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교국과의 국경 근처, 제국 남부에서 서로 맞닥뜨린 흑사자 기사단과 낮안개 기사단이 서로 대치했다.
그 숫자는 서로 열 명 가량으로 엇비슷했지만, 전체적인 힘의 균형은 흑사자 기사단의 소폭 강세였다.
하지만, 흑사자 기사단도 마냥 안심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레온나토스의 병력이 제국 남부까지 마중을 나왔다는 건, 그들이 적극적으로 아르테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신호나 다름없었으니까.
흑사자 기사단은, 낮안개 기사단의 등장이 지금까지의 몇 배는 더 긴장하고 있었다.
“…계획을 바꾼다.”
흑사자 기사단 한 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원래 계획은 아르테를 살려서 교국으로 압송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다른 것을 신경 쓰다가 아르테가 레온나토스 손에 넘어가는 것이 최악의 수였다.
“목표가 죽어도 좋다. 몇 명의 희생이 있어도 좋으니, 절대 저들에게 넘어가지 못하게 해.”
흑사자 기사단의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발커스도 눈치채고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단의 뒤에서, 아르테의 목소리는 불안과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기사님?”
“지금 뒤쪽으로, 원군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북으로 향한다면 그들과 합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만 가나요? 여러분도 같이 가셔야죠!”
“아뇨. 여기서 저들의 발을 묶어 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먼저 가시지요.”
“가십시오.”
“어서!”
기사들의 잇따른 채근에, 아르테는 말 고삐를 고쳐 잡았다.
“…레온나토스 황자의 호의와 그대들의 헌신을 언제까지고 잊지 않겠습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이 있으시군요. 자, 가시죠!”
그때.
흑사자 기사단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단지 그 앞을 막아 세우기만 하면 되는 낮안개 기사단.
당연히 실력도 뛰어나지만, 낮안개 기사단의 명성이 퍼진 건 어떤 상황에서도 명령을 이행하는 의지력과 충성심이었다.
설령 기사단의 돌격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낮안개 기사단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말끼리 충돌하면 양쪽 다 멀쩡하지는 못하니까. 설령 일격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상대의 발을 봉쇄할 수 있다.
기사들은 마음을 다잡았고, 발커스가 모두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이건 아렌 공의 제안이다! 아렌 공의 말대로 하면 대부분 결과가 좋았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점술가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을 각오한 기사들의 용기를 북돋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전속으로 달려오는 흑사자 기사단과, 서행하며 한 명도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낮안개 기사단이 이윽고 충돌했다.
발커스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렌의 제안 결과가 좋았던 것은, 대체로 결과가 좋은 과거의 행적을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제국 남부로 내려온 후부터, 아렌의 말은 더이상 미래를 예견하는 말이 아니었다.
*****
낮안개 기사단의 나머지와 아렌, 레온나토스와 그의 친위병이 남부로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갔다.
열 명의 선발대가 먼저 출발했지만, 레온나토스는 이번 원정에 회의적이었다.
“…아렌. 정말 주교가 제국 국경을 넘을까? 배편을 이용하거나, 교국 내부에 숨어있을 가능성도 있잖아.”
“물론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조금 헛걸음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주교가 국경을 넘었고, 지금 쫓기고 있다면 이번 마중은 천금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렌은 그녀에게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가 서신대로 한다는 보장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 서신을 도중에 가로챘을 수도 있고, 아르테가 서신의 내용을 무시한 채 멋대로 진로를 잡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아렌도 어찌 될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하지만 기왕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한 이상, 조금의 변수라도 더 막기 위해 아렌은 남부로 마중 가는 선택을 했다.
더이상 이전의 선택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아르테와 합류하는 것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레온나토스에게 차고도 남는 명분이 뒤따른다.
그때.
길 앞쪽에서 말에 탄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말 위로 보이는 인영의 선이 가는 것으로 보아, 마주 달려오는 기수는 여자로 보였다.
“…저 사람은?”
“다행히도, 아주 헛걸음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아렌은 바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비록 기억에 있던 머리카락보다 더 짧고, 후줄근한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아트마 교국의 주교, 아르테였다.
레온나토스는 안도하며 말의 속도를 늦추려 했다.
그때, 아렌은 오히려 고삐를 바짝 죄며 더욱 속도를 가했다.
“…아렌? 대체 왜-”
“서두르셔야 합니다!”
레온나토스가 의아해하는 찰나.
맞은 편에서 오던 아르테 또한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아렌과 나란히 달렸다.
“아렌! 지금-”
“추격자는 몇 명이지?”
“10명 남짓! 모두 제국의 기사들이야!”
“칫. 흑사자 기사단인가?! 전하!”
“모두! 속도를 높여라! 어서!”
레온나토스 또한 지금 상황을 파악했다.
레온나토스와 아렌, 낮안개 기사단과 아렌의 무리가 남쪽을 향해 기세좋게 달렸다.
아르테 자체가 그들의 표적인 만큼 그녀의 동행은 말리고 싶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인물인 레온나토스가 동행하는 자리이기에, 차마 그녀의 동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낮안개 기사단의 말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기사가 넷, 움직일 수는 있지만, 부상당해 전력이 못 되는 기사가 셋.
상대적으로 경상인 셋이 나머지를 둘러싸 보호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발커스도 있었다.
“…레온나토스.”
낮안개 기사들을 둘러싼 흑사자 기사단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그들 역시 모두 말 없이 땅 위에 서 있었다.
“레온나토스? 건방지게 황자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나? 뒤에 ‘황자 전하’를 꼬박꼬박 붙여야지.”
굳이 레온나토스가 나설 것도 없었다.
아렌이 나서서 그들의 무례를 지적했다. 그러는 한편, 기사들보다도 높은 시야에서 그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지금 서 있는 흑사자 기사단은 여섯. 그들의 말들 역시 모두 죽거나 다치는 등, 탑승이 여의찮은 듯했다.
사실상, 그들의 발은 보오새된 것이나 마찬가지.
비록 교전에서는 흑사자 기사단이 이겼을지 모르지만, 서로의 목적이 각각 돌파와 저지였던 만큼, 임무를 달성한 건 낮안개 기사단이었다.
그대로 조용히 물러나 있어도 되었겠지만, 레온나토스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러나 있던 레온나토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멈춰라. 더이상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 자비롭게 대할테니, 그만 검을 놓도록.”
“…….”
“내 말은 허언도, 겁박도 아니다. 그저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이대로 검을 놓지 않는다면, 목숨을 부지치 못할 것이다.”
지치고 군마조차 잃은 흑사자 기사들이, 30명이나 되는 무장한 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이윽고, 흑사자 기사단 한 명이 물었다.
“정말, 검만 놓으면 되는 건가?”
“물론이다. 나 레온나토스는 거짓을 담보하지 않아.”
“…과연, 소문대로인 모양이군. 그러면 원하는 대로, 검을 손에서 놓아주지.”
하지만, 그가 한 말은 항복의 의미는 아니었다.
말을 마친 흑사자 기사는, 각오를 마친 듯 기마한 낮안개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발이 땅에 닿아있는 만큼, 말 위의 기사보다 훨씬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흑사자 기사의 이점은 그것 뿐.
레온나토스를 지키던 낮안개 기사는 말을 옆으로 돌린 채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려칠 뿐이었다.
땅에 선 기사보다 아득히 높은 위치에서 떨어지는 검의 참격은, 약간의 실력차와 임기응변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흑사자 기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참격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임무에 실패한 채 돌아가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렌의 오산이었다.
덤벼든 기사 외, 나머지 다섯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단숨에 달려들 만큼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근처에 벨 것도 없다.
물론, 기사들은 베지 않았다.
기사들은 검을 휘두르는 와중 손을 놓았고, 던져진 검은 완만하게 회전하며 일제히 아르테를 향해 날아갔다.
허를 찌른 수였다.
그 자리에 더글라스만 없었다면, 흑사자 기사단의 마지막 수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만큼 더글라스는 레온나토스와 아르테 사이를 지키고 있었고, 흑사자 기사들이 검을 날렸을 때도 반사적으로 검을 뻗었다.
힘으로 검을 쳤다면 검의 무게와 속도, 즉 관성에 이기지 못했겠지만, 더글라스는 다른 쪽을 택했다.
검은 종으로 회전하면서 날아왔고, 더글라스는 그 회전에 거스르지 않았다.
정면으로 힘을 받는 것을 최대한 피하면서, 조금씩 궤도만 트는 방법을 택한 것.
아르테를 향해 날아오던 검은 그 힘의 방향이 위나 아래로 바뀌었고, 거세게 바닥에 곤두박질치거나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순간 극도로 집중한 더글라스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검을 이만큼 안정된 궤적으로 던지다니. 흑사자 기사단은 저런 훈련도 받는 건가?”
기사가 스스로 검을 놓는다는 건, 사실상 자결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훈련을 전문적으로 한다는 건, 이들 또한 임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검을 막은 더글라스도 놀랐지만, 마지막 수법으로 검을 던진 기사들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한 명이 검을 들고 달려들어,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후였기에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말도, 갑옷도, 이제는 검마저도 없는 기사들은 체념한 듯 적의를 지웠다.
“…죽여라.”
“아니. 검조차 없는 자를 죽일 수는 없지. 죽고 싶다면 알아서 자결하도록. 어차피 그것도 말리겠지만.”
“…….”
아렌은 기사들을 시켜 그들을 구속했다.
레온나토스는 이미 숨이 끊어진 낮안개 기사단에 잠시 고개를 숙인 다음에야 아르테를 돌아봤다.
“어수선한 와중이라, 소개가 늦은 것을 사죄드립니다, 아르테 주교.”
“인사는 제가 해야겠지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레온나토스 전하.”
“실은 전, 주교에 대해 아는 것이 적습니다. 하지만 교국에서 라이안 형님의 행동이 정의롭지 못한 것을 알기에,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 뿐이죠. 당신이 그럴만한 인물이었으면 하군요.”
입바른 말만 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을 아르테는 많이 봐왔다.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그중에서도 드문, 겉과 속이 같은 인물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르테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