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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201화 (201/227)

#201화

말을 몰아 어둠 속을 달리는 아르테는, 긴 백발을 단검으로 아무렇게나 잘라내, 가도 중턱을 밝히는 화톳불에 던져 넣었다.

가능하면 눈에 띄는 백발도 염색하고 싶었지만, 도주중에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다.

‘하다못해, 국경이라도 넘는다면-’

아렌의 서신은, 제국 동부가 아닌 북부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아르테는 그 말에 따를 작정이었지만, 제국 동부로 가든 북부로 가든 우선 교국의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는 변함이 없었다.

그 말은 곧, 비원궁에서 보낸 추격자 역시 교국의 국경 관문으로 곧바로 올 거라는 말이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고, 사제복을 입은 여자 혼자 국경을 넘는 상황이 처음인 경비는 조금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은?”

“전 아이기스 수도원의 수사인 오르트입니다. 수도원장님의 명을 받고 제국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아이기스 수도원? 아주 멀리서 오셨군!”

“급한 용건입니다. 빨리 지나갈 수 있습니까?”

“아, 그래. 물론이지.”

경비가 성벽 위로 손짓했고, 밤중이라 내려가 있던 관문 벽이 서서히 올라갔다.

교국은 폐쇄적인 국가지만, 교국을 나갈 때 받는 검사는 들어올 때보다 한층 여유 있었다.

교국 안에는 국외로 빼돌릴만한 것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교국을 나가고 싶은 사람은 흔쾌히 내보내 주는 것이 교국 안의 여론을 하나로 하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괜찮아 경비는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어.’

열린 관문을 통과한 아르테는 늦은 밤이라 아무도 없는 길을 더욱 재촉해 달렸다.

5분은 지났을까.

아르테는 문득 뒤돌아봤다.

방금 전 지나온 관문 근처에는, 대량의 횃불들이 모여있었다.

“…이거, 긴 술래잡기가 되겠네.”

아르테는 말 고삐를 더욱 옥죄었다.

*****

제국의 제4 황자 가웨인은, 도국 연합의 유력도시 중 하나인 헬데움에 머무르고 있었다.

현재 시장을 배출한 가문 메렌치 가의 딸, 세밀은 제국으로부터 온 서신을 받고 황당해했다.

‘…가웨인이, 레온나토스를 지지하도록 회유해달라고? 제정신인가?’

지금 라이안과 레온나토스에 밀려서 그렇지, 가웨인 또한 훌륭한 황제 후보였다.

지금도 황태자 선정 시험을 위해 도국을 방문해 있고, 타고난 승부욕도 있어 순순히 남의 밑에 들어갈 만한 자가 아니다.

비록 서신의 내용은 터무니없었지만, 서신을 보낸 사람을 생각하면 마냥 일축할 수만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렌이 보낸 서신이야.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도시국가 카르도나에서도, 아렌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이전 삶보다 훨씬 당당한 태도로 학생들을 대했고, 레데와의 전쟁 막바지쯤에는 사실상 카르도나의 정신적 지주에 가까웠다.

세밀 메렌치 또한 모든 것을 다 겪어본 듯한 아렌의 태도에 더욱 감화되었기에, 아렌이 시킨 일이라면 설령 미심쩍더라도 그대로 행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세밀 메렌치는 메렌치 저택의 응접실에 앉은 가웨인에게 다가갔다.

“전하. 도국 안에서의 생활은 어떠신지요.”

“아, 세밀 메렌치 양이군. 귀 가문의 호의 덕에, 이렇게 타지에서도 제 집처럼 있을 수 있군. 감사할 따름이야.”

“무슨 말씀을요. 제국의 귀인께서 오셨는데, 이 정도 대접조차 않으면 세상이 저흴 흉볼 겁니다.”

가웨인이 황제로부터 받은 임무는 간단했다.

자신의 힘으로, 각 도시국가들의 지지 선언을 받아낼 것.

하지만 도국 연합의 강력한 구심점인 두 국가, 헬데움과 카르도나는 이미 도움을 줬던 아렌이 섬기는 레온나토스 측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두 도국을 견제하는 다른 도국의 힘을 모아도 되었겠지만, 여태껏 황제라는 한가지 목표만을 위해 달려갔던 가웨인에게, 여러 도국의 순방은 또 다른 가능성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빈말이 아닐세. 제국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만 없다면, 이리도 홀가분할 수 있는데 말야.”

“…하지만, 뛰어난 자는 외로우면서도 괴로운 법이죠. 다른 이에게 없는 능력을 타고난 자에게는, 타고나지 못한 자를 위해 그 힘을 쓸 의무가 있습니다.”

세밀은 슬쩍 가웨인의 속내를 떠봤다.

“그 말도 일리는 있군. 하나, 굳이 내가 아니라도 제국은 잘 돌아갈 거야. 운이 좋으면 숙청되지 않을지도 모르고.”

가웨인보다도 유력한 후보는 제1 황자 라이안과,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뿐이었다.

세밀은 슬그머니 물었다.

“만약 그 운을, 운이 아니게 할 수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운이 아니게 한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건 외람된 추측이지만, 전하 외의 후보가 결정된다면 필시 라이안 황자, 그리고 레온나토스 황자겠지요. 레온나토스 황자가 황위에 오른다면 결코 숙청을 하지 않을 테고요”

“…그 물러빠진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가웨인은 세밀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핵심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결국, 나더러 레온나토스 녀석에 힘을 보태라, 그런 말인가?”

“…그렇게 들리셨나요?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레온나토스의 지시인가?”

“…….”

세밀은 가웨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가웨인은 지금까지의 어딘가 초연한 태도를 버리고 담담하게, 하지만 집요하게 세밀의 눈을 바라봤다.

세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느물느물 웃으며 얼버무릴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세밀은 허리를 곧추세운 다음,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게 요청한 건, 레온나토스 황자가 아닙니다.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는 제 입장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알만해, 이번에도 또 아렌 녀석이겠군.”

“…….”

세밀은 침묵했다.

가웨인은 황궁 안에서도 아렌의 능력을 높이 산 인물 중 한 명이었지만, 그만큼 경계하기도 했다.

비록 세밀이 아렌을 밀고하지는 않았지만, 거기까지 인도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제 남은 건 가웨인의 판단 뿐이었다.

“…사실 최근, 내가 정말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 의구심이 들더군. 정말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

“그 자식의 의도대로 되어준다는 게 심히 심사 뒤틀리는 짓이지만, 확실히 차선책이 되어줄만은 하지. 최악만은 면할테니.”

가웨인에게 최선의 수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여태껏 한번도 자신을 떠난 적 없던 황제의 마음조차, 이번에 받은 임무로 미뤄보면 이미 자신을 떠났다.

‘…그럴 만 하지. 아버지께서 날 예뻐하신 건, 독주하는 라이안 형님을 막을 만한 유일한 대항마였기 때문이니.’

라이안이라는 걸출한 황자가 있으면서도, 황제는 계속 그 대항마를 찾았다.

경쟁이야말로 좋은 황제를 뽑는 출구이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황자 라이안을, 브륀할트 8세는 은연중에 경계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유일한 대항마가 아니지. 훨씬 그럴듯한 대항마가 등장했으니 마음이 움직이실 만 해.’

아주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다.

가웨인에게 최악의 수라면, 라이안이 황제가 된 다음 자신은 숙청당하는 것. 가웨인이 가진 힘의 규모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미래였다.

차선의 수는, 레온나토스가 황제가 되는 것. 레온나토스는 숙청도 벌이지 않을 테고, 국정도 그럭저럭 잘 운영할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가웨인은 혼자서 마음을 바짝 졸이고 있는 세밀에게 물었다.

“응하겠네.”

“…네?”

“자네의 제안에 응하겠다고 했네. 내가 뭘 하면 되겠나?”

뜻밖의 대답에 세밀은 잠시 멍하게 있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레온나토스와 가웨인이 손을 잡은 시점에서, 어떻게 헬데움이 더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그녀의 두뇌는 이내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

국경을 넘어서도, 아르테의 도주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됐다.

이따금씩 발자국을 속여보기도 하고, 길이 아닌 경로로 틀어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런 수를 쓸 수록 추격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제는, 저 멀리 있는 추격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리를 허용해버렸다.

‘…신경을 안 쓴 게 아닌데. 이토록 차이가 날 줄이야.’

미리 준비해둔 말은 특별히 발이 빠른 준마였고, 기수인 자신은 기사에 비해 가볍기까지 했다.

웬만큼 능숙한 추격이라도 적어도 속도에서 밀리지는 않을 거라 봤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준은 교국의 병사였다.

경장으로 달리는 흑사자 기사단은, 아르테의 추측을 상회하는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잡히겠어.’

누구라도 그 끝을 예상할 수 있는 추격전은, 어느덧 서로의 얼굴을 확실히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좁혀졌다.

‘이대로 잡힐 바에, 차라리.’

아르테가 코앞으로 다가온 결말을 조용히 각오하는 동안.

아르테를 추격하는 자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주시했다.

아르테의 맞은 편에서, 마찬가지로 경장 차림을 한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아아아!”

캉!

아르테를 그대로 스쳐 지나간 기사는, 곧바로 흑사자 기사단과 칼을 맞부딪쳤다.

겁도 없이 달려온 기사는,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검을 맞댄 흑사자 기사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 경?!”

“감히 기사된 자가, 이토록 아리따운 아가씨를 핍박하면 쓰나.”

흑사자 기사단은 한명 한명이 손에 꼽히는 고수들 뿐이었고, 제국 최정예라 할만한 낮안개 기사단과 비교해도 약 우세에 있었다.

하지만 발커스는, 그런 낮안개 기사단에서도 가장 강한 자.

거기에 최근에 얻은 별호와 함께 이름을 떨치는 중이기도 했다.

“…최근에 이상한 소문을 들었지. 불꽃의 기사라고 불린다는데, 사실이오?”

“…그다지 달갑지는 않지만.”

발커스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 살아있는 혹한을 잠재웠다는 소문은 교국에까지 퍼져 있었다.

발커스는 부끄러움 반, 자부심 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게 나다.”

그와 동시에, 속속 도착하는 낮안개 기사단.

아르테는 이미 기사들 뒤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싸우더라도, 대열을 갖춘 뒤 제대로.

흑사자 기사단원과 무언의 합의를 한 발커스는, 맞댄 칼을 물린 채 뒤쪽으로 물러났다.

발커스는 아르테에게 소곤거렸다.

“…주교가 보낸 밀정입니까? 그러고 보니, 구면인 것도 같군요. 황궁에서 봤습니까? 제가 이런 미인의 얼굴을 잊을 리 없는데-”

“제가, 주교 아르테입니다.”

“…….”

“절 도와주신 제국의 호의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 경.”

감히 옆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정면의 흑사자 기사단만 바라보는 발커스는 짧게 중얼거렸다.

“제가, 이런 결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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