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열 살 때의 아렌으로 돌아오고, 며칠이 흘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렌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이미 머리속으로 정해놓은 다음이었다.
‘지금이라면,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훨씬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두 번째 회귀는 첫 번째 회귀와는 또 다를 테니까.
하지만, 아렌은 그러지 않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후였다.
두 번째 삶에서 레온나토스의 최종 위치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레온나토스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일지도 몰랐다.
괜히 두 번째 삶과 다른 선택을 해 오히려 세 번째 삶을 더 어렵게 할 가능성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낸다 해도 라이안이 다시 되돌리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두 번째 삶을 착실하게 밟아가다 보면, 결국 라이안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교국의, 그 자리에서.
그 미래를 다시 밟기 위해서, 최대한 이전의 행보를 그대로 답습해갈 필요성이 있었다.
‘…미세한 오차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이 일의 최대 난관은, 제1 황자 라이안이었다.
라이안은 세상을 특정 시점으로 다시 되돌렸고, 아렌은 그 흐름에 휘말린 격이다.
지금 이전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라이안과 아렌 뿐.
설령 아렌이 아무리 두 번째 삶을 똑같이 따라가려 한다 해도, 라이안이 작정하고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한다면 모든 노력은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아렌에겐 확신이 있었다.
‘…라이안은, 그러지 않아.’
라이안의 반응으로 보아, 황제가 네 명의 황자에게 각각 다른 임무를 주는 상황은 라이안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일에 신중하게, 정답만을 고르던 라이안이 유독 교국에 들어서자마자 폭주하듯 그답지 않게 굴었던 이유다.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라이안은 적어도 그 부근까지는 같은 행동을 할 거야.’
바로, 지금 아렌이 그런 생각이었으니까.
라이안이 가장 최선의 미래를 찾아 몇 번이고 되돌아가고 있다면, 교국에서 일어나는 경우의 수를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을 터였다.
아렌은 지금껏 다듬던 감자 알맹이를 지겨운 듯 툭,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가까스로 헤쳐 지나왔던, 수많은 선택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선 지금이라면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후회되는 선택지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렌은, 이전과 변함없는 미래를 위해 후회되는 선택들을 굳이 한 번 더 할 작정이었다.
‘라이안은 몇 번이고 되돌아올 수 있는지 몰라도, 나도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니까. 너무 날 원망하지 말라고.’
주방의 시종장이 내려와,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말했다.
“오늘 너희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제12 황자,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곁에 둘 시종을 원하셔서다. 아무래도 나이대가 비슷한 녀석들이 좋겠지. 혹시, 원하는 자가 있나?”
예전에 들었던 것과 완전히 같은 말.
궁에 팔려 오다시피 한 시동들에게는 팔자 필 몇 없는 기회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꼬질꼬질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아렌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손을 들지 않았다.
전에는 레온나토스의 시종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편이 시종장의 눈에 뜨인다는 것을 알기에 한 선택.
‘역시.’
“…거기, 너. 혼자만 손 안 들고 있군. 분명 욕심나는 자리였을 텐데.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양보해? 황자 전하 곁에는 너 같은 녀석이 적격이지.”
“…….”
예상대로, 시종장은 혼자만 가만히 있던 아렌을 뽑았다.
아렌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처음 걸을 때는 새롭고 즐거웠던 길도, 반복해서 걸으면 그만큼 익숙해져 지루하다.
특히나 더 나아 보이는 다른 길이 뻔히 보임에도, 의식적으로 이전에 걸었던 그 길을 반복하는 건 아렌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예전에 있던 일들의 재현이라 해도 좋을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아렌의 일상은, 마치 한번 겪었던 일을 다시 재현해서 꾸는 꿈과 같았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아렌은 열여섯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레온나토스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선페일 영지의 북쪽 얼어붙은 산맥을 통과하는 협곡 가도 앞에 있었다.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가신이 된 후, 두 번째 삶의 사건들을 착실히 밟아나갔다.
주정뱅이였던 위병 더글라스를 근위기사로 맞이하고, 레온나토스에게 황권 경쟁 참가 선언을 하게 했으며 사냥대회 중 제13 황자 돌멘이 죽게 내버려 뒀다.
아렌은 태양의 사라짐을 예언했고, 제5 황자 고드프리를 숙청하는데 일조했으며 훗날 낮안개 기사단이라 불리는 제8 기사단을 받아 아티스 국경으로 향했다.
도국으로의 유학과 전쟁, 그리고 네 황자의 시험까지.
도중 아렌이 개입만으로 죽지 않았을 자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아렌은 자신이 봤던 그 미래로 향하기 위해, 그들의 죽음을 못 본 체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어낸, 두 번째 삶과 거의 다르지 않은 세 번째 삶.
물론, 미세하게 다른 점도 있었다.
아렌은 첫 번째 삶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훨씬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앞날에 대한 예언을 훨씬 구체적으로 할 수 있었다.
예전에 했던 사소한 발언들까지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기에, 세 번째 삶을 사는 아렌의 말에는 은연중에 과거 겪었던 기억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렌에 대한 소문은 이전보다 훨씬 과장되고 부풀려졌다.
예전 삶에서 사람들이 아렌을 경이로워했다면, 지금 삶은 거기에 두려움이 조금 더해졌다.
“여기는, 마차가 통과하려면 백여 명이 달려들어도 몇 달은 걸릴 겁니다. 하지만 말이 다닐 수 있는 길이라면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죠. 맞나요?”
“…어, 어. 그 말대로다만.”
설명하려던 광부장 터커는 아렌의 말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를 시작해주시겠어요? 그 동안, 저희는 이곳이 제대로 설원과 연결되어있는지 확인하고 와야겠어요.”
이곳이 얼어붙은 산맥 너머, 설원으로 향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삶과 최대한 같은 행동을 하기 위해, 아렌은 굳이 설원 너머로 향하기로 했다.
6년간의 여정도,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끝난다. 아르테가 합류하고, 교국으로 향하면 비로소 예전과 다른 행동을 할 라이안을 만나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설원의 온천지대에서 재앙을 몰고 올 눈의 사생아, 제이드를 제국에 풀어줘야만 했다.
‘-앞으로 조금만 참으면 돼.’
앞에 어떤 비극이 놓여있는지 뻔히 알면서 방치하는 건,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표정이 조금 굳어있는 아렌에게, 레온나토스가 말을 걸었다.
“왜 그러지, 아렌? 역시 아렌 자네도 감개무량한가?”
“…제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닌가? 단지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지금껏 아렌 자네가 설원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서 말야.”
“…네. 그랬을지도 모르죠.”
“음, 역시.”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의 두 번째 삶에서, 레온나토스와는 서로 동고동락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 세 번째 삶에서의 관계는 아렌이 그를 철저히 이끌어주는 관계에 더 가까웠다.
아렌의 점괘는 묘하게 확신에 차 있었고, 레온나토스 역시 그런 아렌을 더욱 믿고 중용했다. 아렌이 일반 가신이었다면 그것만으로 역사가 크게 달라졌겠지만, 아렌이 원래도 유명한 점술가였기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내가, 설원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나? 확실히 그럴 만 하지.’
과거, 유랑족의 주술사 노파가 한 말이 있었다.
운명석으로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대체 무슨 말이야? 난 벌써 두 번째고, 라이안은 일흔 번은 된다는데.’
하지만 그녀가 별 생각 없이 한 말 같지도 않았다.
그녀라면 제국과 크게 연관되지도 않았으니, 예전과 조금 다른 것을 묻는다 해도 크게 영향이 가지는 않겠지.
물론 지금 설원으로 향해도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
아렌이 유랑족 소녀 사야의 마을로 초대되는 건, 두 번째 방문 후의 일이니까.
“아, 설원으로 향할 건가? 나도 가겠네.”
아렌이 기사들을 모으자 레온나토스도 자원했다.
기사들은 만류했지만, 아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삶과 같은 행보였다.
기사들과 아렌, 그리고 다섯 명의 기사들.
‘…전에도 다섯 명이었나? 아무튼.’
걸어서 꼬박 이틀이 걸리는 강행군 끝에, 아렌은 다시금 설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곳이 설원? 밟지 못하는 땅인가?”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레온나토스와 기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아렌은
“-와, 아.”
이 정도의 반응이 최선이었다.
한번 겪어본 일, 다시 감동 받기엔 한계가 있다. 처음에는 아렌도 성심성의껏 연기했지만, 수년간 같은 가면을 계속 쓰는 건 그게 천직이 아닌 한 힘들다.
‘…라이안은, 이 짓을 70번이나?!’
반복된 삶을 오래 살 수록, 라이안에 대한 경외심도 절로 솟았다.
‘그러니, 못 겪어본 일이 나오면 눈을 뒤집고 달려들 수밖에.’
아렌은 주위를 둘러보고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다.
“장관이군요. 협곡 가도가 설원과 이어져 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가져온 식량도 충분하지는 않으니까요.”
“응, 그러지… 잠깐만.”
“네?”
-화악!
펼쳐져 있던 눈밭이 갑자기 눈앞에서 솟구쳐올랐다.
땅 아래 흰 천을 덮어두고 위장해있던, 하얀 가죽옷을 입은 유랑족 전사들.
아렌의 기억에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렌은 세 번째 삶을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놀랐다.
‘-아니, 지금이 아니잖아!’
“뭐야, 너희들은!”
“…유랑족?”
갑자기 눈밭에서 솟구친 유랑족을 경계하는 레온나토스와 기사들.
서서히 뒤로 물러서면서도 항상 정확한 답을 내리던 아렌의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렌은 여전히 당황한 채였다.
‘…어째서, 지금?’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렌의 두 번째 방문때였다. 그것도 첫 번째 방문에서 남긴 발자국을 보고 기다리는 것.
설령 백보 양보해 이곳에서 유랑족을 만나더라도, 지금처럼 그들이 매복해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당신들이, 머무는 사람들이야?”
유랑족 소녀 사야가 물었다. 그녀의 말투는, 명백히 아렌들을 의식해 매복했다는 투였다.
“머무는 사람들?”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래. 우리가 산맥 너머의 정주민이다. 여기 이 분은 셰오덴 제국의 레온나토스 황자전하이시고, 난 이분의 가신인 아렌이다.”
“흐음. 아렌이라고 했어? 당신-”
“원하는 게 뭐지?”
유랑족 소녀 사야는 아렌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직 능력을 발현 못했을 뿐, 차기 족장 후보인 그녀는 이미 운명석을 받았고, 계약하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아렌에게서 어떤 기운을 느꼈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
“…당신들만 괜찮다면, 우리 마을의 초대를 받아주겠어? 주술사 할멈이, 당신들을 보고 싶다더군.”
바라 마지않던 바였다.
아렌은 변칙적인 상황에 미처 레온나토스의 의중도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답했다.
“물론, 초대엔 당연히 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