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아이기스 수도원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먼저 세워두었던 계획의 상당수는 못쓰게 되었다.
아렌과 아르테, 기사들은 비원궁에 잠입할 다른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얼마 동안 지속된 노력은, 제법 싱겁게 끝났다.
“…로이터 주교가 직접 초대했다고요?”
“그래. 아르테. 원래 예정되어있던 순번이니, 그리 이상할 게 없을 수도 있겠지만.”
턴데일 수도원장으로서도 의아한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저 초청이 사실이라면 원래 계획했던 작전은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도리어 일이 너무 술술 잘 풀리기에 의구심이 든다.
“이단 심문관들의 보고가 아직 가지 않은 건가?”
“그건 아닐 거에요, 더글라스. 이단 심문관의 보고는 전서구로 보내졌을 거고, 원래 예정되어있던 순번인데도 ‘굳이’ 로이터 주교의 친서가 온다는 것부터가 이쪽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원궁 안으로 숨어드는 작전을 쓸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발커스가 비아냥대듯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전부 안으로 들인 다음, 모조리 피를 보겠다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에요. 발커스 기사님. 그랬다가는 대번에 다른 수도원의 반발을 살 테니까요.”
“아, 역시 그렇겠죠?”
발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부터, 발커스는 미인에게 약했다. 아르테가 사절단의 말단으로 위장했을 때부터 이미 아르테에 관심을 보였던 전적이 있다.
그때의 말단과 지금이 교국 주교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아는지는 모르지만, 발커스는 여전히 아르테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렌이 문득 말했다.
“…아르테. 다른 수도원의 반발을 산다는 말은, 지금 다른 수도원들 역시 이쪽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건가?”
“아마도? 어때요, 원장님?”
잠시 교국을 나가 있던 아르테가 수도원장을 돌아봤다.
원장은 아렌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입니다. 제게도 다른 수도원에서의 불만 섞인 의견이 제법 많이 수집되었으니까요. 비록 아직까지는 대놓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만.”
아무리 절차에 문제가 있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로이터 주교는 현재 비원궁의 가장 높은 좌석에 앉는 자였다.
그 상징성만으로도, 교국 안에서 그에게 대적할 자는 없다.
“과연, 그렇군요. 그런데 원장님. 그러면, 최근 이곳과 비슷한 일을 겪은 수도원이 얼마나 될까요?”
“그건-”
“아이기스 수도원에서 한 의심이라 해봤자, 이곳에 못 보던 마차 두 대가 들어왔다, 그것 뿐이에요. 이곳에 교국 유일의 대적자 아르테가 왔다는 증거로는 너무 빈약하죠.”
아렌의 말은, 당사자인 아르테가 받았다.
“그야 그렇지. 내 출신이 이곳 수도원인 것만 빼면.”
“…….”
“그러니, 저쪽도 확고하게 답을 내린 건 아니다?”
“당연히 이전보다는 더 경계하겠지. 하지만 실상은, 수도원장을 불러다 놓고 은근히 주의를 주려는 것 뿐일지도 몰라.”
아렌의 추측 대로라면, 이대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턴데일 수도원장의 얼굴엔 여전히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아렌 비서관. 비원궁이 우리의 혐의를 확신하지 않는다 해도, 더 면밀히 조사할 것은 뻔합니다. 특히 다른 자들은 몰라도, 여자의 몸으로 짐을 짊어진 채 비원궁을 오르면 너무 눈에 띌 겁니다.”
“그렇겠죠. 설령 비원궁 안에 잠입한다고 해도, 인부 네 명이나 비게 되니 그만큼 인원을 채워야 하고요. 원래는 미리 기별을 넣어, 비원궁 안의 도움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이젠 힘들겠죠.”
“…….”
“흐음.”
아렌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턴데일 수도원장이 아르테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아르테. 저 자는 믿을만한 자입니까? 다른 기사들은 몰라도, 저 자는 얼마나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군요.”
“원장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믿으셔도 좋아요. 저 녀석도 의외로 범상치 않거든요.”
비록 특기인 점괘도 당장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아렌에 대한 아르테의 평가는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르테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고개를 갸웃거린 원장, 그때, 아렌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흠. 그럼 이렇게 하죠. 이대로 계획대로 진행하되, 비원궁 내부의 협력은 구하지 않는 방법으로요.”
“네? 그럼 빠진 인원은 어떻게…”
수도원장은 수도원 정문으로 이단 심문관이 쳐들어왔을 때보다 더 놀란 눈빛이었다.
당황해 아르테를 돌아보자, 아르테는 거 보라는 듯 작게 웃기만 했다.
*****
일주일 후.
태양교의 사제복을 입은 더글라스와 발커스는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아트마 교국의 심장부라 불리는 비원궁인가? 역시 자부심을 느낄 만 하네.”
더글라스의 중얼거림에 발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저런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죠? 멀리서 보니 기둥이 실처럼 가느다란데. 마치-”
신이, 비원궁을 위에서 붙잡고 있는 것처럼.
평소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발커스였지만, 짐짓 불가능해 보이는 비원궁의 구조를 보자 없던 신앙심도 절로 생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글라스의 바로 뒤에서 아렌이 소곤거렸다.
“쉿. 감탄은 나중에 하고, 주변이나 잘 살펴요. 이제부터 들키면 모두 끝장이니까.”
“거참, 걱정도 많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주변에 사람이 몇인데.”
발커스와 더글라스는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뒤에서 보면 몸통이 다 가려질 만큼 커다란 바구니를 짊어지고 있었다.
발커스는 벌써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매일 이만한 짐이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그럼 비원궁 안의 인원을 써도 충분할 텐데요.”
그 질문에 답한 건, 이번 행렬의 인솔자인 수도원장 턴데일이었다.
“전에 말했듯, 교국 안에서 각 수도원끼리의 관계는 수평적에 더 가깝습니다. 비원궁 또한 하나의 수도원일 뿐이지요. 물론, 그곳에 대주교가 거주할 뿐.”
짐을 짊어진 수도원 사제들 사이로, 비원궁의 승병들이 얼굴을 확인하며 지나갔다.
혹시나 분장하고 이들 사이에 숨어있을지 모를 아르테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비원궁 승병이 지나가길 충분히 기다린 후 수도원장은 말했다.
“…또한 대주교는 가장 아트마 신과 가까이 있는 주교라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명목상은 수평적인 관계인 각 수도원에서, 봉사의 형식으로 노동력을 빌리는 것입니다. 비원궁이 각지의 수도원보다 우위에 있다고, 직접 인정하게 하는 것이죠.”
“…과연. 그럼-”
“쉿! 다가옵니다.”
“…….”
“…….”
기습적인 속삭임에 발커스와 더글라스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건 아렌과 아르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검사할 것이 남았나?”
예전보다 훨씬 삼엄해진 검사가 못마땅하다는 듯, 턴데일의 목소리는 조금 각져 있었다.
“그야, 특별히 더 인원을 검사하라는 지시셨으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아무리 비원궁의 사람이라 해도, 턴데일은 한 수도원의 원장이다.
고작 비원궁의 입구를 지키는 위병에게 당할 취급은 아니었지만, 턴데일은 그들의 성공적인 잠입을 위해 그저 참을 뿐이었다.
“…위에서의 지시가 그렇다면, 만족할 만큼 얼마든지 하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럴 작정입니다.”
위병은 발커스가 짊어진 바구니를 덮은 천을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둥근 모래알 같은 밀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밀알? 아직 도정도 하지 않은 겁니까?”
“이번 년에는 흉작이었지. 도정하지 않은 만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지 않나.”
“-흠.”
사라락.
위병은 바구니의 입구 부분 밀알을 손으로 쥐었다 놓았다.
“일행 중에, 여자는 없습니까?”
“이번 짐은 특히 더 무거워서, 여자가 들 만한 게 못 되네”
“아, 그렇습니까? 하긴, 이번 등짐은 저번보다도 훨씬 큽니다.”
“저번보다 인원을 줄였지. 수도원 안에서 할 일도 있고 말이야. 얼마 전, 밤중에 뒤숭숭한 일도 있었고.”
“크흠흠…”
비원궁의 승병은 헛기침을 하며 인원수를 헤아렸다.
짐을 지고 올라가는 인원은 총 82명.
확실히 저번보다 스무 명 가량 줄어든 숫자였다.
짐을 든 사람들과 화물까지 검사를 마친 위병들은 비원궁으로 이어진 흔들다리로 가장 앞 대열부터 보내기 시작했다.
-삐걱, 삐이걱.
흔들다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거센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렌은 중얼거렸다.
“대체, 한 번에 몇 명이나 오른 거에요, 더글라스?”
“걱정 마. 역사상 단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다고 하니까.”
“이번이 역사상 최초로 끊어지는 날일지도 모르잖아요!”
“뭐야, 아렌. 평소 너 답지 않은데? 이렇게 겁이 많은 녀석이었냐?”
아렌이 겁을 먹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북부 태양교의 신전, 대사원 한복판에 있는 태양흔에서, 운명석의 힘으로 떨어지던 고드프리 황자의 몸은 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운명석 계약자인 아렌에게는 그 힘이 적용되지 않았다. 아렌은 자유낙하 하지 않기 위해 고드프리의 몸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야만 했다.
이 다리도 마찬가지. 지금껏 비원궁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운명석의 힘 때문이라면, 아렌의 몸이 닿아있는 동안에도 그 효력이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하긴. 그럼 그나마 다행일지도.’
한동안 신경 거슬리는 삐걱임이 계속됐지만, 사선으로 이어진 줄다리를 오르는 인원들은 이윽고 비원궁의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후!”
“아, 죽겠다!”
가지고 있던 짐이 버거웠던 자들은 땅에 급하게도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어허! 여기다 짐을 풀면 안돼!”
“짐은 좀 더 안쪽이라고!”
차례차례 안으로 들어오는 인원들에게 짐 내려놓는 곳을 지시하는 병사들.
“것 참, 서두르기는.”
발커스와 더글라스는 그대로 바구니를 옮기는 척하다, 병사들의 시선이 멀어진 틈을 타 바구니의 위를 열었다.
“자, 어서 나와.”
바구니의 윗부분은, 먼젓번의 병사가 확인한 대로 밀알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바구니의 상단부 일부만 그럴 뿐, 아래의 대부분은 빈 공간이었다.
바구니 안에 팔다리를 구겨 넣고 있던 아렌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후, 평생 팔다리 못 필뻔했네.”
발커스의 등짐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르테가 낑낑대며 기어 나왔다.
여자의 몸인 아르테,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아렌은 지나치게 눈에 띈다. 그건 분장으로도 쉽게 해결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등짐인 척 바구니 속에 숨어있기로 한 것.
두 기사의 체격이 크기에, 바구니 역시 훨씬 큰 것을 쓸 수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끙차!”
아이기스 수도원 사제의 등짐에서도, 두 명의 사제가 더 기어 나왔다.
“이러면, 우리가 사라져도 인원수는 똑같죠?”
대역을 비원궁 안에서 구할 수 없다면, 가지고 들어오는 수밖에.
이로써 비원궁 위로 올라온 인원 82명, 내려가는 인원 82명이 된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별 이상 없군요.”
어수선한 틈을 타, 병사들의 눈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수도원장이 다가왔다.
“그럼, 로이터 대주교를 만나고 올 텐데, 그동안 어떡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아르테라도, 지금 곧바로 움직일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아니, 우문이었군요.”
하지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아르테의 표정을 본 던테일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