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레온나토스와 아렌, 기사들은 설원을 걸었다.
그 주위로 무장한 유랑족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지만, 가장 위협을 느껴야 할 레온나토스는 오히려 가장 태연했다.
레온나토스가 사야에게 물었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나?”
“그래. 주술사 할멈 말은 여태껏 틀린 적이 없거든.”
“…그래? 하긴, 세상에 아렌 같은 사람이 더 없으리라는 법도 없으니.”
“…….”
아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와의 동행은 아렌에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레온나토스가 여기에 동행할 마땅한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렌은 큰맘 먹고 레온나토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하. 왜 굳이 따라오셔서 부담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감수하는 겁니까?”
호위로 붙은 다섯 명의 기사는, 유랑족으로 둘러싸인 설원 한복판에선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레온나토스의 안위를 위해선 황자만이라도 돌려보내는 것이 정답이었지만, 레온나토스는 평소 답지 않게 고집을 부려 아렌의 초대에 따라붙었다.
“글쎄. 유랑족 소녀는 누구를 특정하지 않고 모여있는 전부를 말했지. 아예 초대를 거절한다면 모를까, 한두 명만 벗어난다면 그것도 예의에 어긋나지.”
“하지만-”
“무엇보다,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일 거라 확신하네만. 그게 아니면 아렌, 자네는 위험한 곳에 스스로 발을 들이미는 사람이었나?”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응? 저들의 초대에 응해도 위험하지 않으니 받아들인 것 아닌가? 아렌 자네가 왔다는 게, 이곳이 안전하다는 가장 큰 증거겠지.”
“…….”
두 번째 생의 아렌이었다면 절대 들을 수 없는 평가였다.
지난번 생에서 아렌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심심찮게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세 번째 삶에서는, 실상 행동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음에도 오히려 정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얼핏 무모해 보여도, 아렌이 하는 행동들은 결국은 가장 안전하게 이뤄진다고.
‘…사실은 오히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일부러 뛰어드는 일이 더 많은데.’
세간의 평가가 그렇게 이뤄진 이유는 아마도, 아렌의 마음가짐부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건에 뛰어들 때마다 아렌은 어느 정도의 위험인지 다 알고 있고, 그 끝에 자신이 다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행동 자체는 이전과 다르지 않지만, 훨씬 자세한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의 아렌은 위험 속에 뛰어들 때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잘 짜인 극본을 그대로 연기하는 배우처럼.
그 미묘한 차이를, 의외로 알아채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타박타박, 아렌과 레온나토스 앞을 걸어가던 유랑족 소녀 사야가 조금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이봐. 너무 태평한 것 아냐? 잡담은 그만하지?”
소녀의 태도에 오히려 너스레를 떠는 레온나토스.
아렌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조금 달라진 것처럼, 레온나토스의 태도 또한 조금 달라졌다.
아렌이 훨씬 흔들림 없는 참모격이 되어서인지, 레온나토스 또한 이전보다 더 여유가 흘러넘쳤다.
“뭐야, 역시 우리를 인질로 잡은 거였어?”
“그런 건 아니지만, 괜히 아저씨들 신경을 곤두세울 필욘 없잖아? 이방인을 마을로 데려가는 건 우리도 처음이니까.”
“흠. 마을에 첫 방문하는 제국인이라. 기분이 썩 나쁘진 않군.”
레온나토스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사야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레온나토스가 저렇게 낙관적이 된 이유도 아마, 나 때문이겠지.’
다행이라면, 조금 달라진 성격 때문에 바뀐 역사는 아직까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아렌은 안심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예전을 그대로 답습해가며 비원궁에서의 사건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저 멀리 설원 위로,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주변에 그들이 들어가 쉴만한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만, 혼자?”
레온나토스의 의문에, 아렌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유랑족의 마을은 땅 아래에 있어요. 지면의 눈을 파 내려가, 그 안에서 생활하죠.”
“…그걸 아렌 자네는 어떻게 알았지?”
“어어… 그보다 저기, 마중 나온 것 같은데요?”
마을로 점점 다가갈 수록, 흰 천과 눈으로 덮어뒀던 마을 아래에서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그들의 가장 중심에 있는 건, 다른 사람 키의 절반밖에 안되는, 세월을 견뎌내느라 모든 것이 쪼그라든 노파였다.
“호오, 먼 곳에서 귀인이 오셨군.”
“…제국의 열두 번째 황자, 레온나토스입니다. 그대가 이 마을의 촌장입니까?”
“그렇다네, 황자.”
촌장과 레온나토스가 서로 주도적이 되어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쩐지 아렌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이니, 반가운 마음에 조금 무리하여 초대해보았네.”
“…산맥 이남에는 이런 초대법이 없지만, 문화의 차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응하겠습니다.”
“그거 고맙군. 자, 여기 추운 곳에 있지 말고, 안으로 들지.”
기사들이 몸을 웅크리고 설원에 파인 참호 아래로 들어갔다.
참호는 각 방 사이로 복도처럼 퍼져 있었고, 레온나토스는 중앙의 가장 넓은 방으로 주술사와 단 둘이 들어갔다.
먼저 방 안으로 레온나토스를 들인 다음, 주술사는 아렌을 돌아봤다.
“다음은 자네 차례네.”
“…저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군.’
그제서야, 아렌도 노파의 표정을 보고 진상을 알았다.
레온나토스를 먼저 방으로 불러들인 건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고, 진짜 목적은 아렌이었다.
‘…내가 운명석 계약자인 걸 알고 있고, 그걸 숨겨주기까지 하겠다? 고맙기도 하지.’
오랜 세월의 여파가 내려앉은 노인의 표정은 간파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정도 내용만은 가까스로 알아낼 수 있었다.
잠시 후, 레온나토스가 밀실에서 나왔다.
“후, 아렌? 들어가 보겠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글쎄. 출신지가 어디고, 무슨 목적이고, 간단한 것들 뿐이었어. 그리 긴장할 건 없을 걸세.”
‘그렇다면 좋겠지만.’
아렌이 방과 복도를 나눈 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파서 만든 너른 방 안에 홀로 앉아있는 노파.
아렌은 정중하게 다가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노파는 대뜸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누구지?”
‘…역시.’
주술사 노파의 질문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아렌 역시 오랫동안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아렌은 주술사 노파에게만큼은 본론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실은 당신을 보는 게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음? 뭔가 착각한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아뇨,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산맥 너머에서 와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설원에서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만남이,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아. 하물며 산맥 너머의 사람이라니, 만나봤다면 잊었을 리 없지.”
“네. 당신은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 혼자 기억하고 있을 뿐이죠.”
“…호오.”
그녀는 비로소 아렌의 말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아렌은 말했다.
“사실 이번이 제 세 번째 삶입니다. 당신을 본 건 저번 삶을 포함해 두 번째죠.”
아렌은 왼손의 운명석 반지를 들어 보였다.
반지에는 여전히,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가느다란 실금이 하나 가 있었다.
아렌이 보인 운명석 반지에, 노파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렌이 운명석 계약자라는 건 마중을 보낼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과거로 되돌아왔다고? 그건 자의 착각은 아닌 건가? 그건 불가능한데.”
“네. 불가능하다고,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 이유가 뭐죠?”
“운명석은, 그가 원한 소원에 따라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지. 그건 아주 강력한 힘이지만, 현재가 아닌 다른 것을 바꿀 순 없어.”
“하지만, 계약자가 죽고 나서도 그 효력이 계속 유지되는 것들도 있지 않나요?”
“물론. 하지만, 그 힘이 과거를 바꾼 건가? 오랜 세월 유지되는 건, 법칙을 위배한 것이 아냐. 미래도 결국은 현재의 연속일 뿐이니까.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술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
그건, 아렌 또한 궁금하던 차였다.
두 번째 삶에서의 레온나토스와 더글라스, 아르테는 아렌과 라이안이 없는 세계에서 계속 삶을 영위해나가는지.
혹은 그 세계는 없던 것이 되고 세계의 모든 것이 바뀌어 예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인지.
“…자세한 원리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일이,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단 말입니다.”
“자네의 착각일 가능성은?”
“…전 이번이 세 번째지만,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은 벌써 일흔 번이나 과거로 되돌아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거짓말일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 또한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글쎄, 믿고 싶은 대로 믿으시지요. 저 역시 제가 직접 겪은 것을 믿을 테니까.”
아렌의 단호한 말에 노파는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말이 안되기에 선뜻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엔 아렌이 물을 차례였다.
“우리가 거기 도착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자네도 운명석에 대해선 대강 알고 있지?”
“네. 조건에 따라 사용자에게 신비로운 힘을 준다는 것, 정도는요.”
“내가 가진 능력은, 단순한 미래의 예지야. 내 의지대로 쓸 수 없고, 두루뭉술하지만.”
그리고, 그녀의 마을과 설원 전체에 큰 변화를 몰고 올 레온나토스의 방문을 예지능력이 미리 고해줬다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한가지 문제만 없다면.
“하지만, 당신은 이전 방문에서는 지금 우릴 불러들이지 않았어요. 이곳에 방문한 건 두 번째로 설원에 왔을 때였죠.”
“…뭐라고?”
“지금껏 두 번째 삶과 같은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번 초대로 모두 허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런가? 그거 미안하게 되었군. 변덕인지 뭔지, 묘하게 신경 쓰여 사람을 보내 확인하고 싶었지 뭔가.”
단순한 변덕. 고작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아렌이 노력해온 것이 허사가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당장 도국 레데와의 전쟁에서도, 무작위로 날아오는 화살에 미켈 랜돌프가 죽은 미래는 변함없었다.
‘미켈의 보폭까지 내가 정할 수는 없으니, 미켈이 살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더 죽었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바다 위 성벽에서 죽은 건 두 번째 삶과 마찬가지로 미켈 한 명만이 죽었다. 그것도 자신의 형이 쏜 화살에 맞아서.
이전에 한 선택과 확연히 다른 것을 고르지 않는 한, 현재는 어지간해서는 예전에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답습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건, 아렌에게는 다행인지도 몰랐다.
아직 설원에서 미치광이 눈의 사생아, 제이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가 달라진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제이드 역시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할 것이고, 피해는 두 번째 삶의 몇 배, 몇십 배나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아니면 반대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죽여?’
만약 그리하면 그때야말로 두 번째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발커스는 불꽃의 기사라 불리지도 않고, 그의 주인인 레온나토스 또한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하니까.
한번 달라진 뚜렷한 사실은, 줄줄이 그 뒤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아렌이 고민하고 있을 때.
아렌을 유심히 바라보던 노파는 문득 말했다.
“그런데, 아렌이라고 했나?”
“네, 그런데요?”
“자네는, 운명석에 뭐라고 소원을 빌었나?”
“…네?”
“운명석에 빈 소원 말일세. 분명 그것에 걸맞은 소원을 받았을 텐데.”
“그야, 제 능력은-”
아렌은,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엔 과거로 돌아오는 능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말한 대로 미래가 바뀌기 시작했다. 아렌은 그걸 언령이라 불렀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받은 능력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두 번째 회귀.
두 번째 회귀에서도 언령은 유효했다. 하지만 자신이 운명석으로부터 받은 능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답하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대가 받은 능력이, 뭐지?’
그 해답은 주술사 노파의 질문에 있었다.
누명을 쓰고 목이 잘리던 순간, 아렌이 빈 소원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