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사라져?’
아렌은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금방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렌. 진정해. 아직 몸의 기력이 전부 돌아오지 않았어.”
아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침상에 몸을 뉘였다.
하지만 이대로 눈을 감고 쉴 수만도 없는 일.
아렌은 말했다.
“제가 누워있던 동안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주십시오.”
“물론이지. 그러기 위해 지금껏 기다렸던 것이니.”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다 말하고 난 뒤엔 아렌 자네가 말해주게.”
“….”
‘무엇을’이라고는 묻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는 아렌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그러하겠습니다.”
아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한 달 전. 대주교의 응접실.
라이안에게 언령을 뱉은 아렌은,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아렌 공!”
더글라스는 여전히 라이안과 대치했고, 상대적으로 뒤로 물러나 있던 발커스가 아렌을 부축했다.
그리고, 아렌이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한 라이안은 두 눈을 빛냈다.
“…과연.”
단검을 땅에 떨어뜨린 뒤, 두 손을 놓은 라이안.
“확실히, 더는 저항할 수 없겠군. 이게 내게 남은 유일한 수인 모양이야. 이대로 항복하면 목숨은 보장해주겠지?”
“물론입니다. 제대로 된 처우는 레온나토스 전하가 교국에 도착한 후 정해지겠지만, 전하께 문제 될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자, 잠깐만요!”
질문에 대답한 더글라스에게, 아르테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이대로 붙잡아만 둔다고요? 하지만 그래선-”
“뭔가. 이걸로 자네가 생각하던 원래 교국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그게 아니면, 다른 목적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건 아니지만, 당신의 왼쪽 눈이 의안이라고-”
“의안? 내 왼쪽 눈이? 웃기는군. 설령 그 말대로라 해도, 그래서 어쩔 건가. 감히 내 눈에 손이라도 대겠다는 건가?”
“….”
“….”
“….”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제국의 황자를 포로로 잡았지만, 그에 대한 처우는 현재로서 심히 애매했다.
완전한 적이었다면 오히려 처우가 쉬웠겠지만, 현재 그의 죄목은 교국 대주교와 관련된 음모의 배후 의혹뿐.
한없이 검정에 가까운 회색이지만, 어쨌든 현재로선 의혹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저항으로 사로잡은 황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아렌이었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아르테는 속으로 한탄했다.
라이안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아렌이 가장 잘 알았고, 그렇기에 무모한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하지만 지금 아렌은 쓰러졌고, 단시간 내에 의식을 찾을 일은 요원해 보였다.
남은 사람들의 담력 또한 보통은 넘었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를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만한 강심장들은 아니었다.
“…우선, 아렌이 깨어날 때까지는 비원궁 안에 구금토록 하겠습니다. 따라주시지요.”
“쇠사슬과 식은 국만 주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런데, 그 명령은 자네의 권한인가?”
“아뇨. 저와, 곧 교국에 도착할 레온나토스 황자의 권한으로요.”
“…두 명이라면 하는 수 없지.”
라이안은 몸에 힘을 쭉 뺀 채 더글라스의 제압에 몸을 맡겼다.
이곳에서의 시험을 그르친 것만으로, 라이안의 황권 경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라이안은 비원궁의 서쪽 탑에 구금되었고, 그 앞은 믿을만한 교국의 병사들이 지켰다.
만약을 대비해 밖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는 비원궁의 병사들과, 레온나토스의 위병들이 동시에 지키는 형태였다.
설령 라이안이 서쪽 탑을 빠져나오더라도, 비원궁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하지만.
레온나토스가 서신을 받고 교국에 도착한 후.
로이터 주교가 축출당하고 아르테가 새로운 실권을 휘어잡을 때까지,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아렌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라이안은 서쪽 탑에서 탈출한 후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유일한 출구인 정문을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는, 바다 위 비원궁 안에서.
*****
“…정문은 지나지 않았답니까?”
“그래, 그건 불가능하네. 서쪽 탑까지는 어떻게 승병을 구슬릴 수 있었겠지만, 정문은 아르테와 내 최측근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 중이었으니까.”
“거기에, 아르테도 독심술로 진심을 들여다봤을 테고요.”
“물론이야. 라이안 형님은, 이곳 비원궁 어딘가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알 것 같군요.”
하지만 아렌은 뜻밖의 대답을 곧바로 내놓았다.
“라이안 황자는, 배를 탄 거에요. 비원궁 아래, 기둥처럼 받치고 있는 암초를 타 내려가서.”
“…이곳에 그런 시설이 있나?”
아렌은 저번 삶에서 아르테에게 자초지종을 들었기에 그녀가 저번 삶에서 이곳을 어떻게 탈출했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아르테는 이번 삶에선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괜찮았겠지만, 아렌의 두 번쨰 삶과 지금은 미묘하게 달라졌기에 이번에도 무사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각배에 대한 건 라이안도 알고 있었겠지. 그는 심지어 그 자리에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형님도 대단하시군. 아래 바다의 와류가 대단하던데. 그게 어떤 배든 선뜻 몸을 실을 순 없겠던데 말야. 형님도 꽤나 절박하셨던 것 같군.”
“네. 물론 그것도 있겠죠. 하지만 아마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믿어? 무엇을?”
“제 능력을요.”
“….”
레온나토스는 설명을 요구하듯 아렌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렌은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전, 운명석 계약자입니다. 라이안 황자가 그러한 것처럼요.”
“….”
“그리고 제가 가진 능력은, 점괘의 형식으로 내뱉은 말이 실제로 이뤄지는 능력입니다. 오랜 문헌에서는 이를 언령으로 부르더군요.”
“…언령술?”
“네. 그리고 전, 한 달 전 라이안 황자에게 스스로 죽을 수 없다는 언령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그 후, 당장이라도 자결할 것 같았던 황자의 손이 멈췄죠.”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아렌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북부에서 눈의 사생아라는 자들과도 접촉한 뒤였다.
“…그래서?”
“만약 와류에 조각배를 띄우는 것이 자살행위였다면, 라이안 황자는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라이안 황자가 정말 배를 띄웠다면, 그건 그 행동이 자살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흐음….”
레온나토스는 아렌이 가진 것보다도 정보가 훨씬 부족했지만, 논리의 비약을 지적할 수는 있었다.
“…글쎄. 그건 이상하지 않나? 가령 자결이라는 것도 심장을 찌를 순 없겠지만, 바늘 끝으로 내 몸에 생채기를 내는 건? 그건 허용되나? 바늘 끝의 쇠독으로 결국 시름시름 앓다 죽을 수도 있는데도?”
더 가혹한 예시도 있었다. 사람은 걷다가도 잘못 넘어지면 죽는다.
‘자결을 할 수 없다’는 언령이 그 행위의 의지에 따른 기준이라면, 여전히 라이안은 와류 위에 조각배를 띄울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버티지 못하고 죽겠지만.
하지만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니겠지.’
아렌은 라이안이 이미 수십 번이나 같은 삶을 되풀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조금만 다른 변인을 줘도 그 결과 값이 선명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원궁 안으로 들어올 때, 아렌은 바다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각배 하나를 믿고 띄우기에 비탄의 바다는 너무도 거칠었다.
그 배 위에 올라타는 사람은, 무조건 머리 속에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배를 띄웠다는 건, 결과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걸 세상이 인증해줬다는 뜻일까.’
아렌은 그렇게 추론했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는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지만, 라이안이 바원궁을 나갈 방법은 한 가지 뿐이고, 그 방법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지금 형님 이야기를 왈가왈부해봤자 결론이 변하지는 않겠지. 그럼 이번엔 아렌 네 이야기를 해보겠나?”
“그러죠. 중간부터는 이미 하고 있었던 것도 같지만요.”
“하하.”
레온나토스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아렌의 말에는 그도 웃을 수 없었다.
“전, 전하를 섬기는 가신 아렌입니다.”
“그건 알고 있네.”
“이래저래, 전하를 섬기게 된 지 32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만.”
“…32년? 아렌 자네 나이는 이제 곧 열일곱이 되는데?”
“그렇습니다. 제 첫 번째 삶에서, 전하를 20년 섬겼었죠. 전하께서 서른이 되던 해, 모함을 받아 참수당했죠. 죄목은 레온나토스 황자의 암살 배후였고요.”
“….”
“하지만 전, 다시 열 살 무렵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게 두 번째 삶의 시작이었죠. 그때는 지금과 대동소이합니다. 딱 지금 시기 정도까지, 6년 이상 전하를 섬겼죠.”
혼란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레온나토스는 놓치지 않고 잘 따라와 줬다.
“그리고 이게 세 번째 6년이라는 건가?”
‘역시, 금방 알아듣는군.’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 라이안 황자가 되돌아갈 때 같이 과거로 가게 된 것 같습니다. 혹은, 모두 다 과거로 돌아가지만 저와 라이안 황자 둘의 기억만 남아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그럼, 형님은-”
“제가 알기로는 이미 일흔 번이 넘는 회귀를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형님 정도라면 황태자가 되는 것 정도는 간단할 텐데.”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얼핏 듣기로는 모두가 만족할 만한 미래를 원한다는 것 같더군요.”
“….”
“물론, 그 실상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겪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한없이 즐기고 싶을 뿐일지도 모르죠.”
원래라면 라이안은 당장이라도 자결한 뒤 과거로 돌아갔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 뒤로, 라이안 황자의 소식은 없습니까?”
“그래, 아직까지는. 여전히 제국 황자의 신분이니, 제국에서도 사방으로 형님을 찾고 있어.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제국과도 등지겠다는 의미로군요.”
“혹은, 이럴 수도 있지.”
레온나토스는 다른 가능성을 말했다.
“라이안 형님이 죽으면 과거로 돌아간다면서? 만약, 이미 형님이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면?”
그건, 확실히 아렌이 생각해 보지 못한 미래였다.
“이번에야말로 아렌 자네도 현실에 남겨져 버린 것일지 모르지. 과거로 간 건 라이안 형님 하나뿐이고.”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것도, 라이안이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면 생각할만한 경우의 수였다.
하지만.
‘…왠지, 아닐 것 같지만.’
아렌은 어째서 라이안이 회귀할 때 자신도 같이 휘말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쉽게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보통 틀리지 않는다.
“…레온나토스 전하.”
더글라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레온나토스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라이안 황자가, 성명문을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