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아르테를 놓쳐?”
아르테를 따라 국경을 넘은 흑사자 기사단은 한 명도 남김없이 소식이 끊겼다. 그들의 보고가 없다는 것, 그것부터 이미 사태가 그들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건, 바라던 결과가 아닌데.”
참모의 보고를 받던 라이안은 탄식하며 지친 눈을 감았다. 얼마간은 더 전과 같은 미래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황자에겐 썩 달갑지 않았다.
“아르테를 놓쳤다면, 그 이유는 뭐지? 왜 기사단의 연락은 없고?”
“그건… 레온나토스 황자가 남부로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
“-레온나토스가? 그건 확실한 정보인가?”
“목격담이 많습니다. 여러 정황까지 살핀다면, 레온나토스 황자가 남부에 내려와 있는 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모의 확신에 찬 어조에, 도리어 라이안의 생각은 깊어졌다.
‘…그만큼의 변화라니. 그럴 계기라도 있었나?’
정말 사소한 한두 가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껏 라이안은 바로 전의 삶과 똑같은 방향으로 여기까지 왔다.
물론 아무리 전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 해도, 미래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라이안의 의도와 다르게 진행되어버린 미래도, 라이안은 몇 번이나 겪어왔으니까.
가령 바로 이전번의 삶은, 라이안에게도 아주 기이한 삶이었다.
평소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을 틀려가며 미래 개척을 고민하던 그때, 어떤 연유에서인지 레온나토스에 대한 음모가 빗나가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다른 미래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지점에서의 차이는 시작은 미미했으나, 비탈길을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점점 살을 붙이더니 어느덧 레온나토스를 가장 유력한 황권경쟁 후보로 급부상시켰다.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올 일 없었던 교국의 비원궁으로 라이안을 인도했다.
레온나토스의 잠재력이야 그동안 깊이 확인했기에, 문제 될 일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렌 놈이, 그렇게 두각을 드러낼 줄은 몰랐는데.’
사실 지금까지 아렌은 라이안의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이미 수많은 시간 동안 아렌을 검증해왔고, 그가 단지 별 볼 일 없는 점술가라는 사실도 벌써 수십 회차 전에 확인을 마친 일이었다.
물론 최근 아렌이 내놓는 점술이 이상할 정도로 잘 들어맞고, 그만큼 더 유명해졌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원래부터 그런 연기만큼은 잘 한던 자이니, 이상하지는 않아. 이번 회차에선 특히 더 날카로운 점괘를 낸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잠깐만.’
방금 어떤 위화감이 라이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위화감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라이안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내 71번째 회귀야. 저번 70번째 회차가 내가 처음 비원궁에 들었던 그 회차였고. 그리고-’
그리고 그 이전, 69번째 회차가 바로 라이안이 시험삼아 레온나토스를 죽인 회차였다.
아렌의 아내인 아라흐네를 통해 점괘를 확인하고, 굳이 점괘가 길하다고 칭한 사냥날에 레온나토스를 암살, 누명을 뒤집어쓴 아렌은 변변한 저항 한마디 못한 채 목이 잘렸다.
거기까지는 비교적 기억이 또렷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69번쨰 삶은, 어떻게 끝난거지?’
운명석이 파괴되지 않은 한, 라이안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 과거로 다시 되돌아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69번째 삶이 어떻게 끝났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아렌의 목이 잘렸었지.’
거기까지는 선명하게 기억난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고, 아렌의 머리가 땅을 몇 바퀴나 굴렀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 삶의 마지막까지는 결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누락이라도 된 건가? 어째서?’
라이안은 고민에 잠겼다.
*****
“…시간을 계속 되돌아가는 얼간이? 무슨 비유 같은 거야?”
아르테는 아렌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물론 아렌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 단지 라이안 황자가 아주 크게 집착하는 이미지일 뿐.”
“황자가, 집착한다고?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뭐, 그 소문으로 라이안이 비원궁 밖으로 나온다면야 이야기는 간단해지겠지.”
비원궁 밖에서는, 차마 라이안 황자를 공격할 수 없다.
말에 탄 백여 명의 기사단을 야지에서 공격할 강심장은, 대륙을 통털어서도 몇 없으니까.
하지만 비원궁을 먼저 점거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라이안의 병력은 공성에 진심을 다할 수 없고, 로이터 주교를 잡기만 하면 반절 이상 성공이나 다름없어.’
사실, 전과 완전히 같은 전략이다. 이미 검증된, 효과있는 전략이지만 문제도 있었다.
바로, 이전 삶의 기억이 있는 라이안이 어떤 식으로든 미리 대비해뒀을.
실은 이전 삶과 완전히 같은 전략이다. 이미 검증된 효과있는 전략이지만, 문제는 라이안이 미리 대비하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아마 시기를 대폭 앞당겼으니 괜찮지 않을까. 낙담할 필요도 없지만.’
사건 전후가 묘하게 달라진다는 건 그도 알고 있을 테니, 그걸 감안한 전략을 준비해올 것이다.
‘-좋아. 부딪쳐보자고.’
라이안이 자신을 눈치채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아렌에겐 라이안 황자와의 일대일 승부처럼 느껴졌다.
*****
비원궁에 꼭 필요한 물건을 채워넣기 위한 보급작업은, 각지의 수도원이 도맡아가며 봉사하는 자리였다.
아이기스 수도원의 순번이 되었고, 턴데일 수도원장은 조금 긴장한 낯빛으로 비원궁을 오르내리는 줄다리 앞에 사제들을 도열시켰다.
백여명에 달하는 신도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몸만큼 큰 바구니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경비가 삼엄했었나?’
비원궁의 정문으로 향하는 줄다리 앞에는, 비원궁의 무승들이 일렬로 도열한 채 한명한명 몸을 검사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비원궁의 경비가 삼엄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턴데일이 이토록 놀란 것은, 다른 수도원이 올라갈 때는 이토록 삼엄한 경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
사실은, 라이안에게 이전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럴 뿐이었지만.
흔들다리 앞에서, 일일이 짐을 들춰보고 얼굴을 대조하는 무승들.
하지만, 그들이 찾고 있는 수상한 인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명 한명 줄다리를 건너게 할 때마다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졌다.
오직 수도원장 턴데일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아렌의 말대로 하길, 정말 잘했어.’
*****
“…역시, 어제는 완전히 삼엄했던 모양이야. 그 반동인지 지금은 훨씬 느슨해졌어.”
아렌은 다음날, 다른 수도원의 행렬에 합류해 황궁 안에 들어섰다.
이미 저번 삶에서 로이터 체제의 비원궁에 반감을 가진 수도원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 중 한곳에 도움을 요청했다.
잠입 계획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출발선에는 선 다음에 유불리를 따져도 따질 수 있다.
그 즈음, 라이안은 황궁 밖에서 들려오는 묘한 소문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궁을 비운 상황.
황자가 없는 비원궁에, 이번으로 두번째 발을 들인 아렌이었다.
아렌은 비원궁의 복도를 퍽 익숙한 것처럼 걸었다.
아렌의 태도에 아르테조차도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아렌. 여기 와본 적 있어?”
“그럴 것 같아? 아니.”
“그래, 그렇겠지….”
“뭐야, 왜 그래? 찝찝하게.”
“…아냐, 아무것도. 단지. 처음 와본 궁 안을 너무 익숙하게 걷길래 그만.”
“…확실히 처음 와보는 곳이긴 하지만, 보통 이런 곳은 다 비슷비슷한 것 아닌가?”
스스로도 자신의 변명이 궁상맞다는 것을 알겠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일.
아르테는 아렌의 설명에 넘어갔다.
아니, 넘어가줬다는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조심하도록 해, 아렌. 여기서는 더욱 신경써주지 못할테니까.”
물론, 그것도 각오하고 있는 바였다.
“걱정 마.”
다른 두 기사는 조금 쭈뼛대면서 걸었다. 오랜 시간동안 이곳이 집이었던 아르테조차도 조금은 긴장했는데, 아렌은 그런 긴장조차도 없이 복도를 시장 골목처럼 누볐다.
처음 계획한 대로, 그들은 곧바로 로이터 주교의 집무실부터 공략했다.
“-너희는.”
퍼벅!
문 앞을 지키는 위병 둘은, 더글라스와 발커스가 단번에 처리했다. 손잡이의 쇠로 내리쳐 죽이지는 않았다. 아르테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기절했군요.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에요.”
기절한 만큼, 깨어나면 곧바로 경보처럼 울릴 것이다. 아군도 없이 스스로 비원궁 안에 고립된 넷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만큼 반드시 성공시켜야 겠다는 각오가 서는데?”
“제발, 그래야 할 거에요.”
아렌은 서서히 로이터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뜻밖의 인물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라이안 황자?”
“오랜만이군, 아렌.”
거기엔, 지금 있어서는 안될 자가 서 있었다.
“거기엔, 어떻게?”
*****
“-어떻게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아렌.”
로이터 주교가 앉아있었어야 할 대주교실에는, 라이안 혼자 뿐이었다.
아렌은 무심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어? 호위는? 아무리 꼭꼭 숨어있다 해도 이건-”
무방비해도 너무 무방비했다.
황족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밀착호위, 암살시종조차도 이런 환경에서는 활약하지 못한다.
“호위? 짐이, 호위를 두어야 하는 상황인가? 왜지? 짐을 죽이리기라도 할 건가?”
“그래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
라이안의 말에 대답한 건, 기껏 각오한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은 아르테였다.
아르테가 으르렁대듯 각을 세웠음에도 라이안은 태연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믿지 않아서?
그것이 아니다.
그들이 언제고 칼을 겨눠도, 라이안에겐 별 상관 없었기 때문에.
명백히 라이안에 의한 연출이었지만, 아렌은 긴장했다.
정황상, 라이안이 아렌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너,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 전하 아니십니까.”
“그런 형식적인 것 말고. 아니, 질문이 잘못됐나? 다른 걸 묻지.”
“….”
“아렌, 넌…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지?”
‘올 게 왔군.’
아렌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방 안에는 아렌과 아르테, 두 기사와 라이안, 세 명 뿐이었다.
라이안의 선문답을 지켜만 보고 있던 발커스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아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라이안 황자를 포박하고 난 다음 해도 되겠죠?”
“물론, 그렇게 해도 된다네,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
“….”
아렌에게 한 질문이지만 자연스럽게 그가 받았다.
“설마, 이것도 잘못된 질문인가? 그럼, 이게 마지막 질문었으면 좋겠는데.”
라이안의 질문은 차가운 쐐기처럼 아렌에게 날아와 박혔다.
“-지금이 아렌, 자네에게는 몇 번째 삶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