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99화 (199/227)

#199화

‘…내가 빈 소원이라.’

하지만, 아렌에겐 이미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그때는 반지가 운명석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소원을 빌었다면 무의식중에 빌었을 터.

말 그대로, 무의식중에 빈 소원을 아렌이 알 수는 없다.

‘-그나마 가능성 있다면.’

목이 잘리기 직전, 아렌은 형장에서 한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잠깐만. 내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소. 조금만 더 시간을-]

‘…시간을 더 달라?’

그 말이, 그나마 가장 소원다운 말이었다.

‘…시간을 벌었다? 모든 걸 다 설명하기 위해? 하지만-’

과거로 몇 번이고 되돌아가면서 여태껏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첫 번째 삶의 아렌은 이미 죽은 뒤였다.

아렌이 무의식중에 빈 소원이 설령 맞다 해도, 몇 번이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삶을 원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아렌은 안심할 수 없었다.

‘…운명석과의 계약이, 모두 계약자 뜻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

아티스의 왕자, 그리고 비 나그네는 자신이 원해서 그런 능력을 얻은 게 아닐 테니까.

“뭐야, 뭔가 짐작 가는 것조차 없나 보지?”

“…그렇네요.”

“한심하긴, 자네 말대로 정말 과거로 되돌아왔다면, 뭘 위한 것인지조차 모른단 말인가? 그동안은 뭘 한 건가?”

“어르신께선 잘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오면 돌아온 만큼의 고충이 있다고요.”

과거로 되돌아오고 6년, 그 뒤 같은 삶을 한 번 더 살아서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기는 시간을 보낸 아렌이지만, 첫 번째 회귀를 했을 때 벌써 아렌이 알고 있던 과거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자네가 여기 찾아온 건, 결국 그게 궁금해서 온 것 아닌가?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진지, 자신도 모르는 답을 구해서 말일세.”

“…네. 맞아요. 어르신께 거짓말은 못하겠군요.”

“하지만, 이쯤 되면 여기선 그 답을 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겠지?”

“네, 그것도 이제는 알겠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죠.”

주술사 노파는 앞에 놓인 찻잔을 홀짝였다.

아무리 실내라도 눈을 파 내려간 방 안은 어떤 난방장치도 없었고, 귀한 땔감으로 데운 찻잔은 거의 식어 있었다.

“후후, 기껏 시간을 흘려보내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시간을 거스르는 사람이라. 그게 사실이라면, 과연 축복일지 저주일지 모르겠군.”

“네, 그러게요.”

“여태까지 이전 삶과 비슷한 길만 걸어왔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도 얼추 비슷하겠군.”

“네, 그렇게 되겠죠. 지금 꽤나 달라졌지만요.”

“하지만, 아무리 미래를 안다고 해도 자네의 대응 역시 비슷하겠지? 설령, 절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말야.”

“…다행히도, 그런 경우는 몇 번 없었어요. 그리고 이제 곧 끝나죠.”

“그것참, 스스로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 가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아렌으로선, 주술사의 말이 단순한 비유로만 들리지 않았다.

*****

아렌은 시간을 조금 더 흘려보냈다.

협곡의 공사는 점점 더 진행되었고, 어느덧 레온나토스의 설원의 온천지대에 대한 소식이 흘러 들어갔다.

그곳에 눈의 사생아라 불리는, 소외된 유랑족들이 흘러 들어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아렌은 제이드를 앞에 두고도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스스로의 손으로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 제이드를 남으로 내려보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던 유랑족 소년 제이드는, 제국 북부에서 비로서 힘을 각성해 수많은 제국민을 죽인다.

‘…한번 각오한 일이야. 어차피 마음먹은 것, 후회하지 마.’

아렌은 뒤늦게 깨달은 척, 발커스와 함께 왕의 가도를 빙 둘러 앞서가 제이드를 죽였다.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제이드를 포섭했다면 누구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었을 거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운명의 산을 탐험하기에는 최적의 능력이었으니까.

제이드가 가진 능력은, 단지 ‘얼어죽고 싶지 않다’는 소원에 비해 너무도 강하고 흉포했다.

사실 제이드의 능력이 인도하는 건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었다고 아렌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걸 얻는 미래는 없는 법이지.’

지금 라이안이 하는 일이 그랬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미래, 하다못해 최대한의 다수가 수긍할만한 미래를 찾기 위해 수십 번은 더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모두를 위한 이타심일 수도 있었지만, 라이안 황자의 행위에는 한가지 행동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이딴 여정은 원하지 않았어, 라이안.’

아무리 그 행동에 선의가 깃들어 있다 해도, 상대의 의사를 묻지 않은 이상 그것은 그저 독단일 뿐이다.

다른 이들은 시간이 돌아갔다는 사실조차 모르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아렌은 다르다.

아렌에겐, 라이안의 일방적 호의를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헉, 헉!”

아렌이 일러준 대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제이드를 죽인 발커스.

살인적인 추위를 피하고자 스스로 불을 붙인 옷은, 제이드가 벗어던지자마자 서릿발이 낀 땅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세상에! 정말 성공하다니! 몸에 불을 붙인다고 했을 때만 해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거 봐요. 생각보다 잘 되죠?”

“…아렌 공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마치 예전에도 같은 짓을 해본 사람처럼.”

“그거, 지금 나한테 묻는 거에요?”

“…하긴, 멍청한 질문이었군요.”

아렌이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의심을 살 만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아렌이 저명한 점술가라는 점 때문에 모든 의혹은 허탈할 만큼 쉽게 해소된다.

언뜻 이치에 맞지 않는 정확한 조언도, 아렌이 한 말이라면 모두들 수긍하고 넘어갔으니까.

“축하해요, 불꽃의 기사.”

“…불꽃의 기사? 뭡니까, 그 촌스러운 별명은?”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곧 그렇게 불리게 될 테니까.”

“제가요? 설마. 사람들의 감각이 그렇게 촌티 날 리 없어요.”

“…….”

“설령 그렇다 해도, 제가 기를 쓰고 반대할 겁니다.”

“그럼 내기할까요? 그렇게 불리는지 아닌지.”

아렌은 느물느물하게 웃었고.

“…아니, 관두죠.”

발커스는 여전히 불타고 있는 자신의 옷에 모래를 끼얹으며 말했다.

*****

제국의 첫 번째 황자, 라이안이 임무를 받은 교국의 심장부, 비원궁.

라이안의 참모는 북쪽에서 온 전갈을 라이안에게 고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제국에서, 큰 재앙이 일어났다더군요. 전하께서는-”

“들었네. 세상이 뒤숭숭하니 별일이 다 있군. 그걸 해결한 것도, 레온나토스라는 모양이고.”

“…레온나토스 황자의 기세가 상정한 것보다도 매섭습니다.”

“상정한 것보다? 그건 아니야. 내가 상정한 것 만큼이네.”

“…솔직히 전에는 왜 그렇게 과민반응하시나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만, 역시 전하십니다.”

“-흠.”

참모의 대답에, 라이안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전하?”

“혹시 그 외에, 내게 할 말은 없나?”

“할 말이라 함은-”

“가령, 내가 교국에 들어오고 나서 예전 같지 않다거나, 그런 것 말이다.”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제국이든 교국 안이든, 여전히 전하십니다.”

“…그렇겠지.”

바로 전 회차에서의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그럴 수밖에, 전 회차에서 교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조리 라이안이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반면 지금은, 이전 회차의 선택을 ‘완전히’라 해도 좋을 만큼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오히려 너무 똑같았기에, 총관의 태도가 이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졌지만.

‘…비원궁을 나가고 들어올 때, 총관을 죽여야 하나? 만약 그렇다면 구실을 뭐로 해야 좋을까.’

되도록 이번 삶과 저번 삶을 유사하게 이끌어보고 싶다, 그게 이번 삶을 사는 라이안의 목표였다.

그리고, 이전 삶과 달라지는 분기점은 이제 곧 찾아온다.

이번 삶의 분기점은, 아르테를 놓치지 않는 것.

“…준비는 다 되었겠지?”

“네, 물론입니다. 가장 먼저 입구를 막고, 한 명의 탈출자도 허용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겠지. 자, 시간이다.”

잠시 뒤, 복면을 쓴 흑사자 기사단이 교국의 대주교를 와류가 휘몰아치는 창문 아래로 밀었다.

대주교 주변에는 항상 호위가 따라붙었지만, 어째서인지 모두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마침 그 날 근무는, 모두 로이터 주교 파벌의 위병이었다.

라이안은 빠른 걸음으로 어수선한 비원궁 복도를 거닐었다.

아직 대주교의 변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세등등한 라이안과 로이터 주교의 병력만으로 지금이 이상상황이라는 것은 알고도 남았다.

‘이번엔,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아르테의 처소에 도착한 라이안은, 이전처럼 기별조차 보내지 않고 곧바로 문을 박차고 열었다.

아르테의 방문을 지키던 위병 한 둘 정도는, 흑사자 기사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아르테는?”

원래라면 지금쯤, 아르테는 실시간으로 사태를 파악하며 방문 앞을 의연히 나왔어야 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요녀이니,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라이안이 한발 늦었다.

“…아르테 주교가 없습니다!”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녀는, 이미 몸을 피한 다음이었다.

마치 지금의 변고를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의 속마음을 읽은 건가? 이번 일을 계획한 자들은 최대한 문밖을 나서지 말라고 일러뒀건만.’

최대한 아르테를 피하라고 해도, 그녀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닿는지조차 라이안은 알지 못한다.

이전의 경험으로 그 거리는 그리 길지 않다고 봤지만, 확언할 수는 없는 일.

옆에서 총관이 초조한 듯 중얼거렸다.

“…혹시, 아렌 그자가 한 짓은-”

“아니, 그 놈은 아닐 거다.”

한때 아렌은 라이안에게도 주의할 인물이었고, 저번 삶의 마지막에는 라이안의 비밀까지도 알아낸 자였다.

그 통찰력은 높이 살 만 하다.

하지만, 라이안은 죽음으로 다시 시간을 되돌렸고, 아렌이 기껏 밝혀낸 비밀도 덮어 씌워진 과거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놈은 제법 용해 보이긴 한다만, 단지 그것뿐이야.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점괘일 뿐이다.”

아렌의 행동거지는 저번 삶과 거의 같았기에, 아렌에 대한 라이안의 평가 또한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통찰력은 제법 뛰어난 것 같다만. 그 뿐이다. 내 행동이 예전과 같으니, 네가 할 행동 또한 예전과 같을 뿐이야.’

라이안은 언제고 행동을 다르게 할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을 뿐.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이번 삶의 분기점은, 바로 아르테를 아렌과 합류시키지 않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다.

“지금 비원궁 정문을 막아봤자 소용없을 거다. 추격을 보내라. 지금 바로.”

“네!”

“교국 국경 안을 이 잡듯 뒤져. 그리고, 소수는 제국으로도 보내라. 제국 동부로.”

“…동부요? 북부가 아니라요?”

“그래. 동부다. 그녀는 이쪽의 허를 찔러, 제국 동부로 향했겠지.”

총관이나 부하를 설득할 근거따윈 없다. 하지만, 라이안은 그녀가 제국 동부로 향하리라고 확신했다.

‘자, 이번엔 어떻게 되는지 볼까?’

드디어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된 라이안의 눈은, 지금까지와 달리 생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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