의 대항마로서 황제가 은연중에 밀어준 자들일지도 몰랐다.

예전이었다면 어떘을지 모른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도와주신다면, 그 호의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그래. 이 지긋지긋한 황권 경쟁도 슬슬 끝낼 때가 됐겠지. 이제 망할 형님만 잡으면 끝나는데, 문제는 이 형님이 어디 있느냐지.”

“…….”

“…….”

“…….”

세 황자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은연중에 그 시선이 가만히 있던 아렌에게로 향한 것도 같았지만, 아렌 역시 딱히 단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

그때. 누군가 침묵을 깨고 손을 들었다. 모든 황자의 눈이 그 쪽으로 향했다.

손의 주인은 원래는 레온나토스의 가신이었다가, 지금은 테오드릭에게 파견 나가 있던 옛 아티스 땅의 원주민, 핀이었다.

“…실은, 신경 쓰이는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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