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저기, 주교 각하.”
“그냥 아르테라고 부르라니까요?”
아르테는 발커스를 향해 눈을 곱게 흘겼고, 넓어진 길에서 마차를 나란히 몰고 있던 발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르테 양. 영 입에 안 붙다 보니-”
“참, 그러고 보니 슬슬 이름을 부르는 것도 지양해야겠네요. 흠, 뭐가 좋을까-”
“아, 저.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알아요. 국경을 넘을 건데, 별다른 준비는 필요 없냐, 맞죠?”
“…….”
발커스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차를 몰고 대륙을 북에서 남으로 횡단하는 동안 호칭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헤집는 듯한 아르테의 발언은 몇번을 접해도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별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국경을 나가는 검문이 삼엄해진 만큼, 들어가는 데는 덜 신경 쓸 테니까.”
‘…그게 사실일까?’
발커스는 반신반의하는 시선으로 앞을 바라봤다.
저 앞으로, 평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교국의 완고함을 상징하는 듯한 거대한 성벽은, 동에서 서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성벽 아래, 상대적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성문이 있었다.
성문은 아직 까마득하게 멀리 있었지만, 성문에서 이어진 마차의 행렬이 먹이에 꼬인 개미 떼들처럼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과연.”
“내 말을 알겠죠?”
아르테의 말에 발커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국 안으로 들어가려는 마차는 많다.
아렌과 기사들의 마차 앞으로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늘어서 있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그 뒤로도 수없이 늘어설 터.
별다른 위장을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 대열에 스며들면 그만이다.
줄은 천천히 줄어들었고, 줄을 선지 3시간쯤 지나자 드디어 아렌의 차례가 되었다.
성문을 가로막은 위병이 물었다.
“뭐냐, 너희는. 못 보던 사람인데.”
“네! 저희는 알자인 지방에서 온 부부랍니다!”
위병의 질문에 아르테는 오히려 씩씩하게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위병은 마차의 짐칸으로 시선을 옮겼다. 짐칸 안에는, 짐이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호박과 감자 등 농산물이 담긴 한 바구니와 치즈와 기다란 빵이 담긴 한 바구니, 그리고 우유 한 솥이 짐의 전부였다.
“교국으로 가는 목적은?”
“은빛매 상단에서 마차를 수배했다길래, 수확을 마치고 부업이라도 할까 싶어서요! 보시다시피 우리 신랑이 참 부지런하답니다?”
와락, 아렌의 팔을 끌어안는 아르테.
아렌은 귀찮다는 듯 아르테의 엉겨 붙는 팔을 떨쳐냈지만, 그 행동은 마치 숫기 없는 어린 신랑의 그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혼부부의 닭살 돋는 행각을 더는 보기 어렵다는 듯, 병사는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르테는 보란 듯이 더욱 아렌에게 찰싹 달라붙었지만.
“그럼, 문제 없는 건가요, 위병 나리? 이제 지나가도-”
“잠깐. 기다려봐.”
아렌의 마차가 고이 통과할 뻔했지만, 앞서간 마차를 살피고 뒤따라온 또 다른 위병이 막아 세웠다.
“…우유?”
“아, 오늘 새벽에 갓 짠 것입니다. 날씨가 선선해 아직 신선할 거고요. 한번 맛보시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이 안을 한번 휘저어봐도 되겠지?”
“아래에 팔 물건입니다! 그렇게 비위생적으로-”
“난 쏟아부어도 상관없다만?”
“…….”
아르테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위병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에,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잠시 후, 병사들은 봉술 수업에 쓰는 기다란 나무 작대기를 들고 와 우유 솥 안을 휘휘 저었다. 불투명한 우유 솥 안에 뭔가를 숨겨서 들어가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것.
그 뒤 야채가 든 바구니, 기다란 빵이 든 바구니를 잇달아 들어본 병사들.
하지만 바구니에도, 마차의 옆이나 아래에도 숨겨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없군. 통과해도 좋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드셨을 텐데, 우유라도 한잔 드시지요.”
“흥! 제국놈들의 우유를 마시면 재수만 없지. 됐으니까 지나가.”
아렌의 마차는 위병소를 통과했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르테는 훨씬 태연했지만, 계속 태연함을 연기하던 아렌은 몸에 힘이 쪽 빠져 숨을 몰아 쉬었다.
“-후, 어떻게 넘긴 모양이군.”
“그래. 저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아렌은 뒤로 시선을 보냈다.
아렌의 마차 바로 뒤로, 더글라스와 발커스가 탄 마차가 검문을 하고 있었다.
둘 다 평범한 농부의 차림을 하고 있었고, 가져온 갑옷은 결국 어딘가에 숨겨둬야만 했다.
위병소 근처 외딴 숲에 묻어뒀으니, 사실상 임무가 끝나기 전에는 갑옷을 되찾지 못한다.
하지만, 갑옷은 포기하더라도 검만큼은 포기하지 못했다.
교국 안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검을 사용하게 될 테고, 교국 안에서 장검을 공수하는 건 너무 눈에 띄는 일이니까.
결국 어딘가에 검을 숨겨두고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건장한 사내 둘이 타고 있는 마차이기에, 둘의 마차는 아렌의 마차보다 훨씬 가혹한 검문을 받았다.
“…우와. 짐칸 상판까지 들어내는데? 저기 넣자고 한 게 누구였더라?”
“…나였지. 저기 넣지 않길 잘했군, 아르테.”
발커스가 고삐를 잡은 마차는, 아렌의 마차보다 두 배는 더 오랜 시간 후에 검문을 통과했다.
그들의 마차에서 검이 나올 리 없었다.
두 사람의 검은, 아렌의 마차에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도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차라리. 당당하게 장검을 차고 통과하는 게 나았을까? 세상이 뒤숭숭하니 호신용으로 차고 있다고 하면-”
“아니. 이미 농사꾼치고 지나치게 건장한 몸들이야. 거기에 칼까지 차고 있으면, 대번에 기사인 게 들통날걸?”
뒤따라온 발커스의 마차가 합류했다.
“후아, 나올 게 아무것도 없단 걸 알아도 살 떨리던데요, 아렌 공? 마차까지 죄다 해체할 기세라니.”
“여자와 아이가 탄 이 마차도 검문을 소홀히 한 건 아니지만, 남자 둘이 탄 마차에 그토록 삼엄한 검사라니….”
아르테 보다는, 외부에서 온 다른 세력의 개입을 더 무서워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르테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안 그래도 그런 보고를 받은 모양이더라고. 제국에서 밀정을 보낼 수 있으니 특히 주의하라고.”
“…밀정이라.”
아렌은 이번 교국 방문이 처음이었지만, 지금 교국 국경의 경계가 평소보다 훨씬 삼엄하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때, 아르테. 지금도 별문제 없이 비원궁까지 잠입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전보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르테.
하지만 이제와서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이미 기호지세였다.
“국경은 넘었어. 다음은?”
“국경 근처 아이기스라는 마을에 수도원이 있을 거야. 거기 우릴 도와줄 사람이 있어.”
“거리와, 가는 도중의 장애물은?”
“거리는 마차로 하루 정도, 길도 험하지 않고 관문도 없어.”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테의 말 대로라면 별일 없이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불안하면, 지금이라도 한번 점괘를 보겠어?”
“-아니. 관두지.”
“아깝네. 오랜만에 보고 싶었는데.”
아렌의 점괘는 미래 예지가 아니라, 미래 개변에 가깝다. 바꾼 미래가 부자연스러울수록 아렌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은 커진다.
적지에서 점괘 때문에 꼼짝 못 하게 된다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크다.
‘그래. 일단은 국경을 넘었으니까.’
얼마나 금방 또 다른 위협이 올까, 싶었던 것.
조금은 태평했던 생각을, 아렌은 곧바로 후회하게 된다.
*****
“…확실히, 관문은 없네.”
“그렇지? 길도 평탄하고.”
“산적만 없었다면 완벽했을텐데.”
아르테가 말한 아이기스로 가는 길은, 꽤나 한적해서 도와줄 만한 사람도 딱히 안보였다.
갑자기 마차 두 대를 단숨에 에워싼 사람들은, 모두 익숙한 듯이 조잡한 창이나 도끼를 들고 있었다.
“교국 안의 치안이 원래 이렇게 안 좋았어?”
“…아니. 내가 떠났던 몇 달 사이에 급격히 나빠졌나 보네.”
적은 모두 일곱 명. 마차 두 대에 실린 짐은 보잘것없지만, 아렌 일행 중 기껏 싸울 수 있어 보이는 사람은 맨손의 남자 둘 뿐이었다.
두 마차가 서자마자, 발커스와 더글라스는 양손을 들어 올리고 마차에서 내려 아렌의 마차 짐칸으로 걸었다.
“…저, 무슨 볼일이시죠? 입국허가라면 국경의 관문에서 받았는데요?”
“시끄러, 불신자 주제에 감히 신성한 땅에 들어서?”
“운이 나빴구나, 너희들. 하지만 그 와중에 운이 좋아. 죽이지는 않겠다. 말과 마차까지 모두 두고 꺼져.”
“…가자. 아렌.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어.”
아르테가 아렌의 팔을 끌어내렸다.
그러면서, 도적에겐 들리지 않게 아렌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거짓말이야.”
“알아.”
굳이 아르테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아렌의 기술로도 알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렌은 이미 뒷좌석에 올라타 있는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더글라스. 지켜줄 수 있어요?”
“그야, 그러려고 따라왔으니 당연하지.”
둘러싼 산적들은 위풍당당하게 선 발커스와 더글라스를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둘이 들고 있는 건, 딱딱하게 구운 길쭉한 빵이었으니까.
길이만 놓고 보면 몽둥이로 손색이 없었지만, 그뿐이다.
“…이 자식들, 정신이 나갔나?”
“됐어! 사정 봐주지 말고 모두 밀어버려!”
도적들은 사방에서 다가왔다.
아렌에겐 단검 한 자루 뿐. 심지어 아르테는 무기조차 없었지만, 아렌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렌의 앞을 지키듯 선 발커스.
그에게 도적의 도끼가 내리쳐졌고, 발커스는 두껍고 기다란 빵으로 도끼날을 막았다.
-깡!
그리고, 빵은 도끼날을 받아넘기며 청명한 쇳소리를 냈다.
“뭐, 뭐야!”
“소리 뭐야. 역시 약해진 건가?”
당황한 도적과, 얼굴을 찌푸린 발커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고 도적을 향해 빵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빵으로 얻어맞던 도적의 몸에 붉은 선이 가느다랗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빵 속에 묻혀 있던, 검날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국경을 넘기 전, 어떻게든 검을 통과시키고 싶었던 둘은 기책을 냈다. 빵 반죽 안에 검을 심고, 그대로 구워내기로 한 것.
빵 반죽은 검을 품고 부풀어 올랐고, 그대로 굳어져 검을 품은 빵이 완성됐다.
“발커스 경! 검의 강도를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소리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미 반쯤 검신이 드러난 빵을 휘둘러 도적의 오른팔을 벤 발커스는, 그대로 그가 놓친 도끼를 집어 올렸다.
저들이 수적 우위이고, 포위되어있었지만,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 만큼 실력의 격차가 있었다.
발커스는 아렌 주변의 방어, 더글라스는 공격.
발커스가 도적들의 공격을 뿌리치는 동안, 더글라스는 호흡 몇 번을 할 동안 세 명을 쓰러뜨렸다.
이제 입장이 역전되어 도적들은 어느 타이밍에 도망갈지만을 눈치 보고 있을 뿐.
그걸 알아챈 더글라스가 도적들을 비웃었다.
“운이 나빴구나, 너희들.”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더글라스는 도적들 누구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더글라스의 칼을 감쌌던 빵이 도적의 피에 젖어 눅눅해지며, 감춰져 있던 검신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와중에 너흰 정말 운이 좋아. 고통스럽게 죽지는 않을 테니까.”
더글라스이 검이 한층 날카롭게 휘둘러졌다.