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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08화 (208/227)

#208화

“…성명문이라고?”

더글라스가 가져온 뜻밖의 소식에, 레온나토스의 목소리에는 조금 열기가 서려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자가 성명문을 냈다니,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렌이 깨어나자마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묘한 우연이군.’

“그럼 형님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가? 언제, 어디서?”

그간 라이안의 행방은 제국땅 사방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동부는 낙후되어있고 인적이 뜸하지만 현재 테오드릭이 있고, 서부의 도국연합과도 긴밀히 연결되어있지만 지금 그곳엔 가웨인이 있다.

북부에는 지금 비어있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현재 북부는 레온나토스의 기반이라 봐도 무방하다.

제국 중앙부는 황도와 가장 가까운 만큼, 제국의 수색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제국의 땅덩어리는 넓지만, 라이안이 숨을 곳은 요원해보였다.

“라이안 황자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단지, 인장이 찍힌 벽보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벽보는 어디 붙어있었지?”

“…그건, 모두 열 장 붙어있었습니다. 붙은 곳은 모두, 황도 안쪽이었습니다.”

“황도? 제국의 한가운데에서, 라이안을 찾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볼 수밖에는-”

레온나토스는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난 아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렌. 자네에게 짐작 가는 건 없나?”

그제서야, 더글라스는 아렌이 깨어났음을 알아차렸다.

“어, 아렌. 정신이 들었구나.”

“네, 걱정 끼쳤군요, 더글라스. 전 괜찮아요. 하지만 제가 깨어나니, 곧바로 다른 문제가 생기는군요.”

황실이 아무리 수색해도 찾을 수 없었던 라이안 황자의 흔적이, 황도에서 발견된 것.

그건 황도에 라이안을 비호해줄만한 거대한 세력이 있거나, 혹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한 은밀한 장소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였다.

‘라이안은 둘 다 가능하니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황자 혼자만 숨는다면 또 몰라도, 그를 따르는 최측근들까지 모두 모습을 감춰야하니 그게 세력이 되었든 장소가 되었든,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레온나토스가 재차 물었다.

“아렌, 자네는 정말 짐작 가는 곳이 없나?”

원래라면 지금 시점에 아렌과 레온나토스 사이 정보량의 차이는 없다.

지금 레온나토스의 물음은, 아렌이 몇 번의 회귀를 거쳤다는 것을 전제로 한 물음이었다.

“…아쉽지만,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전혀?”

“네. 제가 알고 있는 세 번의 삶 중에서는, 라이안 황자가 몸을 숨길만 한 시설 따위를 알지 못합니다.”

비록 두 번째 삶은 지금 삶과 거의 유사했지만, 첫 번째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황궁에 종사했다. 그때도 라이안은 그저 가장 유력한 황자로서, 당연하다는 듯 황궁 안에 군림했을 뿐.

그가 가진 비밀 시설이나 단체따위는 알지 못한다.

‘…황궁 안이라면 온갖 비밀 시설이 있겠지만, 설마하니 황궁 바로 안쪽 일을 모를까.’

황궁 안에 비밀은 없다고 자타가 말할 만큼, 숨겨진 비밀시설은 많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렌이 옛 아트마 영토에서 데려온 핀이 몇 년 기어 다닌 것만으로 대부분의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정도였다.

아렌보다는 훨씬 자세하게 알고 있을 황제의 눈을 속이는 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라이안은 무려 일흔 번의 삶을 황궁에서 살았지. 내가 아는 건 최근의 세 번 뿐이고.’

그 전에 라이안이 알아낸 비밀이 있고, 그걸 지금껏 의식적으로 숨겨왔다면 아렌이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어떤 통로로든 라이안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역시, 곧바로 의안이라도 제거했어야 했나?’

라이안은 지금 스스로 자결할 수 없다. 그러니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죽음을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도 자신에게 무해한 행동이어야 했다.

어쩌면, 상황은 아렌의 생각보다도 훨씬 복잡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라이안은 지금 살해당하기조차 힘들지도 몰라.’

정황상 라이안은 소용돌이치는 바다에 조각배를 띄워 탈출했다.

어느 누가 그 행위를 자살행위가 아니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라이안은 배를 띄웠다는 건, 그 행동이 실제로 그의 목숨에 영향이 없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지금 벽보를 통해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그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었다.

어떤 방에 있는 물레에 찔려 죽을 운명이라 그 방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 방에 암살자가 숨어있어도 마찬가지로 들어갈 수는 없을 터.

‘…최악의 경우, 자연사를 제외하면 라이안은 죽을 수 없을지도.’

그건 아렌에게도 그렇지만, 라이안에게도 최악의 결과다. 그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되돌아가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을 테니까.

“그럼 교국 상황은, 일단락된 겁니까?”

“그래. 아르테 주교가 빠른 속도로 교국 안의 실권을 잡았지. 아직 조금은 혼란스러운 것 같지만, 그것도 점점 안정될 거야.”

“그럼, 저희 역시 황도로 가도록 하죠. 북이니 남이니, 참 오래도 떠돌았으니까요.”

“황궁이라. 실상 떠나온 시간은 얼마 된 것 같지 않은데. 정말 까마득하게 느껴지는군. 좋아. 형님이 그곳에 있다면, 마땅히 가야겠지. 더글라스 경, 성명문은?”

“네. 여기 정리된 것이 있습니다.”

레온나토스는 수기로 작성된 문서를 받아들었다.

아렌은 자연스레 레온나토스의 뒤에 서서, 서신의 내용을 읽었다. 더글라스도, 레온나토스조차도 아렌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서신을 읽으며 아렌은 생각했다.

‘어쩌면, 라이안을 죽여야 하는 건 나일지도 몰라.’

아렌은 알고 있었다. 운명석으로 얻은 능력은, 대부분 다른 운명석 능력자에게 통하지 않음을.

아르테가 라이안과 아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도, 옛 아티스 궁전에서 아렌이 망자가 되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비록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라 불렸던 제이드의 능력은 개인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적용되는 것이었으니 달랐지만.

어쩌면 지금, 라이안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렌과 몇몇 운명석 계약자 뿐일지도 몰랐다.

*****

[짐, 제국의 첫 번째 황자 라이안 브륀할트는 여전히 황도 안에 있다.

황궁 안 선하지 않은 자들의 음모가 꿈틀대는, 복마전으로도 불리는 곳이지만 짐은 한 발자국도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차기 황제를 가려내기 위한 시험들조차도 짐을 배제하기 위한 일련의 음모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시험으로 황태자를 뽑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세상 어느 누가 황제의 자질을 가려낼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합격점을 받는다는 말인가.

실상은 처음부터 가장 유력했고, 또 합당한 황자인 짐을 밀어내기 위한 요식행위였을 뿐이다. 짐이 아니라면, 다른 누가 되어도 상관 없었다는 것이다.

속이 뻔한 음모에도 짐은 시험을 받아들여 남부의 아트마 교국으로 향해, 괄목할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열두 번째 황자 레온나토스 브륀할트의 노골적인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국의 국익조차 그르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는 짐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라는 달콤한 과실에 꼬이는 해충들을 모두 박멸하고, 그 다디단 과육을 모든 인민들과 함께 누리기 위해, 제국의 정당하며 적합한 통치자 라이안 브륀할트는 대륙의 중심인 황도에서 고한다.

짐, 라이안 브륀할트는 이곳에서 선언한다. 짐이 세오덴 제국의 제 9대 황제가 되었음을.

시대가 곧 짐을 따라오리라.]

*****

“…미친 건가?”

레온나토스의 어깨 너머에서 글을 읽은 아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감히 황족에게 미쳤다는 말을 했지만, 레온나토스조차 아렌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순서가 이상하군.”

황궁 안의 모든 것을 장악한 뒤, 현 황제를 몰아내고 한 선언이라면 저 광오한 선언조차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중상을 입었으나 현 황제는 여전히 황제고, 또 점점 기력을 회복하는 단계였다.

지금 순간 라이안이 벽보를 통해 얻을 이득이 무엇인지, 아렌은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해득실과 상관없는 일이었을지도.’

자신이 세워둔 계획이 틀어지고, 죽을 수 없기에 삶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라이안이었다.

어차피 성과를 낼 수 없다면, 아예 즐기고자 마음먹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렌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아르테를 찾아갔다.

실상은 한 달만의 만남이지만, 아렌의 감각으로는 바로 전에 만나는 아르테는 그 사이 복식부터 달라져 있었다.

백색의 옷감에 금색 실로 수놓아진 사제복을 입은 아르테는, 비원궁의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대주교가 된 거야? 아니, 되신 겁니까?”

“말조심해, 아렌. 여긴 내 호위말고 없지만, 다른 이가 있었다면 벌써 불경죄로 큰 곤욕을 치렀을걸?”

“…네. 주의하죠.”

아렌이 불퉁하게 말하자 아르테는 지금 상황이 그저 재밌다는 듯 후훗, 하고 웃었다.

그리고, 성좌에 앉은 채 허리를 곧게 펴고 공식적인 말을 내뱉었다.

“아렌, 그리고 레온나토스 황자전하. 두 분의 우의 덕분에 교국은 정의롭고 공평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말은 잘하는군.’

라이안과 로이터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주교 자리를 찬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 세력인 아르테가 완전한 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기계적인 양비론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세상의 진실이다.

이번에는 아르테와 아렌이 서로 손 잡았기에 거들었을 뿐, 그 손을 놓는 순간 아르테와 아렌은 한 치도 안심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그 사실은 레온나토스도 이해하고 있을 터.

그는 새로이 대주교 자리에 오른 아르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교국에 사라진 정의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왔다면, 제국의 사람으로서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아르테는 교국의 새 지도자다. 비원궁 안에 있던 친 로이터 파를 숙청 중이라고 하니, 성공한다면 그녀의 치세는 상당히 오래갈 것이다.

얼마간의 겉치레가 오간 후.

아르테는 레온나토스를 물리고 아렌만 남겼다.

상당히 눈에 띄는 행위였기에 아렌에게 기꺼운 상황은 아니었다.

“…왜 저만 남기신 겁니까? 대주교 아르테 성하?”

“아, 그렇게 부를 거야? 아까 말은 농담이었는데, 맘 편히 불러.”

“그럼 어서, 용건이나 말하지? 여기 오래 있을 수록 괜한 말이 나올 테니까.”

아르테는 각 벽에 도열해있는 무승들에게 손짓했다.

무승들은 조금 망설이면서도, 방에서 아렌과 가장 떨어진 벽으로 이동했다.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결코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게끔.

“…뭐야, 무슨 일인데.”

아르테는 높은 곳에 세워진 성좌에서 친히 내려와 아렌의 옆에 섰다.

그리고, 아렌에게 소곤거렸다.

“…운명석 계약자의 능력은, 운명석 계약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알지? 내가 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처럼.”

“그야 알고 있지.”

아르테는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아렌 네 언령은 라이안에게 통할 수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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