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제국의 두 기사는, 순식간에 일곱의 사체를 만들어냈다.
다행히 끝까지 보는 눈은 없었고, 일곱 명의 사체는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겹겹이 쌓아뒀다. 아주 잠시라면 눈에 띄지 않도록.
그 뒤 흙을 뿌려 땅의 핏자국을 지웠고, 마차에 남은 피도 우유로 닦아내 희석시켰다.
하지만, 빵 속에 숨겨웠던 칼은 다시 숨길 수 없었다. 싸우는 도중 빵은 이미 박살이 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니까.
기사들은 안절부절 못 했지만, 아르테는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당장은, 검문이 필요한 상황은 없을 거에요. 잠깐만 다른 짐 사이에 대충 숨기시죠?”
“…그렇게 하기엔, 검집도 놓고 온 터라 휴대하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르테 양.”
발커스가 대답했다.
더글라스는 대강 피를 닦아낸 장검을 바라보다 문득 중얼거렸다.
“…이참에, 버리고 갈까?”
“무슨 말씀입니까, 더글라스 경!”
“어차피 도적들에게서 가져온 창이나 도끼라면 있으니까요. 창은 몰라도, 도끼면 농민의 호신용 무기로는 썩 적절합니다. 이미 검의 강도는 예전같지 않아요. 한 번 더 열이 닿았기 때문에.”
검을 만드는 과정에는, 달궈진 칼을 단련한 다음 식히는 과정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그 온도와 절차에 따라 검은 엿가락처럼 늘어지기도 하고, 유리처럼 깨어지기도 한다.
가마 안의 온도는 고작 빵이나 구을 정도고, 그럼에도 역시 철검이다.
기본적인 강도는 있겠지만, 그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을 터.
“…우선은 가지고 가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아렌은 기사들의 검을 받아들었다.
검에서 손잡이와 검막이 부분을 빼고, 검신과 슴베 부분만 남아있는 직선의 검날.
제대로 된 검보다 훨씬 파지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만한 무위를 보여준 것이 대단하다.
하지만…
‘벌써부터 이런 식이면,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지도.’
쉽게 생각하고 온 건 아니지만,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언령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렌은 생각했다.
*****
아르테가 말한 마을, 아이기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두건을 깊게 눌러썼다.
외부인이 잘 들르지 않는 마을 어귀에서, 사람들은 두 대의 마차를 경계심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고작 네 명, 그중 성인 남자는 둘 뿐이라 그 이상의 경계는 하지 않는 듯했지만.
“…이봐, 사람들이 엄청 빤히 쳐다보는데? 괜찮은 거 맞아?”
“네 명 모두 말을 타고 왔으면 이거보다 배는 더 이목을 끌었을걸? 저기, 산속으로 들어가.”
아르테는 마을에서도 조금 떨어진 산속으로 이어진 길을 가리켰다. 길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자 외부인의 출입을 반기지 않는 듯한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 위에 지어져 있고 높은 담까지 빙 둘려 있어, 수도원은 마치 요새를 연상케 했다.
아렌은 수도원의 높다란 철문 앞에 마차를 세운 후, 잠시 심호흡하고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누구십니까?”
잠시 뒤, 철문의 옆에 작게 난 창이 열렸다.
좁고 긴 틈 속으로 수사의 눈만 조금 보일 뿐이었다.
“지나는 길에 들른 과객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이곳에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현재 외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저, 안에 기별을 넣어주십시오. 수도원장님께 드릴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
아렌은 작게 열린 창틈으로 서신 하나를 밀어 넣었다.
미심 쩍은 듯 서신을 받아든 수사는, 곧바로 눈을 크게 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수사가 빠르게 물러나는 소리.
아렌은 바로 옆에서 후드를 눌러쓴 아르테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괜찮은 거 맞아?”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저 수사는 지금도 내게 호의적이니까. 윗선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저 수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잠시 뒤.
염소 모양의 수염을 기른 한 사제가 아래로 내려왔다.
앞서간 수사의 복장이 짙은 회색이었던 것과 달리, 방금 내려온 사제는 황궁에 사절로 왔던 자들처럼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저… 이 서신은 대체 누가-”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갑자기 전해 받은 것이라서요.”
“저에겐 굳이 둘러대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저는-”
“그게 정말이에요? 턴데일 원장님?”
아렌의 옆에 줄곧 잠자코 있던 아르테가 후드를 쏙 벗었다.
“-아르테!”
“여기는 정말 안전한 것 맞겠죠? 뒤에 있는 무사님들 무서운 사람이니까, 거짓말은 안 돼요.”
그 말에, 턴데일이라 불린 사제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르테 주교님에 한해선, 거짓말도 의미가 없죠. 당연히 잊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뵙는데,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요즘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죠.”
수도원의 커다란 철문이 서서히 열렸고, 두 대의 마차가 그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다음에야 철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
마차는 수도원 안쪽에다 대고, 수도원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아렌 일행을 맞이했다.
“조금은 걱정했는데, 여기는 아직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턴데일 원장님.”
“무사… 라고 해도 될까요? 여기 오는 길에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강도를 만났어요. 오는 길에 일곱 명 쯤?”
“그거 한번이 전부입니까? 그럼 운이 좋으신 겁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나라 안 정세가 급격히 악화하고 있어요. 로이터 주교는 국정을 안정시킬 생각은커녕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시킬 생각이고요.”
수도원장이 로이터를 대주교가 아니라 그냥 주교라 부른 건 특기할만한 일이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인지, 아르테난 짝 손뼉을 치고 말했다.
“참, 아직 소개도 안했네요. 여기는 교국의 레온나토스 황자의 비서관 아렌. 두 무사님은 제국의 으뜸가는 기사인 발커스와 더글라스 경이에요.”
“턴데일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도움을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턴데일을 보고, 발커스는 오히려 당황해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돕다니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건 빈 말이 아닙니다. 나라가 정상적인 때라면 간섭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지금 같이 비정상인 시점에, 이게 도움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수도원장의 말에 기사들은 나름대로 감명을 받은 모습이었지만, 아렌에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아르테가 정권을 잡으면, 아르테 파벌이 아닌 다른 자들도 저렇게 생각하려나.’
몇 마디쯤 더 인사를 나눈 뒤, 아렌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잠입 작전은 여기 아르테 주교가 제안한 겁니다. 저희는 철저한 조력자라서, 자세한 사정은 모두 아르테가 알고 있어요. 여기 오면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난폭한 계획이군요.”
아르테가 세부적인 계획까지 짜놓지 않는 건, 항상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기에 대부분의 일은 임기응변으로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오랫동안 봐온 턴데일 원장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 그 정도의 계획만 듣고 잠재적 적국에까지 따라 나온 아렌과 기사들까지는 턴데일조차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하긴. 아르테와 손을 잡을 정도라면 적어도 그에 준하는 사람 쯤은 되어야겠지.’
조금 놀란 마음을 가다듬은 뒤 턴데일이 말했다.
“비서관께서는 하루에 비원궁에 오르는 인부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네, 대강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매번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아무리 적어도 백은 넘죠. 저마다 등짐을 들고, 가느다란 줄다리를 오르내리는 겁니다.”
좁은 줄다리라면 한 번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건널 수 없다.
그렇다면 서로 맞은 편에서 왕복하는 것도 힘들 테니, 여러 사람이 줄지어 한번 올라갔다가 그대로 한 번 내려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비원궁에서는 올라갔던 인부의 숫자를 세고, 내려가는 인원의 숫자 역시 철저히 기록하죠. 만약 사제복을 입고 비원궁 안에 잠입한다면, 비원궁 안에 있던 인원과 이리 입을 맞춰 그 사람을 대신 아래로 내려보내야 할 겁니다.”
“…과연.”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테의 계획을 처음 들었음에도, 수도원장은 작전에 필요한 요소를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모략에 익숙한 건가? 하긴, 아르테를 기른 사람이라니 그럴만도 하지.’
어쩌면, 그녀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교 자리에 오른 것 또한 수도원장의 조언 때문일지 몰랐다.
“비원궁에 물자를 나르는 건, 각지의 수도원에서 돌아가며 합니다. 사제들을 동원해 물자를 보급하고, 그 김에 각지의 수도원에서 보고를 받는 거죠. 마침 저희 수도원의 차례가 일주일 뒤입니다. 그때까지 몸에 맞는 수도복을 준비해두죠.”
“감사합니다, 수도원장님.”
“저희 교국을 위한 일이니 당연히 협조해야지요. 그런데, 잠입한 뒤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수도원장의 말에 대답한 건 아르테였다.
“그야 곧바로 주교를 잡아야죠.”
“아르테. 그건-”
“네.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가장 피를 덜 보는 방법이기도 해요. 제국의 병사를 빌려, 교국의 국경에서 맞붙는 것보다는요.”
“…하긴. 아르테 주교는 어릴 때부터 무모한 사람이었죠.”
어쩐지 아련한 눈이 된 턴데일 수도원장.
그 모습을 본 발커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모한 사람이라. 나도 한 명 아는데.”
“그래? 그게 누구지?”
“…모르면 됐습니다.”
아렌의 반문에 발커스는 딴청을 피웠다. 이따금씩 더글라스와 눈을 맞추는 걸 보면, 더글라스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앞으로 일주일이나 있습니다. 이곳이 집 같을 순 없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이라도 푹 쉬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큰일이 남아있으니까요. 신도들에게는, 먼 곳에서 온 제 지인이라 대강 둘러두겠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라.’
수도원장의 말에 아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작전 자체가 지나치게 아르테의 능력에 기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능력 이외에도, 다른 곳에서 성공률을 더욱 높이고 싶었다.
그때 집무실 문밖에서 누군가 고했다.
“수도원장님.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그거참 드물구나. 손님이 두 번이나 찾아오다니.”
턴데일은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아렌은 그의 표정에 떠오른 일말의 불안함을 읽었다.
“그래, 누가 찾아왔더냐.”
“그게… 이단심문관입니다.”
순간 턴데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문밖에선 마음을 읽을 수 없는지, 아르테 또한 마찬가지.
이단 심문관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분위기로 아렌 또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어떡할까요? 원하신다면 우리가 원장님을 겁박해 억지로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됩니다. 잠시만 인질이 되어주신다면요.”
수도원장이 아르테의 협력자가 아니라, 무도한 제국 간자에게 위협당한 피해자라고 꾸며내면 적어도 핍박받는 일은 없을 터.
하지만 턴데일은 무언가를 각오한 듯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손님들께서는 여기 계속 계셔도 될 겁니다. 밖에 온 손님들에게는 제가 나가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