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수도원장 턴데일은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비원궁의 성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곳에 앉은 사람의 낯이 썩 익숙지는 않았다.
“아, 오셨습니까. 제가 직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할 일이 적지 않다보니, 이런 식으로 앉은 채 맞이하게 되는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트마의 가장 충실한 종을 뵙는 자리인데, 응당 제가 찾아뵈어야지요. 그 자리에 앉아계신 모습을 보니, 날 때부터 정해진 자리인 것처럼 어울리시는군요.”
“…과찬의 말씀을.”
대주교 로이터와 수도원장 턴데일이 서로 마주했다.
대주교의 자리, 성좌는 비원궁의 알현실에서도 더욱 높은 곳에 있었다. 아래에 알현하는 자는 자연히 대주교를 우러러보게 되는 구조.
그 자리에 앉은 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퍽 불만이 많은 턴데일이었다.
개조차도 자신의 구역에선 꼬리에 힘을 바짝 준다.
자신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공간에서, 로이터 대주교는 비비 꼬지 않고 본론부터 말했다.
“…최근, 불온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원장께서, 저를 그리 탐탁잖게 여기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제가요? 설마, 로이터 대주교께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축출된 전 주교 아르테는 분명 아이기스 수도원 출신이었죠.”
“아, 그랬었던가요?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대꾸하는 턴데일.
말로만 로이터의 말을 부정할 뿐, 턴데일 역시 자신의 태도를 숨기고픈 생각은 없었다.
“…얼마 전 이단 심문관이 찾아갔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수도원의 수색을 허락하지 않았다고요.”
“그랬죠. 심문관의 의혹이 워낙 주먹구구식이라, 어느 수도원장이라도 거기에는 응하지 않았을 테죠.”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본 교의 근간을 다잡는 중책을 맡은 자들인데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 수도원은, 저희 아이기스 수도원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
로이터 대주교는 침묵했고, 그 반응을 본 턴데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로이터 대주교가 자신과 아이기스 수도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지금의 반응으로 보아, 로이터에 크고 작은 반발을 한 수도원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아이기스 수도원 또한 그들 중 하나일 뿐.
그가 의심하더라도 고작 의혹일 뿐, 확신은 아니다.
“…비원궁 안의 상황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혼란스러우시겠죠.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도국은 부를 쌓고, 제국은 땅을 넓혀갈 겁니다. 이럴수록 교국은 하나가 되어야겠지요.”
“네, 물론입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턴데일.
로이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빌어먹을 놈. 끝까지 숙이지는 않으시겠다? 하긴, 아르테를 키워낸 수도원이니 이 정도는 당연히 하겠지.’
하지만 이 이상의 압박은 힘들었다.
비원궁의 부름에 아이기스 수도원은 응했고, 신도들에게 짐을 들려 보내며 비록 형식상이나마 비원궁에 봉사하는 형태를 취했다.
턴데일은 속으로 웃었다.
‘성질대로 하지 못해 꽤나 답답하겠지. 일단 명분은 가져갔으니, 그 정도로 만족하시지. 괜히 화풀이하진 말고.’
하지만, 아직 로이터는 턴데일을 놓아주고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원장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계속 잡아두고 있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돌려보내라, 이 찬탈자야.’
“하하, 전과 같이 좋은 숙소를 주셔서, 신도들이 여독을 푹 풀 수 있겠더군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단한 일정이었고, 몇몇은 연기까지 해야 했으니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턴데일의 말처럼 실제로 대부분의 신도는 예배도 거르고 쉬는 중이었다.
‘…제발, 아르테도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
여기 불려오기 전, 아르테가 지은 짓궂은 표정을 떠올린 턴데일은, 차라리 사고를 치더라도 자신이 비원궁을 나간 뒤에 해줬으면 싶었다.
물론, 아르테는 그들의 사정따위 봐주지 않겠지만.
*****
“…좀 더 잠잠해진 뒤 움직여도 되는 것 아냐?”
“아니. 움직이려면 지금이어야 해. 아이기스 수도원의 사람들이 남아있어 어수선한 지금 말야.”
아르테는 비원궁의 복도를 익숙하게 지나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자신의 집이었으니, 어디에 언제 위병이 지나는지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
향하는 곳은, 자신의 파벌이라 분류됐던 주교의 집무실이었다.
그라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을 지원해줄 게 분명했다.
아렌을 안내하며, 아르테는 모퉁이를 돌았다.
“…여기야?”
모퉁이를 돌자 고풍스러운 원목 문이 보였다.
꽤 고급스럽게 잘 꾸며진 방이었고, 실제로 내부는 넓었다.
아렌에게도 방의 내부는 훤히 보였다.
왜냐하면, 원래라면 닫혀있어야 할 원목 문은 반쯤 부서진 채 아무렇게나 달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문이 부서진 채-”
아르테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 안에선, 벽면을 가득 채웠던 오래된 성서들 때문에 항시 종이 묵은내가 났다.
정겹던 그 내음조차도, 모든 책과 가구가 나간 방 안에서는 잔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 방 주인이, 조력자야? 다른 사람은?”
“…몇 명 더 있어. 하지만 이래서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때, 아르테는 놀란 고양이처럼 등줄기를 세우더니 방 한쪽 벽에 모습을 감췄다.
그녀가 몸을 숨겼다는 건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것이고, 자신이 들켜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란 뜻.
곧 수사 하나가 아렌과 두 기사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뭐냐! 너희들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민머리였다.
머리카락이 없었기에 겉늙은 20대로도, 젊어 보이는 50대로도 보이는 남자에게 아렌이 대표로 나서며 말했다.
“멋대로 수도원을 돌아다닌 점 사죄드립니다. 저흰 아이기스 수도원에서 온 아트마의 충실한 종입니다.”
“…아아. 오늘은 아이기스 수도원의 차례였나? 그런데, 여긴 무슨 볼일이지?”
“이전에 방문했을 때, 이곳 방을 쓰시는 분이 제게 덕담을 해주셨지요. 그때가 생각나 다시 찾아뵈었습니다만…”
“덕담?”
“네. 계속 정진한다 해서 아트마를 만나 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께 보내는 경애야말로 자신을 갈고닦아 내면을 빛나게 한다고 하셨죠.”
아렌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그동안 아렌을 오래 본 더글라스와 발커스 또한, 아렌의 언변에는 혀를 내둘렀다.
‘…징글징글한 녀석.’
아렌이 가진 것 중 가장 오래 된, 날카롭고 손에 잘 맞는 무기.
그건 예지능력도, 언령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표정만으로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는 기술조차도, 생면 부지의 사람을 홀려 믿고 따르게 하는 아렌의 화술에 비하면 사소할 뿐이다.
“…좋은 말을 해주셨구나.”
“네. 그래서 한 번 더 찾아뵙고 싶었는데… 그때는 성함조차 듣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그 분은, 지금 출장을 가셨다.”
“출장이요?”
“그래. 국경 근처라, 아쉽게도 언제 오실지 기약은 없구나.”
“그건, 어쩔 수 없지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니까요.”
“…이 주변에 딱히 비밀은 없다만, 너무 돌아다니지 말고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이 궁에는 아트마 교도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민머리의 사내는 왔던 것보다는 느린 걸음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텅 빈 집무실 안으로 숨었던 아르테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렌이 물었다.
“…어때? 저 대머리, 아는 사람이야?”
“…하미오 주교. 친 로이터 파야. 대머리는 아니고.”
“이 방의 주인은?”
“뤼예 주교는, 아직 죽은 건 아냐. 그건 다행이지만… 하미오도 그가 구금되어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어.”
조력자 주교가 어디 갇혀있다는 말에, 아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뭘 그리 고민해? 붙잡혀있다면 분명 지하 감옥에라도… 아. 그런가?”
비원궁은 바늘처럼 뾰족한 암초 위에 올라타, 마치 공중에 붕 뜬 듯 지어져 있다.
구조상 지하란 존재할 수 없고, 비밀 공간 또한 만드는데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르테는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어쩔까, 몇 명 더 만나볼까? 방금처럼 난 숨은 채로 마음을 엿보면-”
“아니, 그건 관두지. 혹시나 의심이라도 사면 곤란하니까.”
그보다, 방금은 좋은 말을 들었다.
“방금 그 대머리도 뤼예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지?”
“하미오. 대머리는 아냐. 그래, 모르는 눈치지만…”
“그만한 사람도 모른다면, 그들의 관리는 비원궁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것 아냐?”
“…라이안!”
아렌은 복도 너머로, 흔들다리가 이어진 해안가를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분명,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겠지?”
*****
라이안 황자와 그의 친위병은 외지인인 만큼 교국 안의 소문에 더욱 민감했다.
문득 그들의 귀에,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비원궁에서 비밀리에 제국의 기사 다섯, 승병 다섯을 제국 북부로 보냈다는 것.
그곳에서 돌아온 건 승병들 뿐이고, 제국 기사 다섯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승병들에게 배신당해 죽었다는 것.
그리고, 승병들은 죽었다고 알려진 황자가 실은 살아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
특히 소문의 마지막 부분은 그냥 좌시할 수 없었다.
라이안은 소문을 수집해온 병사에게 물었다.
“…이 소문은 묘하게 구체적인데. 누가 퍼트린 거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유행하는 노래의 시작이야 워낙 모호한지라.”
“…그렇겠지. 우문이었군. 답을 찾으려면 훨씬 적합한 자가 있는데.”
라이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황자는 그대로 회견 중인 로이터 대주교를 찾았다.
-벌컥!
“아, 회담중이셨군요.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
라이안은 거침없이 턴데일의 옆을 지나갔다.
‘아, 이 자가 바로.’
비로소 턴데일은,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제국 제1 황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로이터 대주교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지금, 비원궁의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입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차후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잠시면 되는 일이라.”
“…그럼, 말씀하시지요.”
대주교의 미간이 순간 움찔하는 걸, 턴데일 원장은 놓치지 않았다.
“혹시 대주교께서는, 죽은 줄 알았던 제국의 황자가 살아있다는 소문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 금시초문이군요.”
“그렇다면, 항간에 떠도는 소문 역시 사실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소문이라뇨?”
보기 좋게 의뭉을 떨었지만, 물론 대주교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알음알음,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조처를 취하기엔 너무 일렀고, 어차피 라이안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괜히 소문을 무마하다 들키느니, 차라리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더 나았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황자로서, 좌시할 수는 없는 소문이더군요. 제가 소문의 출처를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자신의 병력이 비원궁 밖. 교국의 영토 안을 활보해도 되겠냐는 질문이었다.
라이안을 내보내고 싶은 로이터는 급하게 대답했다.
‘…호오, 그렇군.’
그리고, 그제서야 수도원장은 아렌이 부랑아들에게 사탕을 쥐어주며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게 한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황자의 친위병을, 비원궁 밖으로 빼내고 싶었던 건가?’
황자와 병사들이 비원궁을 비우는 건, 아렌과 로이터에게 모두 좋은 일이다.
라이안은 좋을 대로 농락당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묵례하고 방을 나가는 라이안.
그대로 턴데일을 스쳐 지나간다.
‘…….’
그때, 턴데일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턴데일에게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오래도록 운명석 계약자인 아르테와 함께 지냈다.
속셈이 없는 표정과 있는 표정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방을 나가는 라이안의 표정은 명백히 후자였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에 알면서도 일부러 놀아주고 있는 듯한-’
턴데일은 아르테에게 들었던, 세상에 아는 사람 몇 없는 비밀을 떠올렸다.
‘라이안 또한, 운명석 계약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