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그러고 보니.’
아렌은 분명 라이안의 행동을 제약하는 언령을 걸었다. 원래라면, 운명석 계약자에게는 아렌의 언령이 통하지 않을 터였다.
너무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아렌은 별 의심하지 않고 라이안에게 언령을 걸었고, 그 뒤 곧바로 쓰러져버린 터라 그 모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르테에겐 아렌과 달리 한 달의 시간이 오롯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르테가 알고 있다면, 라이안 또한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어쩌면 이 현상은, 라이안과 아렌이 함께 회귀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비록 지금 당장 밝혀질 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 사실은 유랑족 노파가 해준 말과 마찬가지로 아렌의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았다.
“아렌, 너조차도 짐작 가는 부분이 없는 거야?”
“…그래. 하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이제 곧 황도로 향할 거고, 그곳 어딘가에 라이안 황자가 있을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너희들의 안부를 빌어주는 것 뿐이야.”
“그것만 해도 고맙지만, 사실 하나 더 있잖아?”
“…?”
잠시 눈을 끔뻑끔뻑 뜬 아르테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 아트마와 평화의 진리성전은, 셰오덴 제국의 제12 황자인 레온나토스를 정식으로 지지하기를 선언하겠어.”
“기다리던 선물이야.”
물론, 이제 판은 어느 황자가 황태자가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라이안 황자의 무한회귀를 막을 수 있느냐로 바뀌었지만.
‘…그렇지.’
아렌은 아르테에게 질문했다.
“혹시, 지금 귀 뚫려있어?”
“귀? 아니? 뭐야, 혹시 귀걸이라도 선물해주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아르테를 노려보는 아렌.
“…아니면 아니라고 그냥 말을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됐고. 혹시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귀를 뚫어줄 수 있어? 내 언령을 뚫고서.”
“-아하, 그런 의미였어? 그런 거라면야, 기꺼이.”
비로소 아르테는 아렌의 의도를 알았다.
순순히 허락하는 아르테.
아르테의 동의를 얻은 아렌은, 품속에서 점괘를 볼 때 쓰는 카드뭉치를 꺼냈다.
이 카드 뭉치가 언령에 얼마나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렌이 점괘 형식으로 한 말’의 구색을 맞추기위해서 계속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아렌은 카드를 뒤섞은 다음 위에서 차례대로 카드를 뽑았다. 물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뽑은 카드의 종류와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트마 교국의 대주교 아르테는, 앞으로 귀를 관통시키는 장신구를 달 수 없다.”
아렌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테는 자신의 머리를 고정하는 장식핀을 뽑아, 그 끝을 귓불에 가져다 댔다.
“뭐야, 곧바로 하게?”
“이런 건 빠를수록 좋잖아?”
아르테는 망설이지 않았다.
-푹.
머리핀은, 귓불을 깊이 찔러 관통했다.
“…통하지 않네?”
그녀의 말과 동시에, 그녀의 귓불에서 흐른 피 한 방울이 순백의 대주교 복 위에 툭, 흘러 떨어졌다.
*****
제국 황자의 비서관 아렌이, 교국 대주교에게 피를 흘리게 했다는 소문이 잠시 비원궁 안을 돌았지만, 그저 짧은 소동으로 그쳤다.
며칠 뒤 레온나토스와 아렌, 그 휘하의 병사들은 비원궁을 나섰다.
비록 라이안을 축출하기 위해 온 자들이라 해도, 계속 교국에 머물러있으면 그들에게는 라이안과 마찬가지일 뿐.
레온나토스가 비원궁을 떠난다는 소식에, 교국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로써 교국은 제국의 불필요한 간섭없이 오롯한 주권을 가지게 되었고, 레온나토스에 대한 교국인의 평가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앞으로 두고 볼 일이지만.’
혼자 마차에 탄 아렌은 창문 밖으로 꽃가루를 뿌리는 교국인들을 흘깃 보고는 차양을 내렸다.
비록 라이안 황자와 로이터 주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실권을 잡진 않았지만, 그들의 통치가 어떠했는지 지금의 교국인들은 알지 못한다.
통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도 전에 아렌이 개입해 실각시켰기 때문에.
반면, 정식으로 대주교 자리에 오른 아르테가 연신 실정을 반복한다면, 그녀에 대한 반감은 자연히 아르테를 지원한 레온나토스에게로 옮겨갈 터.
물론, 그건 지금이 아닌 먼 훗날에나 다시 고려할만한 일이다.
“…후우.”
언령의 후유증에서 이제 막 몸을 회복한 아렌이기에, 레온나토스는 아렌만을 위한 단독 마차를 준비했다.
정작 주군인 레온나토스는 말에 탄 채 마차 옆에 서고, 가신인 자신은 마차에 편히 가는 상황은 심이 어색했지만, 레온나토스는 그다지 개의 않았다.
‘마차에 탈 수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 말이든 마차든, 필요한 사람이 필요에 의해 타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우열이 나뉜단 말인가. 말에 탄 사람이 마차에 탄 사람보다 열등한가? 말에 탄 자는 걷는 자보다 우월하고? 그럼 소달구지는 어떤가? 배는 또 어떻고?’
레온나토스는 강한 어조로 말했고,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아렌은 마차의 차양을 한껏 내렸다. 혹시나,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일까 해서.
그때.
누군가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아렌, 괜찮은가?”
“…괜찮지 않습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군요. 전하께서도 들어오셔야 비로소 마음도 편해질 것 같군요. 여기 자리가 많습니다.”
“아니. 내가 어려서부터 너무 책만 읽어서인지,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약해. 승마 또한 이제야 겨우 익숙해진 참이지. 이대로 말에 타고 황도로 올라가는 것부터 내게는 하나의 수행이 될 거야.”
“…역시, 군주의 귀감이시군요.”
레온나토스의 자세는 본받을만하다.
비록 레온나토스의 원치 않는 오지랖이었지만, 덕분에 아렌은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역시, 아르테에겐 언령이 통하지 않았어.’
아르테는 귀를 뚫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렌에게도 언령이 통했을 때 발생하는 특유의 반동이 전혀 없었다.
원래라면 운명석 계약자에게 언령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라이안에게는 달랐어.’
라이안이 자기암시 등으로 착각했거나, 자신을 속이려 든 것이 아니라면, 라이안에게는 아르테와 다른 무언가가 작용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빨리 황도에 갔으면 좋겠군.’
결국 답을 얻기 위해서는, 라이안이 숨어있을 황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렌은 품 안의 카드 뭉치를 움켜쥐었다.
*****
한점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칠흑같은 공간.
중간중간에 높이 솟아오른 기둥이 곳곳에 우뚝 서 있었다.
제국의 황제가 모든 신료들을 모으는 대회견장의 커다란 기둥들과 흡사했지만, 자연스레 밖의 빛이 들어오는 대회견장과 달리 이곳에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형태만 비슷할 뿐, 사실상 정반대의 공간.
그곳에 제국의 첫 번째 황자 라이안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라이안 곁의 참모가 부싯돌로 화로에 불을 붙였다.
그 불은 앞의 병사가 횃불에 이어붙이고, 다시 뒤의 횃불에 옮겨붙었다.
마치 물의 파문이 퍼져나가듯, 횃불은 라이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밝혀졌다.
장관이었지만, 그 광경을 보는 라이안의 눈은 무심할 뿐이었다.
“…병사들은?”
“교국까지 동행했던 자들 중에선, 흑사자 기사단만이 황도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 자들은 아직 황도로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하나 신경쓸 것 없다. 어차피 그들은 내 주축은 아니니.”
“…….”
일평생 라이안을 섬겨왔던 참모는, 처음으로 그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라이안은 같은 삶을 70번 넘게 되돌렸고, 대부분의 경우 참모는 라이안에게 죽임을 당했다. 모두 평소와 다른 라이안의 행동을 지적한 다음이었다.
‘전하께선, 어떻게 이 곳을 알게 되신 거지? 아니 그보다-’
마치,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으로 오겠다고 미리 정해둔 것처럼, 여기까지 오는 길은 완벽히 은닉되어 있었고 장소 안쪽은 정리되어 있었다.
화로와 횃불에서 계속 그을음이 나오고 있었지만, 워낙 높고 거대한 공간이라 내부는 마치 야외인 것처럼 쾌적했다.
갑작스레 달라진 라이안의 행실과, 숨겨져있던 거대한 공간에 참모는 압도되었다.
그런 참모를 향해, 라이안은 문득 말했다.
“혹시, 나를 죽이고 싶은 생각은 안 드나?”
“…전하?”
“왜 그러지? 지금쯤이면 평소와 달리 행동하는 내게 한마디 쏘아 보낼 순간 아닌가?”
“제가 감히, 어찌 그러겠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래? 날 죽이고 싶지 않다라. 그럼, 여전히 내게 충성하나?”
“물론입니다!”
“그럼, 충직한 신하에게 명한다. 날 죽여보도록.”
“…….”
“어허, 명령이라니까.”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참모는 라이안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다.
상황이 주는 압력에서 해소되기 위해, 참모는 주위를 둘러봤다.
라이안과 참모를 둘러싼 수백 명의 병사와 수십 개의 횃불은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단심병.’
라이안 황자가 고아들을 데려다 오렌 세월 들여 세뇌시킨, 마음 없는 병사들.
비록 자신에게 조언해줄 참모나, 자율적으로 강함을 추구해야만 오를 수 있는 고수들인 흑사자 기사단을 세뇌된 자들로 채울 순 없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이라면 그저 명령에 따르며 사기나 양심에 좌우되지 않는 강한 집단이 된다.
그들은, 황자가 심복에게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전하,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부디 명령을 거둬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짐의 명령을 못 듣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음, 이래서야, 무엇때문인지 알 길이 없군.”
“…?”
어리둥절해하는 참모를 내버려두고, 라이안은 말했다.
“병사. 여기 있는 참모를 죽여라.”
그 순간, 횃불을 들지 않은 병사들의 칼이 참모의 몸에 빽빽이 꽂혔다.
참모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진 채, 그대로 다시 감기지 않았다.
참모가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지만, 라이안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잘 했다. 그럼, 이제 짐을 죽여라.”
곧바로 라이안을 향해 칼이 날아왔다. 누구의 것이라고 분간하기도 힘들 만큼 수십개의 칼날이 빽빽하게 라이안을 겨눴지만, 어느 것 하나 황자의 몸에 닿은 것이 없었다.
“…뭐지?”
“찌를 수 없습니다.”
병사 하나가, 단심병의 군집을 대표해 말했다.
“왜지? 짐의 명령인데도 말이냐?”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제 의지가 아닙니다.”
“흠, 그렇군.”
단심병에게 자의(自意) 따위는 없다.
라이안의 명령에도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건, 라이안을 노리는 타인에게도 아렌의 언령술이 적용된다는 뜻이었다.
“날 죽이라는 명령은 취소다. 그 검으로, 내 몸을 찌를 수 있나? 어떤 부위든 좋다.”
다시금 수십개의 검이 움찔했지만, 움직임은 그 뿐이었다.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명령도 취소다.”
유의미한 실험이었다.
라이안에게 살의가 있고, 자의로 움직이는 암살자라면 라이안을 죽일 수 있을까.
가능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라이안은 힘들 거라 예상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지만, 그렇게 싱겁게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지.’
자신의 회귀에 아렌이 휘말렸다.
그리고 원래라면 적용되지 않았어야 할 아렌의 언령이 자신에게 적용되었다.
“…재미있군.”
라이안은 소리 내어 말했다.
주변의 단심병은 어느 누구도 라이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던, 유일하게 라이안에 대답하던 자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지금껏, 라이안에게는 위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무언가가 잘못되면,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니까.
라이안에게 삶이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묵묵한 반복 작업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겪는 상황일 뿐 아니라 처음 겪는 위기였다.
“어서 와라, 아렌.”
황도 한복판에서, 라이안은 다가오는 자신의 위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