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96화 (196/227)

#196화

“…무슨 말씀이신지.”

“아닌가? 그렇다면 미안하군. 어쩐지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야.”

라이안은 선선히 물러섰지만, 입가에 띤 의미심장한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평소에 속마음을 잘 숨기는 아렌이지만, 지금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라이안 황자의 왼쪽 눈이, 운명석.’

줄곧 라이안을 따라다니던 수수께끼의 하나가, 이윽고 풀렸다.

운명석 계약자이면서 몸에 지닌 운명석이 없다는 궁금증. 목욕하는 와중에도 없었으니 몸 속 어딘가에 넣어뒀을까도 생각해봤지만, 눈이 의안이었다는 다른 의미로 새로웠다.

‘-그래봤자, 당장은 쓸 곳도 없지만.’

작은 돌이나 장신구였다면 몰래 훔쳐낼 수 있을지 몰랐다.

팔찌나 귀걸이, 반지조차도 주인조차 모르게 훔쳐 가는 소매치기에 대한 소문은 간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운명석이 정말 의안이라면, 그건 라이안을 죽이지 않는 한 힘들다.

“흠, 두 분 모두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아, 별것 아니네, 아르테 주교. 잡담이 조금 길었나 보군.”

아르테도 둘 사이에 어떤 기류가 오갔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녀로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필 아렌과 라이안 모두 운명석 계약자이기에, 두명 모두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아르테에게 지금 상황은 꽤나 거북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라이안은 느긋해보일 정도로 여유롭게 말했다.

“벌써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만, 지금 자네들은 교국의 당연한 권리를 침해하는 중이라네. 각 나라는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지.”

“그건,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놀랍군요. 그 말이 설마 당신의 입에서 나오다니.”

아르테는 가까스로 흥분을 억눌렀지만, 자신의 말이 점점 독살스러워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내 입에서라니?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물론이죠. 로이터 주교를 도와 전 대주교를 살해하고, 비원궁을 제압한 후 로이터를 내세워 대주교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잠깐.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심히 억울한 듯한 라이안 황자.

“이전 대주교를 죽인 건, 아르테 주교 자네가 아닌가?”

“-아직도 그런 망발을!”

벌떡 일어서는 아르테.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지금도 훤히 보여!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해?!”

“아, 그랬었지.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그랬었나? 당신 앞에서는 거짓말 따위 못하겠군.”

“…….”

방금은 오히려 아르테가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라이안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어도, 그가 이전 대주교를 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부하나 주변 인물들의 속마음을 읽어 교차검증이 가능하기에.

“아르테 주교, 당신이 날 의심하는 것도 당연해. 이해하겠네. 하지만, 증거는 어디 있지?”

“…증거?”

“그래. 내가 그를 죽였다는 증거 말일세. 설마, 자기 자신의 말이 곧 증거라는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

증거가 있을 리 없다.

그녀가 본 사람들의 속마음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 내용을 다른 이에게도 설득시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픈 부분을 찔렸군.’

물론 아르테를 지지하는 자들은 여전히 아르테의 말을 믿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 반대하는 쪽은?

로이터 대주교가 비원궁 안을 장악할 때, 라이안의 병사만이 힘써준 것은 아니다.

원래도 가장 유력한 차기 후보였던 만큼 그 추종 세력은 막강했다.

비록 지금은 그가 갑작스레 밀려난 여파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아르테가 전 대주교를 시해한 범인이라는 소문을 별 거부감 없이 믿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법이니까.

‘그대로 진흙탕 싸움이 계속된다면, 결국 웃는 건 라이안이 되겠지.’

그대로 교국 혼란에 빠진다면, 그것 또한 제국에게 나쁘지 않은 결과다.

“그대들이 무어라 주장하든, 우리는 로이터 주교의 요청을 받고 초청된, 정당한 손님이다. 그에 걸맞은 예를 갖춰줬으면 하는군.”

“바로 그 로이터 주교가 방금 막 축출된 참이죠. 이대로 조금 거친 축객령을 보내도 할 말은 없을 텐데요?”

“정식으로 초청된 이국의 황자를, 단 하루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추방한다라. 외교적 결례가 어마어마할 텐데. 그게 정말 이성적인 판단일까?”

“…칫. 한마디도 안 지는군.”

기가 질린 아르테가 중얼거렸다.

온갖 사람의 속마음을 봐오며 단련한 언변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은 이제 갓 서른을 넘겼을 나이임에도, 그 속에 노회한 능구렁이라도 들어앉아있는 것처럼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렌처럼.’

“…결례라. 하지만 예의란 본디 일방적이지 않죠. 교국의 신성한 신앙공간에, 타국의 불신자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몇 달이나 머무르는 것은 예의에 맞는 것인지, 되묻게 되는군요.”

“그 또한 로이터 대주교가 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없죠. 결국 이야기가 다시 돌아오는군요. 이 문답,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르테는 결심을 굳힌 듯했다.

대주교의 임기는 길다. 젊은 사람이 맡는다면, 그대로 40년은 훌쩍 넘길 것이다.

예정대로 아르테가 대주교 자리에 오르고, 높은 확률로 레온나토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면 둘의 관계는 다른 음모가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공고해진다.

당장의 외교적 결례는 레온나토스가 즉위하는 그 순간까지 감내하기로 결심한 아르테였다.

“…….”

하지만, 끝내 해소되지 않은 의문 하나.

“…그런데, 왜 굳이 들여보내달라고 한 거죠?”

“음?”

“이미 비원궁 안은 정상화되었어요. 병사도 없이 이곳에 들어오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짓일 테죠. 왜 이런 짓을 한 거죠?”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라이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눈동자가 더욱 잘 보였기에, 그의 왼쪽 눈이 의안임을 아는 아렌에게는 그 위화감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야, 당신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그 진의가 궁금했으니까.”

“…고작 호기심 때문에 호랑이 굴로 들어왔다는 건가요? 우리가 모든 뒷사정을 무시하고, 당신의 목에 칼을 꽂아넣는다면?”

“물론, 그런 것도 가능은 하겠지. 실제로 몇 번은 그런 적도 있었고.”

“…?”

아르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안의 말은 마치, 그동안 몇 번이고 죽어본 적 있는 말투였다.

‘…운명석. 라이안의 능력.’

지금 라이안의 속내를 가장 잘 가늠할 수 있는 건, 어느 누구도 아닌 아렌 본인이었다.

아렌이 물었다.

“만약 우리가, 이곳에서 당신을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말에 아르테와 두 기사는 물론, 라이안을 호위하는 위병들조차도 두 눈을 부라렸다.

“날 죽인다면? 그야, 난리가 나겠지. 지금으로선 나 다음으로 유력한 후보였던 레온나토스의 황제 즉위도 물거품이 될테고. 죽 쒀서 개나 준 꼴이 될 테지.”

라이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렌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는 확신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야.’

혹은.

이대로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기에 나오는 여유이거나.

‘라이안도 나와 같은 일을 겪었나?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을, 몇 번이나?’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얼기설기 엉성한 가설만을 가지고 확인해보기 위해 황자에게 칼을 들이밀 수도 없는 일.

하지만, 먼저 움직인 건 라이안이었다.

“음, 더는 안되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그의 위병들도, 승병들과 기사들도 모두 무기를 뽑았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벌어진 일촉즉발의 시간.

“…무슨 짓입니까. 라이안 황자. 이러기 위해서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 한 겁니까?”

“진정하시지, 아르테 주교. 그쪽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그럼 검은 왜-”

“-아, 이거? 이건, 당신들을 위한 게 아니야.”

뒤로 조금 물러난 아르테가 고개를 갸웃거린 사이.

라이안의 검이 손안에서 빙글 돌아, 어느새 자신을 향했다.

검 끝은 라이안의 턱 아래, 목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화, 황자.”

“생각보다 아르테는 위협이 되지 않고, 아렌은 눈치가 빠르군. 뭔가를 더 알고 있는 것도 같고. 다음엔 주의하지.”

모두가 아연실색한 가운데, 아렌만이 사건의 진상에 도달한 듯했다.

“…몇 번째입니까.”

아렌의 질문에 라이안은 달력 숫자를 말하듯 담담하게 답했다.

“대강 일흔 번은 넘을 거다. 그 중 레온나토스가 이만큼 부상한 건 이게 처음이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푸우욱!

검 끝이, 라이안의 목을 관통했다.

“전하!”

“세상에, 정말 찌르다니! 미친 거 아냐?!”

그의 위병들은 물론, 더글라스와 발커스까지 지금 사태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는, 의술이 신이 오더라도 그를 되살리지 못한다.

모두가 피흘리는 황자의 시신 앞에서 어쩔 줄 모를 때, 아렌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황자는 지금껏 몇 번이나 과거로 되돌아갔다. 그럼, 우리들은?’

라이안이 없는 현실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각하지 못할 뿐 그들 또한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그때, 불현듯 설원 유랑족의 주술사 노파가 한 말이 떠올랐다.

‘…과거로 돌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돌아갔잖아.’

물론, 이 모든 것이 라이안의 장대한 착각이었다면 일은 단순해진다.

교국에서 자결한 황자 자체는 깨어진 유리 조각처럼 조심해서 취급해야 하지만, 우선 여기 남겨진 자들에게는 황자가 과거로 되돌아갔든 어떻든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별일 안 생긴다면, 더 이상 생각하는 건 무용한가?’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순간, 아렌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크게 휘청거렸다.

“-이건.”

그건,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지금껏 언령을 통해 현실을 바꿔왔을 때 느꼈던 감각.

그것보다도 더 정확한 느낌은, 첫 번째 삶에서 목이 잘린 후 어린 시절로 돌아갔을 무렵의 감각이었다.

“…!”

“…!”

주위의 사람들이 아렌에게 뭐라 외치고 있었지만, 아득히 먼 곳에서 말하는 듯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렌의 시야는 이윽고 암막을 덮은 것처럼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

아렌은 지금을 기억하고 있었다.

황궁의 주방, 가장 허드렛일부터 시작하는 시동들이 시궁쥐처럼 모인 곳.

그곳에서 양파를 까고 있는 자신이었다.

“…다시, 되돌아온 건가?”

왜? 어째서?

이번에는 아렌도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라이안 뿐.

“이봐! 뭘 농땡이 치는 거야!”

시종장이 아렌에게 윽박질렀지만, 두번째 삶을 살면서 한층 신경이 굵어진 아렌에겐 별것도 아니었다.

아렌은 확신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

그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번 삶의 목표를 잡은 아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