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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04화 (204/227)

#204화

아렌은 긴장했지만, 저번 삶과 달리 마차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관문을 통과했다.

검문 받는 내내 아르테는 아렌에게 한층 더 달라붙었고, 아렌은 기겁하며 떨쳐내고의 반복이었지만, 겉모습과 달리 아렌은 냉정했다.

‘겉으로만 더 수월히 통과한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전보다 더 의심받았다는 뜻인가?’

아르테는 위병이 의심할 조짐만 보여도 얼른 달라붙어, 일부러 닭살 부부를 연기했다.

아무리 재입국이 그들의 예상 밖이라 해도, 국외로 도망친 교국의 주교와 같은 머리 색의 여인이 마차에 타 있다.

눈길이 한 번쯤 더 머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눈앞 상대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아르테에게는 위병의 의심조차도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위병은 아르테의 애정행각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얼른 마차를 통과시켰고, 그 뒤를 바짝 따라오던 더글라스와 발커스 또한 앞 순번의 여파로 검문을 대강 마칠 수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검도 숨겨 가져왔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렌은 이전 삶에서 한번 지났던 길을 다시 걸었다.

도로와 풍경은 전과 같았지만, 길을 다니는 통행량은 이전에 봤을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동에 자유롭고, 도적 따위를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었다.

“여기가, 원래 이런 곳이었나?”

아렌의 중얼거림. 조금 떨떠름해 하면서도, 아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두 같은 신앙심을 품고 있으니 동질감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지. 비록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건 아니지만, 난 내 나라를 사랑해.”

“…어려서부터 수도원에서 자랐다고? 부모는?”

“글쎄. 어려서부터 시설에 맡겨지는 아이는 어디든 있잖아? 제대로 물어본 건 아니지만, 수도원 앞에 두고 가셨겠지. 양육비 대신 흑옥으로 된 팔찌를 놔두고 말야.”

“…내가 괜한 걸 물었나?”

“어?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돼.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잃은 대신, 아트마 님의 사랑을 얻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실, 네 신앙심은 그리 깊지 않은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네.”

“무슨 소릴. 그저 남들보다 좀 더 합리적일 뿐이거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아이기스 마을로 들어섰다.

이전 삶에선 통행이 뜸하던 차에 들어선 마차라 이목을 끌었지만, 지금은 그저 흔하디 흔한 마차 중 하나일 뿐이다.

‘우선, 마을 입구는 괜찮은 것 같네. 하지만 수도원까지는 역시 걱정인데.’

그때, 갑자기 아르테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 말고 다른 거점을 물어보지 않았어? 결국 여기였어도 괜찮은 거야?”

“그게, 처음엔 염려하던 부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상관없을 것 같았거든.”

“염려하던 부분? 그게 뭐였는데?”

아렌은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지만, 아르테가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가령, 수도원 부근에 감시를 붙여놔, 수도원 안에 들어간 사이 이단심문관이 습격한다거나.”

저번 삶에 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 수도원장 던테일은 자신의 권한으로 이단 심문관의 수색을 거부했지만, 자칫 비원궁의 눈 밖에 날 뻔한 아찔한 사건이었다.

만약, 아렌과 기사들이 로이터 주교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턴데일 수도원장과 그 수사들 또한 극형을 면치 못했을 터.

‘…당시에는 워낙 급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배포가 커도 너무 크잖아?’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수백명이 기거하는 수도원을 지켜야 하는 자로서는 내리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단지 아르테를 어려서부터 키운 정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렌은 물었다.

“아르테. 턴데일 수도원장은 어떤 사람이지?”

“…뭐야, 그 분에 대해 왜 물어보는 거야?”

“앞으로 도움을 구할 건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왜, 제국의 그 잘난 밀정도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지?”

교국 국경을 넘고부터, 아렌은 모르는 게 당연한 말을 언뜻언뜻 내뱉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무시하고 있었지만, 역시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분은, 교국 사람들 중에서도 특이하시지.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주의자니까. 내 능력에 대해서도 원장님이 먼저 조사해서 알려준 거야. 그걸 갈고 닦아서 더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된 것도 원장님 도움 때문이고.”

“남들은 아트마 신의 은총이라 여기는 능력의 정체를, 혼자 알고 있다는 거지? 근데 그건 신성모독이 아닌가?”

“설령 운명석으로 얻은 능력이라 해도, 거기까지의 인도는 아트마의 은총이라는 주장이시지. 설령 신에게 기원한 능력이 아니더라도, 그걸로 신의 뜻을 널리 설파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과연. 어쩐지 알만하군.”

아르테의 말에는, 상대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신뢰가 뚝뚝 묻어나왔다.

그리고, 아르테의 신뢰를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렌은 알고 있었다.

아르테에게 능력을 가르친다는 건,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의 속마음부터 먼저 내비쳐야 한다는 것.

그의 마음속에 아주 약간의 흑심이라도 있었다면 아르테는 눈치채고 거리를 뒀을 것이다.

능력을 다스리는 것을 가르치면서, 마음속에 흑심 한 점 없는 자.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본인조차 모르는 흑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조차도 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었다.

이단 심문관 앞에서조차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때 짐작했지만,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만약, 우리를 비원궁 안으로 데려가달라고 물어보면 들어줄 수 있을까?”

“음, 글쎄? 그것만큼은 직접 물어보지 않고선 모르겠는데?”

‘하긴, 그렇겠지.’

사실 아렌은 정답을 알고 있다. 턴데일 원장은 흔쾌히 도와주고 온갖 노력을 다 쏟을 것이다.

아렌은 마차를 아이기스 마을 외곽에 두었다. 두 기사가 아르테의 마차로 건너갔고, 아렌은 혼자 마차에서 내렸다.

“우선, 혼자 가서 수도원장과 만나볼게.”

“혼자?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설령 정문 근처에 감시가 있어도, 어린 방문객 한 명 정도는 이상하지 않잖아? 하지만 지나치게 근육이 발달한 농부와 머리가 하얀 여자가 온다면 주의를 끌겠지?”

바로 이전 삶에서도 정문 앞에는 감시가 붙어 있었다. 이번 삶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들킨다면, 이번에는 수도원조차 지워버릴 수 있다는 각오로 병사를 이끌고 올 것이다.

아렌은 혼자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라, 높은 담벼락과 연결된 수도원 정문에 다다랐다.

-쿵쿵.

문에 달린 쇠 장식을 두드리자, 철문 옆에 가로로 작게 난 창문이 열렸다.

전과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수사의 눈만 빼꼼히 보였다.

“누구십니까? 식사시간이 머지 않았는데요.”

그때와 다른 점은, 수사의 표정이나 태도가 그다지 경직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교국 내부 사정이 훨씬 혼란스러웠기에 말단 수사조차도 외부인을 경계했지만, 지금은 하필 식사시간에 방문해서 불만이라는, 평화로운 불퉁함이었다.

“네, 방문이 사려깊지 않았던 점 사죄드립니다. 턴데일 수도원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원장님을 뵈러 오셨나요? 누구라 전해드리면 될까요?”

“제국 남부, 아렌 상회에서 명주실과 식기, 흑옥 팔찌의 대금을 받으러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수사는 창을 닫고 위로 올라갔다.

전에 방문했을 때에는, 수사에게 서신 한 장을 들려 보내는 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아르테가 없었기에 서신을 맡길 수사가 믿을만한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불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아렌은 턴데일이 자신을 만나줄 거라 확신했다.

잠시 후, 수도원 정문의 문이 열렀다.

방금 올라갔었던 수사였다.

“들어오시지요.”

*****

수도사는 아렌을 안내했지만, 사실 아렌에게 안내는 필요 없었다.

저번 삶에서 일주일가량 이곳에 묵은 적 있었기에, 이곳의 구조는 대강 알고 있었으니까.

아렌은 수도원장의 방에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건 염소 모양의 수염을 한 사제, 수도원장 턴데일이었다.

턴데일이 권하지도 않았는데 아렌은 익숙하게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생각보다도 더 젊으시군요. 제게는 무슨 볼일이 있어 오셨습니까.”

“수사가 설명하지 않던가요?”

“아, 그러고 보니 이것저것 말하긴 했습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상회 이름과 기억에도 없는 물품들 대금에 대해서요.”

“그렇다면, 짐작 가는 곳도 있으시겠죠.”

“…아르테와 같이 있습니까?”

아직 비원궁 안의 일들은, 교국 내부에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들은 아르테가 대주교 시해의 범인이라는 확실한 정황을 만들어둔 다음 공표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각 지역 신앙의 거점이 되는 수도원에서는 비원궁 안의 소식을 접하는 독자적인 수단이 한두 가지씩 존재했다.

“정말, 아르테가 대주교님을 살해한 겁니까?”

“아뇨.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본인께서도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따금 사람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을 하곤 하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이 말은 좀 이상할까요. 그녀는 함정에 빠진 겁니다. 대주교 살해의 진범은 로이터 주교와 그를 지원하는 제국의 황자 라이안입니다.”

과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턴데일이 물었다.

“그럼, 당신은?”

원장의 물음에 아렌은 앉은 채로 조금 허리를 폈다.

“제국의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의 비서관, 아렌이라 합니다.”

“…정말 제국 분이셨군. 아르테는 결국 제국과 손을 잡은 겁니까?”

“정확히는 레온나토스 전하와 잡은 것이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확신합니다.”

“하긴, 예전부터 가진 능력 없이도 영특한 아이였으니까요.”

턴데일은 아르테를 걱정하면서도 기특해했다.

아렌은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었다.

“지금, 그들은 마을 외곽에 있습니다. 호위로 동행한 기사 둘과, 아르테 총 세 명이죠. 어색하지 않게 안으로 들이고 싶습니다.”

“예? 그저 안으로 들어오면 되지 않습니까?”

“혹시나 수도원이 감시라도 당하고 있다면 곤란하니까요. 상회의 어린 심부름꾼이 방문하는 것과 호위 둘을 거느린 흰 머리의 여인이 방문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죠. 이단심문관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턴데일은 유쾌한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아렌의 예시가 실제로 벌어졌었고, 지금도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이전 삶의 턴데일은 바뀐 지도체제 속에서 온갖 혼란을 몸소 겪었던 자였다.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그밖에 준비해야 할 건 있습니까? 준비는 미리 해둬 나쁠 것 없지요.”

저번 삶과 마찬가지로, 턴데일은 추진력이 강한 자였다. 아르테를 안으로 들이는 것 외에, 아렌은 두 가지를 더 말했다.

몰래 비원궁 안에 잠입할 방법과, 비원궁 부근에 소문을 퍼트릴 방법을.

“…소문이요? 무슨 소문입니까?”

“되도록 애들 장난 같은 내용이면 좋겠군요. 그럼 더 널리 퍼지겠죠.”

“장난같은 내용이라 함은?”

아렌은 방금 아무렇게나 막 떠올린 것처럼 떠들었다.

“음, 글쎄요. 몇 번이고 되살아나서, 겪었던 인생을 반복하는 얼간이에 대한 소문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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