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얼마 전.
아르테는 제국의 황궁에 남겨뒀던 밀정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협력관계가 된 아렌과 긴밀한 협력을 취하기 위해 남겨둔 밀정이었지만, 그 뒤로 아렌이 자꾸만 외유를 떠나는 바람에 밀정의 역할은 유명무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밀정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북부로 향할 것.]
“…북부? 동부가 아니라? 아니 그보다….”
아렌이 서신에 적은 ‘무슨 일’이 무엇인지, 아르테는 그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여러모로 수수께끼 같은 내용이었지만, 아르테는 그 서신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도 용하다고 인정받는 점술가면서, 아르테가 만나본 첫 번째 운명석 계약자이기 때문이다.
아르테는 나름의 대비를 해뒀고, 비원궁 전역에 나름대로 감시를 붙여둔 것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늦은 밤,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단잠이 깨졌으면서도 아르테가 당황하지 않은 것도, 마음의 준비가 이미 끝나있었기 때문이다.
‘…아렌이 말한 ‘무슨 일’은, 이걸 말하는 거였나? 그럴 거면 차라리 대주교님께도 경고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르테는 서둘러 미리 준비해둔 짐을 챙겼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사실 자신의 바람이야말로, 그저 욕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르테는 대주교에게 입은 은혜도 있어, 그를 제쳐서라도 대주교가 되고픈 생각따위는 없었다. 언젠가 되고 싶은 야망은 있었지만,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오를 자리라 생각했기에 조바심도 없었다.
하지만 아렌에게는, 기존의 대주교보다 아르테가 한시라도 빨리 대주교 자리에 오르는 것이 훨씬 유리할 터.
‘…만약 반대 상황이었으면 나도 아렌처럼 행동했겠지.’
아렌이 지목한 방향은, 북부.
처음 서신을 받았을 때는 당황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아르테와 협력관계인 아렌은 북부에 있다.
아렌과 아르테 사이의 관계를 짐작한 자들이라면, 당연히 아르테의 도주경로 또한 북으로 잡을 터.
얼핏 아르테의 머릿속에 동쪽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렌의 서신이 아니었다면, 아르테는 자신의 진로를 제국 동부로 잡았을 것이다.
‘동부로 간 테오드릭 황자도, 아렌과 연이 닿아있으니까.’
하지만 아렌은 일부러 아르테에게 서신을 남겼다. 분명 그 이유가 있을 터.
아르테는 본인의 판단보다도, 아렌이 남긴 경고를 더욱 믿었다.
아르테는 소식을 전해준 시동에게 물었다.
“지금 정문의 경비는?”
“…뤼예 주교의 파벌이니, 로이터 주교의 입김이 들어가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을 끌수록 봉쇄당할 가능성이 높겠지. 다행히,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거야.”
정문은 미리 봉쇄할 수 없다. 라이안 황자의 위병으로 정문을 막아 세웠다간, 곧바로 소요사태가 일어난다.
음모를 꾸민 측에서도 아르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선, 먼저 대주교를 죽인 뒤 모든 것을 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르테가 이렇게 기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은, 도리어 그들의 누명에 기름을 붓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수하기로 한다.
아르테는 곧바로 비원궁의 정문을 향했다.
“아르테 주교님?”
“잠시 용건이 있어, 궁을 나가려 합니다. 물론 보내주시겠죠?”
“그야 물론입니다.”
아르테가 정문을 통과하고 잠시 뒤.
등 뒤가 소란스러웠지만, 아르테는 무시하고 풍랑이 치는 줄다리를 위태롭게 건넜다.
근처의 마방에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말을 준비시켜뒀다.
‘우선은, 북부로-’
*****
라이안은 조금 늦게 비원궁의 정문에 도착했다.
“아르테는?”
“…저희가 왔을 때, 이미 아르테는 정문을 통과한 뒤였습니다. 위병들이 보내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결국-”
라이안은 비원궁의 정문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입구를 지키고 있었을 위병 두 명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저항이 꽤 거세었던지 흑사자 기사단 한 명도 중상을 입었지만, 덕분에 아르테의 모습은 이미 어둠 속에 묻혀 찾기 쉽지 않았다.
“신성한 비원궁에서, 이따위 패악질을 부리다니!”
뒤늦게 달려온 비원궁의 위병들이 라이안과 흑사자 기사단을 둘러쌌다.
제아무리 흑사자 기사단이라도, 비원궁 안의 모든 승병들이 달려들면 무사할 수 없다.
하지만.
“대체 무슨 소란이냐.”
목소리의 주인과 함께, 또 다른 승병들이 라이안 황자를 지원하고 나섰다.
비원궁 안 위병의 절반은, 라이안과 손잡은 로이터 주교가 데리고 있는 위병들이었다.
포위망의 절반은 로이터 주교의 병사들이 맡았고, 라이안을 둘러싼 힘의 형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한층 여유로운 태도로, 라이안은 미리 설정해둔 내용을 읊었다.
“비원궁 안에서 피를 본 것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대주교 성하를 시해했다는 혐의가 있는 아르테 주교를 이들이 그냥 보내줬다고 합니다. 몰랐으니 단순한 실수로 넘어갈 수도 있으나, 이들은 아르테를 추격하려던 제 부하마저 막아 세웠다고 합니다. 방관을 넘어, 그들도 한통속이었다는 증거죠.”
“…아르테 주교가, 대주교님을?!”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입구에 모인 사제들은 라이안의 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거기서, 로이터 주교가 라이안의 말을 지원하고 나섰다.
“글쎄. 대주교 님의 살해당하자 마자, 누구보다 기민하게 비원궁을 빠져나갔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범인이라는 증거 아닌가?”
“하지만-”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황급히 비원궁을 빠져나간 아르테보다도, 라이안과 그를 두둔하는 로이터 주교가 더욱 의심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에겐 그 주장을 밀고 나갈 명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이 자리의 힘의 균형은 명백히 저들에게 쏠려 있었다.
“…….”
정문에 모인 신도들은 일제히 입을 닫았고, 라이안은 정문 앞에 쓰러진 위병의 시체를 발로 치우며 말했다.
“그럼, 어서 추격을 보내겠습니다. 교국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기꺼이 힘을 빌려드리지요. 죄목은, 대주교 성하의 암살. 목표는 비원궁의 전 주교 아르테, 라고 하면 되겠지요.”
이견은 받지 않았다.
곧 날랜 라이안의 부하들이 성문을 통과했고, 곧바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믿음직한 부하들이었지만,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라이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마도 놓치겠지.’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르테는 훨씬 이전부터 이런 사태를 대비했던 모양이다.
라이안은 이전 삶과 비슷한 수준의 대비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도리어 그 인식의 허점으로 인해 아르테가 도망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이번에는 제국 동부로 추격을 보낼 테니, 조만간 잡힐 거야. 아주 조금 뒤로 늦춰졌을 뿐이야.’
70번도 넘게 같은 삶을 반복해온 라이안에게, 매번 같은 삶을 사는 것도 이제는 고역이었다.
원하는 삶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자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삶을 수 년동안 연기하며 사는 것도 고역이다. 자결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런데, 분명 전과 같은 삶을 살았을 텐데. 어느 부분에서 틀어진 거지?’
아르테가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다른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했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않는 라이안이었다.
*****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를 쓰러뜨린 공로를 설명하기 위해,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제국의 천년궁에 와 있었다.
“아렌, 소식 들었나?”
“네, 전하. 교국에서 일이 벌어진 모양이더군요. 대주교가 사라지고, 그 살해혐의를 다른 주교가 받고 있다고요.”
“…역시, 라이안 형님이 관여되어있겠지?”
“네. 그렇게 보는 게 자연스럽죠.”
여기까지 흘러가는 흐름은, 아렌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다음부터는 장담하지 못했다.
‘라이안은 다시 한번 아르테를 놓칠까? 아니면, 이번에는 잡아들이나?’
라이안은 그동안 이전 삶과 똑같은 선택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아렌은, 아르테를 잡는 상황을 분기점으로 봤다.
실제로 아르테가 합류한 이후부터는, 마땅히 라이안이 개입할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괜히 레온나토스와 합류시켜 제국에 균열을 만드느니, 사전에 아르테를 붙잡아 미연에 방지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니, 동부는 위험해. 라이안도 아르테의 실제 경로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오히려 허를 찔러 북으로 향하게 하는 게 나아.’
라이안이 원래 역사와 다르게 움직이면, 아렌 역시 이전 삶과 다르게 움직일 근거가 된다.
“…전하. 만약 라이안 황자가 교국에서 움직였다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글쎄. 애매하군. 라이안 형님을 방치해 교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위력을 행사해 제국 안에 분열을 일으킬 수도 없으니.”
“네. 둘 다 썩 맘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죠. 하지만 라이안 황자는 움직였습니다. 이제 선택은 전하의 몫입니다.”
“…….”
아렌은 교묘하게 말했다. 시작은 네 황자 사이의 경쟁이지만, 테오드릭과 가웨인은 일부러 배제했다.
먼젓번 삶의 기억이 있기에, 테오드릭과 가웨인, 둘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내기도 했다.
‘-그렇지.’
만약 라이안이 이전과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렌 역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두 번째 삶에서의 가웨인은, 사실상 황권 경쟁을 포기한 듯했다.
‘황권 경쟁을 포기했다면, 레온나토스를 지원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무기력한 제3 세력으로 남기에는, 가웨인의 세력은 너무 크고 강했다.
‘교국으로 서신을 보내면, 세밀과 듀란이 힘써줄 수 있을까?’
아렌이 조금 다른 것을 생각하는 동안, 레온나토스는 생각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형님이 교국에 개입했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 서령 제국의 국익에 반하는 일이 있더라도, 난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 나서겠어.”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전하.”
여기까지는 상정 범위 내.
아렌은 한 발짝 더 나갔다.
“그런데 마침, 교국에서 누명을 쓰고 도주중인 주교가 제국으로 향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 보고가 있었나? 난 못 들어봤는데.”
“아니, 그런 보고는 없었습니다. 단지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입니다.”
“…….”
아렌의 ‘출처 모를 정보’는 지금까지 항상 들어맞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점괘를 본 것이라 지레짐작할 뿐.
‘누명을 쓰고 도망중인 주교’에 대해 듣자, 레온나토스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마중 나가야겠지?”
“네. 따지자면 제국의 내부사정에 휘말린 피해자이지요. 같은 제국의 사람이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순리겠지요.”
아렌은 고개를 숙였다.
이전과 다른 선택을 고르게 되어 기쁜 건, 라이안 황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