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몇 번째 삶이냐고?”
“그게 무슨 뜻이야?”
라이안의 물음에, 아르테와 더글라스가 돌아봤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할 적절한 시기도 아니었고 말한다 해도 믿어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 그럼 라이안에게는 괜찮다는 거야?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아렌은 머리를 흔들어 방금 든 생각을 흩어버렸다.
라이안에게 자신과 같은 일을 겪고 있다는 동질감을 강하게 느꼈던 모양이었다.
지금 라이안에 아렌에게 하고 있는 건 단순한 추측이었다. 혹시나, 자신과 같이 기억을 유지한 채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
하지만 그 의혹이 오래되었다면 지금까지 아렌을 내버려 둘 이유따위는 없었다.
아렌을 의심하게 된 건, 극히 최근의 일일 터.
“…글쎄요.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인지, 저는 도통 모르겠군요.”
아렌은 발뺌했다. 굳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줄 필요는 없다. 확신이 생긴 순간, 라이안은 시간을 되돌릴 테고 그보다 작은 권력을 가진 아렌은 변변한 저항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라이안은 레온나토스와 아렌이 서서히 힘을 쌓는 것을 결코 방관하지 않을 테고, 아렌의 목숨을 끊는 것 정도는 촛불 끄는 것보다 간단했다.
라이안은 원래 로이터 주교가 있었어야 할 방 한가운데 혼자 서 있었다.
주변에 호위할 만한 병력은 아무도 없었지만, 라이안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주위에 호위가 없다는 걸 확인한 더글라스가 천천히 황자에게 접근했다.
“…라이안 전하.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열세입니다. 그만 포기하시지요.”
“포기? 무엇을 말인가?”
“그건-”
“지금 자네들은 타국의 궁전에 멋대로 침입해와, 손님인 나를 겁박하고 있군. 무슨 이유로?”
“…….”
더글라스는 대답하지 못했고, 그 사이 물러나 있던 아르테가 앞으로 나왔다.
“물론, 정통한 통치자였던 성하를 시해하고 그 죄를 내게 뒤집어씌운 죄 때문이죠. 당신은 죗값을 받을 거에요. 교국과 제국 양국으로부터.”
“흠, 그거 등골 서늘한 말이로군. 그런데, 증거는 있나?”
“증거? 당신이야말로 증거도 없이 날 몰아세웠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나요?”
“확실히 그렇군.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러니, 자네의 복권을 도와주면 모든 사태가 끝나나?”
“…….”
아렌은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이곳에 로이터가 있었다면 유리하든 불리하든 한판 붙어볼 수 있었을 거고, 라이안의 호위가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하지만 이곳엔 라이안 혼자 있었고, 항상 붙어 다니던 호위조차 없었다.
더글라스와 발커스, 두 기사가 라이안을 붙잡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항상 행동에는 명분이 뒤따른다.
지금 아렌에게는 무저항인 황자를 굳이 붙잡아 둘 만한 명분이 부족했다.
아렌이 물었다.
“…로이터 주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뭐냐, 끝내 내 질문엔 답하지 않을 거냐?”
“…….”
“뭐, 좋겠지. 로이터 주교라면 잠시 밖으로 내보냈네. 내 옷을 입혀서.”
“…….”
아렌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라이안이 한 일은, 아렌이 레온나토스에게 아르테의 복장을 입힌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로이터 주교가 흔쾌히 비원궁을 나가진 않았을 텐데요.”
“물론 다소간 저항은 있었지. 무용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의 라이안은 전보다 훨씬 더 교국을 휘어잡은 모양이었다. 한번 겪어본 삶이기에 은연중에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건 아렌 뿐만이 아니었다.
“교국 내부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서 말이야. 로이터 본인이 퍼트린 것이냐고 닦달한 다음, 책임을 지라고 밖으로 보냈지. 물론 그건 아렌 네가 퍼트린 소문이겠지?”
“…글쎄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으시겠죠.”
아렌은 슬금슬금, 라이안을 향해 다가갔다.
라이안이 자결하지 못하도록 언제고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지만, 라이안이 더 빨랐다.
라이안은 경고했다.
“물러서라, 아렌. 내가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나? 설령 가웨인과 더글라스가 동시에 덤벼들어도, 내 목숨을 해할 순 없을 거다.”
언뜻 듣기에 지나치게 호기로운 말이었지만, 아렌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네들이 오기 전 내가 먼저 목숨을 끊을 테니까.”
“…….”
‘물론, 가능하겠지. 그 짓만 벌써 70번 넘게 해왔을 테니.’
치열한 황권경쟁의 한가운데에서 선두를 지키던 자다. 그동안 수많은 경우의 수를 겪으며, 여유로운 가운데 자결할 수 있었던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물론 다른 이의 손에 죽어도 회귀는 가능하지만, 왼쪽 눈의 운명석이 깨어지기라도 하면 라이안 황자의 영원할 것 같았던 회귀생활도 끝을 고하게 된다.
라이안은 죽더라도 소위 말해 잘 죽어야 하는 것이다.
“…저게, 무슨 말이지?”
라이안에게 칼을 겨눈 더글라스는 그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뒤에서 소곤거리는 아르테.
“…아렌. 저거, 운명석에 대한 얘기 맞지?”
그동안 능력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속이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는 판단력이 꽤나 느려진 아르테였다.
“…아마도. 라이안의 운명석은 왼쪽의 의안이야.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누구도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지. 그리고 그 능력은 아마도, 과거로 되돌아가는 능력이야.”
“…과거로!”
조금 긴장한 듯 말한 아르테.
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왜그래?”
“…아니, 라이안 황자가 과거로 되돌아가면, 우리들은?”
“…….”
“우리가 굳이 그걸 막을 이유가 있나?”
그건, 아렌도 줄곧 해오던 고민이었다.
라이안이 과거로 되돌아간 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되드냐는 것.
기억만 사라지고 라이안과 함께 되돌아간다면, 막아야겠지만 너무도 장대한 이야기였다. 운명석으로 이 세상 모든 일에 간섭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반대로 남겨진 채, 라이안 없는 삶을 계속 이어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쁠 것 없다.
[운명석은 현재에 간섭할 수밖에 없다.]
유랑족의 주술사가 아렌에게 해줬던 말을, 아렌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확실히, 과거로 돌아가고 어쩌고는 능력의 범위가 너무 커. 아무리 운명석이라도, 그런 것이 허용됬다면 이 세상은 훨씬 운명석에 좌지우지됐겠지.’
어쩌면.
아렌은 한가지 가설에 도달한다.
“…라이안.”
“오, 이제는 존칭도 붙이지 않는 건가, 아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마치, 승기를 잡았다는 듯한 말투로군.”
“아니. 나도 지금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아렌은 품에서 카드 한 뭉치를 꺼냈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꺼낼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라이안은 긴장했다.
운명석의 능력은 어떤 식으로든 발현될 수 있다. 아렌의 저 카드 또한 능력의 발동조건일지 몰랐다.
‘아니, 하지만 아렌은 한 번도 운명석 사용자였던 적이 없는데-’
아렌에 대한 검증은 그간 수십 번이나 끝마쳤던 라이안이었다. 아렌은 라이안의 69번째 회귀에서 운명석과 계약했지만, 수없이 계속된 고정관념이 라이안의 사고를 흐트러뜨렸다.
“라이안. 점괘를 내려주지. 아쉽게도 넌, 스스로의 힘으로 자결할 수 없어.”
“…?”
“스스로 손을 쓰든, 다른 이에게 명령하든, 어떤 방식이든 간에.”
아렌은 힘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그동안 몇 번이고 해왔던 언령이지만, 여전히 그것이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렌이 내뱉은 말은 대주교의 응접실 안을 허무하게 맴돌았다.
“…끝났나? 방금 그게 뭐지? 점괘? 아니면 명령?”
“뭐라고 생각해도 좋아.”
아렌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와 교대하듯 더글라스와 발커스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라이안 전하의 옥체를 상하게 할 뜻은 없습니다. 교국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몸을 맡겨주시지요.”
“어허. 분명 접근하지 말라 했을텐데.”
여유롭게 단검을 뽑아 자신의 심장을 겨눈 라이안.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걸쳐 알게 된, 가장 고통 없이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인 듯했다.
“…그만두시지요. 이번 황제폐하께서 주신 임무에서, 조금 그르쳤을 뿐 아닙니까. 설령 황태자가 되지 못 한다 해도, 레온나토스 전하께선 다른 황자를 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흥, 그야 그렇겠지. 녀석은 그런 놈이니. 물론 나 역시 그 놈이 무서워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럼?”
라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국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선 라이안의 부하들을 멈추게 해야 했지만, 여기서 죽여버리면 오히려 역효과다.
이번 교국에서의 사태를 그르칠 수도 있거니와, 주군인 레온나토스 또한 일정한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그때, 아렌이 뒤에서 소곤거렸다.
“…더글라스.”
“뭐야, 왜그래?”
“라이안 황자는, 자결할 수 없을 거예요.”
“…방금도 그 말을 하던데. 그건 대체 뭐냐. 자극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라이안은 목숨을 끊을 수 없어요.”
“…아렌? 괜찮아?”
더글라스의 목소리에 진한 걱정이 묻어나왔다.
아렌의 이마에는 어느덧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더글라스는 아렌과 라이안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아렌만큼은 아니지만, 안색이 나쁜 건 라이안도 매한가지였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듯, 단검을 부들거리며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라이안은 줄곧 여유롭던 태도를 버리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더글라스는 재빨리 달려가 그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바닥에 버렸다.
라이안 또한 단검을 심장 쪽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 움찔했을 뿐.
단검 날 끝은 라이안의 피부 끝에도 닿지 않았다.
“전하. 용서하시죠.”
더글라스는 라이안의 팔을 뒤로 꺾어 움직임을 막았다.
땅에 떨어진 단검과 아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라이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게 아렌 네놈의 능력이었나?”
용한 점괘를 내는 게 아니라, 점괘로 낸 모든 말이 현실이 되는 것.
하지만, 그게 부자연스럽거나 강하게 의도된 것일수록 아렌의 몸에 오는 부담은 컸다.
방금처럼 개인의 몸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 또한,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
‘…이걸로, 라이안의 회귀는 막았어. 다음엔-’
그 생각을 끝으로, 아렌의 몸은 스르륵 차가운 바닥 위로 허물어졌다.
*****
미지근한 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렌도 알고 있었다.
한번 잃었던 정신이 수면 위로 점점 떠오르는 감각이라는 것을.
아렌은 슬며시 눈을 떴다.
“아렌! 일어났구나!”
“…전하?”
눈앞에는 제국의 12황자, 레온나토스가 있었다.
아렌은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화급한 용건이라 몇 가지 여쭙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쓰러지고 며칠이 지났습니까?”
“아직 한 달이 조금 안되었을 거다.”
‘한달!’
“그럼 이곳은?”
“아직 교국 안이다. 비원궁 안은 아니지만.”
아렌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럼, 라이안 황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
아렌의 질문에 레온나토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렌은 불안함을 느꼈다.
“라이안 형님은, 현재 모습을 감췄네. 벌써 2주가 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