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아렌은 겨우 아르테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 사실 자체는 저번 생과 같았지만, 문제는 그 장소와 시기였다.
저번 삶에서 아르테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부에 다다른 뒤, 테오드릭의 호위를 받아 가며 북부로 향했다. 아렌이 아르테와 같이 교국 국경에 다다르는 건, 아무리 일러도 한 달은 뒤의 일이어야 했다.
‘교국 안에 잠입은, 역시 힘들겠지?’
사실 원래 계획은, 다시 한번 전과 같은 루트로 비원궁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라이안과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역사가 바뀌었다면, 이젠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역시, 전과 같은 결정을 조금 더 따라갔어야 했나?’
문득 생각이 미친 아렌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돌아온 건 아렌 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아렌이 전과 같은 결정을 다른다 해도, 라이안이 다른 선택을 하면 무용지물이다.
“아르테. 생포한 흑사자 기사단의 속마음을 볼 수 있어?”
“물론이지. 뭐가 알고 싶은데?”
“라이안이, 추격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아르테는 곧바로 이해하고 흑사자 기사단의 속마음을 훑었다.
“…동부? 내가 국경을 넘고, 모습을 감추면 우선 동부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렸나 본데? 왜지?”
“그야, 네가 제국 동부로 향할 거라 생각해서겠지.”
“어째서? 라이안 황자가 나와 네 관계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북부로 보내지 않을까?”
왜냐하면, 저번 삶의 아르테가 허를 찔러 동부로 향했기 때문이다.
라이안이 별다른 변수를 주지 않으면, 이번에도 아르테는 같은 선택을 했을 테고, 그건 곧 라이안이 아르테를 사로잡아 미래를 바꾸려 했다는 증거였다.
‘라이안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미래는 달라졌어. 나나 라이안이나, 과거로 돌아온 메리트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지.’
아렌은 아군의 전력을 파악했다.
죽은 낮안개 기사 넷, 다친 셋을 제외하면 33인의 기사단과 200여 명의 위병이 있다.
정예도를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지만, 한 나라의 정규군과 싸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비록 실제로는 아르테를 호위하기 위한 원정이었지만, 겉모습은 제국이 국경에 군사를 모집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지금쯤 로이터 주교는 라이안의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비원궁 안을 장악 했을 테고, 각지의 수도원은 그런 로이터가 탐탁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동원령에 소집될 것이다.
먼젓번 삶에서 아르테는 양국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이제 와서, 그 전면전을 다시 도모할 수는 없었다.
‘전면전은 불리한 데다, 설령 이기는 중이라도 안심할 수는 없으니.’
신묘한 기책을 쓰거나, 기적이 일어나 전황이 유리해진다고 해도 아렌에겐 넘어야 할 산이 더 있었다.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불리해지면, 라이안은 곧바로 자결할 것이다.
자결이 바로, 라이안이 시간을 되돌아가는 조건이었으니까.
라이안은 운명석 계약자고, 운명석의 힘을 없애려면 계약자의 운명석을 부수면 된다.
라이안의 운명석은, 왼쪽 의안의 눈동자였다.
‘황자의 왼쪽 눈을 뽑거나 부숴야 하나? 사실상 시해나 마찬가지 시도로군.’
운명석 의안의 주인은, 황제를 제외하면 제국 제일의 권력자였다.
그나마 아렌의 상황을 웃어주는 건,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제국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호위에 가장 허점이 많은 시기일 터였다.
‘정리하자. 라이안을 아직 교국에 남아있는 순간 상대해야 하는 건 맞아. 전면전은 꿈도 꿀 수 없고. 기습하려면 결국 전과 같은 방법을-’
“…아렌?”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아렌에게 레온나토스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눈 바로 앞을 손이 지나가는데도, 아렌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정말 눈과 귀라도 동시에 멀었나, 당황한 순간.
아렌은 말했다.
“전하께서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데리고, 최대한 화려하게 황도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돌아가라고?”
“네. 가짜 아르테 주교를 호위하면서요. 멀리서 본다면, 영락없이 진짜같이 보이도록요.”
“그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지. 하지만, 그럼 실제 아르테 주교는?”
“저와 함께 다시 국경을 넘어, 비원궁으로 향할 겁니다.”
“아렌!”
방금 막 교국 국경을 통과한 참이었다. 아르테와 다시 국경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에, 레온나토스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르테 주교는 아마, 제국의 힘을 빌려 전면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무고한 수많은 피가 흐를 테니까요. 맞지?”
“어, 어어…”
마지막에 말꼬리가 자신을 향하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한 아르테.
“피해를 가장 최소화하는 방법은, 모가 됐든 도가 됐든 교국 안으로 잠입해, 로이터 대주교를 제압하는 겁니다.”
“…응?”
아르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정황상 로이터 주교가 황자와 손을 잡은 건 맞겠지. 그런데, 로이터 주교는 대주교 자리에 오른 적이 없는데?”
“…아, 제가 실수했네요.”
아르테는 대주교가 죽자마자 레온나토스와 합류했다. 이전 삶과 달리, 지금 교국의 대주교 자리는 공석이었다.
레온나토스는, 처음보다는 아렌이 하는 말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아르테가 물었다.
“…멋대로 내 생각을 추측한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뭐. 그럴듯하니 넘어가겠어. 하지만, 곧바로 국경을 넘는다고? 이제 막 국경을 통과하고 추격을 떨쳐낸 참인데? 지금이 가장 삼엄할 때인데 지금 들어간다고?”
“아니, 오히려 반대야. 방금 국경을 넘고 황자와 합류했어.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간다는 정황도 있고. 다시 교국 안으로 들어왔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까?”
라이안은 언제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그건, 아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점할 수 없는 우위다.
하지만 반대로 아렌이 라이안보다 우위인 점도 있었다.
그건 바로 정보였다.
라이안은 아렌에게 과거의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아렌은 라이안에게 기억이 있음을 안다.
즉, 상대의 허를 찌르려면 전에 하지 않았던 선택지만 고르면 된다.
‘시간이 더 흐르면, 라이안이 국경을 봉쇄할 수도 있어.’
아르테의 잠입을 허용하지 않으려면 그 방법 외에는 없었다.
아렌의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도, 더는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아렌 네 뜻이 그러하다면, 하는 수 없지. 아르테 주교 또한 동의한다면 그러도록 해. 낮안개 기사단을 필요한 만큼 데려가도 괜찮아.”
“아뇨, 인원은 적을 수록 좋습니다. 아르테 주교 또한 저희와 동행해야 하니, 위장이 가능한 숫자가 좋겠지요. 최고의 기사 둘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과연.”
‘최고의 기사’라는 말에, 레온나토스의 시선이 더글라스와 발커스에게 향했다.
아렌이 말했다.
“아르테. 교국 안에, 잠시 몸을 의탁할만한 곳은 있어?”
“어, 그야… 나고 자란 수도원이 있긴 한데-”
“아니. 아이기스 수도원은 피하는 게 좋겠어.”
아르테의 제안을, 아렌은 단칼에 잘라냈다.
“…아렌. 내가 그곳 사람인 건 어떻게 알았지?”
“그야, 동맹 맺을 관계니까 우선 조사해봤지. 이상해?”
“내 출신을 조사한다고 나올만한 게 아닐 텐데.”
아르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변명거리가 궁한 아렌이었지만, 비슷한 삶을 두 번이나 살아오면서 는 것은 능청 뿐이었다.
“그럼 우수한 밀정을 썼겠지?”
“…….”
“왜, 도국연합만 우수한 밀정을 가진 줄 알았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르테는 한발 물러섰고, 앞으로의 계획을 전달했으니 이제 실행할 차례였다.
아르테는 병사가 가까운 민가에서 구해온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사제복은, 몸이 가장 가냘픈 레온나토스가 걸치기로 했다.
중앙에 교국의 사제복을 걸친 사람이 있고, 기사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면 아무도 사제복을 둘러쓴 레온나토스를 자세히 볼 수 없다.
아르테와 합류한 레온나토스가 북으로 간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리면, 교국 안에서의 경계도 조금은 잠잠해질 터.
발커스는 방금의 전투로 엉망이 된 갑옷을 벗으며 툴툴댔다.
“나 원 참. 방금 전까지 죽다 살아난 사람을, 기어이 사지로 내모는 겁니까?”
“미안하게는 생각하고 있어요, 발커스. 정 싫다면 말해요. 다른 기사를 부르면 되니까.”
“…궂은 일을 부하에게 시키는 것만큼 볼품없는 짓은 없죠. 이번에는 특별히 봐 드리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 불꽃의 기사죠.”
“…그냥 돌아갈까?”
아렌은 두 대의 마차를 근처 마을에서 구입했다. 여분의 작물을 국경 너머에서 파려는 농부로 위장하는 게 가장 어울렸기 때문이다.
저번 삶처럼 발커스와 더글라스가 한 조, 아렌과 아르테가 한 조였다.
“아르테. 너랑 난 결혼한 사이인 거야. 쑥스러워 대응을 못하는 어린 신랑인 나 대신, 네가 대응하는 거야. 할 수 있겠어?”
“…흐음. 남편 역을 맡길 거면, 뒤에 두 기사 중 한 명이 낫지 않아? 굳이 남편이 너일 필요 있을까?”
“아, 그게 편해? 그럼 그렇게 하고-”
“잠깐, 잠깐! 정말 그러라는 건 아니었어!”
“…너희 나라를 위해 도와주고 있는 거거든? 귀찮게 굴지 말래?”
아렌의 말투는 전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
아르테나 두 기사에게는 자신 있는 척 말했지만, 실은 국경을 넘을 준비가 전보다도 못했다.
결국 검을 숨겨가지도 못했고, 마차 짐칸에 실은 화물의 질과 양도 일천했다.
‘검은, 아마 괜찮을 거야.’
비록 저번엔 산적을 만났지만, 그때는 오랜 혼란으로 교국 안이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지금은 상관없을 것이다.
아렌은 준비를 마쳤고, 레온나토스 역시 아르테의 사제복을 위에 걸친 채 말 위에 올랐다.
“그럼 아렌, 부디 몸조심하도록.”
“네. 전하께 이런 꼴을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돌아와서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 그 죗값을 받기 위해서라도 꼭 살아 돌아오게.”
기사단과 병사들, 레온나토스는 길 하나를 모두 쓰며 요란스레 북으로 떠났다. 그들의 행적은 교국으로 향하는 마차들에 목격되어 금방 소문으로 퍼질 것이다.
“그럼, 우리도 갈까요?”
고삐를 붙잡는 아렌.
길이 교국 국경 관문에 가까워질수록 출입을 기다리는 마차의 줄이 더욱 빽빽해졌다.
결국 머지않아, 아렌의 마차는 길 위에 섰다.
그때, 아르테가 물었다.
“그래서, 어땠어?”
“응? 뭐가?”
“시치미 떼기는. 미래를 봤잖아? 그래서 이번 작전을 세운 것 아냐? 하다못해 궁 안에 잠입한 다음 어쩔 건지 정도는 말해줘야지. 잠입한 다음, 비원궁 안에 있는 라이안은 어쩌고?”
전에는 그가 확인할 수밖에 없는 소문을 내 비원궁 밖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소문을 퍼트려봤자 라이안은 코웃음 칠 것이다. 한 명의 기사단도 없이, 광신병들만 복귀했다는 사실이 없었다면 그 정도 소문으로 라이안을 홀릴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라이안을 움직일 만한 소문이라면 있지.’
그건 다른 이도 아닌, 아렌이기에 비로소 퍼트릴 수 있는 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