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팔여 명의 사제들이 일제히 짐을 지고 올라갔다. 비원궁의 줄다리.
백여 명의 병사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 그곳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교국의 가장 중심부인 비원궁에서, 교국의 가장 적국인 제국의 병사들이 줄지어 내려오는 모습은 담백한 사실 이상의 상징성이 있었다.
지금껏 비원궁에 기거하면서, 사실상의 상왕 노릇을 했던 라이안 제1 황자가 드디어 병사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라이안의 참모에게 지금 상황은 확실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이안은 그의 기색을 흘깃 살핀 후 말했다.
“왜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게.”
“…아뢰기 황송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이 결정을 정말 이성적으로 내리신 겁니까?”
“이성적? 글쎄. 사람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뇨! 이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요!”
참모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지금껏 황자에게 조언할지언정, 정면으로 대든 적은 없었기에 그의 발언은 주변의 병사들마저 눈을 크게 뜰만큼 이례적이었다.
“고작 소문일 뿐입니다! 물론,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소문이기는 하지요. 되려 너무도 혹할만하기에 강한 고의성마저 느껴지고요! 아마 그 소문은 전하를 대상으로 한 함정일 테고, 설령 함정이 아니라도 소문의 진위 따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저잣거리를 떠도는 소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아마, 그렇겠지.”
라이안 역시 순순하게 수긍했다.
애초에 이토록 고의성 다분한 소문을 퍼트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사 다섯과 광신병 다섯을 북부로 올려보낸 것은 사실이고, 기사들만 모두 돌아오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을 올려보낸 임무는 극비로 취급되었기에 직접 올라간 병사들과 라이안 황자, 로이터 주교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
광신병들은 굳이 그 말을 퍼트릴 이유가 없고, 생존한 흑사자 기사단이 도착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나칠 수 없는 소문이야. 필시 미끼겠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비원궁 안에는 제국인을 탐탁잖게 생각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병사들이 비원궁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다면 모를까, 한번 자리를 비우면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어요!”
“음. 그렇겠지. 내 병사들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시의 눈이 되었으니까. 우리를 탐탁잖게 생각하는 놈들은 기뻐하겠지만, 당장 경비의 공백이 생겨난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만약 지금 안에 누군가 숨어들었다면, 꽤나 곤란할지도 몰라.”
황자의 말에, 그전까지 강경하게 주장하던 참모의 태도가 점점 누그러들었다.
“…전하?”
자신이 황자에게 경고하던 것들은, 황자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잘못된 행동을 취하고 있다면.
실책으로만 보였던 이 행동에, 나름의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혹시, 제가 전하의 혜안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혹, 이 행동에 제가 모르는 심계가 있다면, 고견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참모는 한층 온건해진 태도로 라이안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을 듣자 곧바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거창한 의미 따위는 없었어. 실은 저 소문의 의도가 뭔지, 내가 자리를 비운 비원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이런 일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거든.”
“전하! 그거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전하께서 교국 땅을 밟은 건 이번이 처음 아니십니까!”
“…그 뜻은 아니었지만, 얼추 비슷할지도 모르겠군.”
참모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라이안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교국 땅을 밟기 전만 해도, 라이안은 절대 틀린 답을 내리지 않는 자였다.
마치 정답지를 미리 외우고 행하는 것처럼, 모든 행동은 나중에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어떤 선택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에 차 행했다.
하지만 교국 땅에 오고 난 후에는, 마치 새집에 온 어린아이처럼 마음 가는 곳, 재미있을 것 같은 곳으로 멋대로 가곤 했다.
“자네에겐 미안하군. 하지만 내 사정도 이해해주게.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는 미래라면 되돌리면 그만이겠지.”
“…”
또한, 이전에도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는 순간이 꽤 되었지만 교국에 오고 나서는 그 빈도가 부쩍 늘었다.
‘…전하께서는, 대체.’
라이안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지내는 참모조차도, 지금 라이안의 변화는 부담이었다.
*****
비원궁의 복도 창문에서, 좁은 줄다리를 통해 다수의 제국 병사가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로써 비원궁 안의 감시망도 한층 옅어졌을 테고, 그들이 관리하고 있을 감금 시설 또한 허술해졌을 터.
아르테의 아군이 될 주교, 혹은 부당하게 갇힌 비원궁 신도들을 풀어줄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아르테의 선택은 달랐다.
“…곧바로 대주교에게 가봐야겠어.”
자신이 몸을 숨기고 고작 몇개월 동안, 자신을 아는 사람 태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을 풀어주고 같이 싸우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면 필연적으로 정면 돌파 하게 된다.
“중간은 다 건너뛰고, 곧바로 대주교라? 그것도 좋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아이기스 수도원 원장과의 대화가 한창일걸?”
“그러니 더 좋지. 모르는 척 원장님도 인질로 삼아버리는 거야.”
아렌은 혀를 내둘렀다.
“…독심술이 없었다면 절대 찬성하지 않았을 계획이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도 없으니 어울려는 주겠어.”
“물론 그래야지. 아, 마침 좋은 순간에 와주는데?”
복도 먼 곳을 바라본 아르테는 금방 기사들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복도 끝에서부터, 위병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명이라면 금방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명이라면, 기습으로 두 명을 동시에 베어 넘기지 않는 한 칼보다 외침이 더 빠르다.
‘여기선, 의심받지 않고 넘기는 게 우선인가?’
다행히 위병들은 사제복을 입은 아렌과 기사들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비원궁 안의 경비를 도와주던 병사들이 자리를 비웠기에, 그 부분의 충원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때, 별 무리없이 그들의 곁을 지나가던 비원궁 위병에게 아르테가 문득 말했다.
“내가 교국의 정당한 주교, 아르테다.”
후드를 벗고 당당히 외친 아르테.
너무도 갑작스런 사태에 위병은 칼을 뽑으며 고함을 치려 했다.
위병의 칼은 더글라스가 막았다.
검집에서 뽑히려던 칼날은 더글라스의 손에 단단히 틀어막혀 빛을 보지 못했다.
위병의 입은, 그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위병에 의해 막혔다.
불시에 일어난 일이지만, 얼른 옆의 또 다른 위병을 제압하려던 발커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두 위병을 바라봤다.
“…아군?”
마치 사전에 계획이라도 되어있던 듯한 기민한 동작이었지만, 정작 동료의 입을 틀어막고 기절시킨 위병은 아르테를 보고 놀라며 소곤거렸다.
“정말 주교님이시군요! 언제부터 궁 안에 계셨습니까!”
“오늘 아침이에요. 그보다, 몰래 로이터 주교를 만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마 가능할 겁니다. 마침 지금 위병이, 아르테 주교님 지지파거든요.”
아무리 아르테라도 비원궁에 근무하는 모든 위병들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로이터와 아르테, 누구를 지지하는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허술한 계획이라. 허술할 만 하군.’
두 위병 모두 로이터 파였다면 방금 아르테의 행동 한 번으로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테의 능력 앞에선 모두 무의미한 가정이다.
아르테는 방금 자신을 도와준, 이름도 모를 위병에게 고했다.
“그럼, 지금 바로 로이터 주교 앞으로 안내해주세요. 저를 봤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시고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릅니다. 궁 안에 같은 편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두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가 같은 편이라는 건 어떻게 알죠?”
“…”
“죄송하지만, 제가 눈앞에서 확인한 자 말고는 믿을 수 없어요. 이해해 주시겠어요?”
“그야 물론입니다, 주교님. 당신의 눈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잣대일 테니까요.”
아르테는 위병의 속마음을 읽고 말했다.
“네. 저를 도왔다는 건 대를 넘어 할만한 자랑감이 될 테죠. 제 계획이 성공한다면요.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어요?”
*****
비원궁의 상층부, 로이터 대주교의 회견장.
로이터 대주교와 턴데일 수도원장은 둘 다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굴복시키려는 자와 굴복당하지 않으려는 자 사이의 기싸움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지속됐다.
“제명된 아르테 주교의 출신지가 바로 원장님의 수도원이지요. 원장님께서 절 지지해주신다면, 지금 교국의 혼란을 잠재울 강한 원동력이 될 겁니다. 교국의 평안이 곧 신의 뜻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저희는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할 뿐, 함부로 신의 뜻을 예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겐 언제나, 자신에 맞게 의미를 곡해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나라 안의 혼란으로 아트마를 섬길 충실한 종이 몇이나 다칠지 모릅니다. 혼란이 우려스럽다면 우선은 혼란부터 잠재우고, 그 뒤 신께 사죄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 사고방식도 가능하겠죠. 하지만 전 그런 식으로 신앙하지 않습니다.”
“…….”
“…….”
두 교인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치할 때.
끼이익.
굳게 닫혀있어야 할 회견장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먼젓번의 라이안의 일도 있었기에, 로이터의 심기는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또 누구냐. 아무도 들이지 말라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주교님.”
들어온 사람은, 네 명의 사제들.
모두 여느 수도원에서 입는 평신도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로이터의 말에 대답한 자는 자주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아르테?”
“네. 오랜만이군요. 로이터 주교님.”
뜻밖의 인물. 로이터는 조용히 놀랐다.
“…복도 밖에 동료가 있나?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마땅한 무기도 없군.”
비원궁에 잠입하기 위해 바구니에 몸 하나만 간신히 욱여넣은 수준이다.
장검이나 창을 챙겨올 겨를은 없었다.
기껏해야 방금 기절시킨 위병에게서 한 자루, 안내해준 위병에게서 또 한 자루.
기사에게 한 자루씩 장검이 쥐여졌을 뿐.
심지어 아렌과 아르테에겐 무기조차 없었다.
반면, 회견장 안에는 여섯 명의 광신병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로이터의 말을 신의 것처럼 따르는, 엄선된 친위대다.
아르테는 말한다.
“밖에 다른 아군은 없습니다. 모두를 끌어들이는 것보다, 이 방법이 가장 피가 덜 흐를 것이기에. 밖에서 들어보니 불필요한 희생을 원치 않으신다고요? 저도 동감입니다.”
하지만, 이 안에서 아르테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둘 뿐.
“…오랜 방랑 생활로 미쳐버린 건가? 고작 두 명의 이교도로 신성한 교국의 전사들을 상대하려고?”
“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죠.”
아르테는, 로이터를 향해 선고하듯 엄숙한 목소리로 고했다.
“로이터, 당신은 제국 황자의 힘을 빌려 대주교 자리를 찬탈했죠. 그러니 이번엔, 제가 제국의 힘을 빌려도 그 불만은 없으시겠죠?”
“그 힘이라는 게, 고작 칼잡이 둘인가?”
“네. 하지만 그 두 명이 불꽃의 기사와, 제국에서 검성에 가장 가까운 자라면 어떨까요?”
“-검성?”
줄곧 비웃음이 서렸던 로이터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